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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얼마 전에도 취미생활에 관한 글을 여기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저번 글은 취미로서의 컴퓨터 키보드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신변잡기적인 글을 쓰려 합니다.
사실 이런 신변잡기적인 글은 쓸 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어느 한 분야에 전문하는 커뮤니티에는 그런 신변잡기적인 글을 올리기에는 미안한 감정마저 듭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대형 커뮤니티에 종종 있는 자유게시판들은 큰 강물과 같아서 잘못 발을 디디면 가라앉거나 떠내려가기 마련입니다.
제가 조금 더 부지런했다면 블로그나 소셜 네트워크 등도 방법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왠지 여기에는 이런 글을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만만하게 느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스타벅스처럼 크지는 않더라도 좋은 커피를 내어주는 동네의 단골 카페를 연상케 합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더라도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즐거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음... 죽은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카페의 분위기에 정적을 끼얹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슬슬 산 말, 본 말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1. 키보드
그동안 키보드에 대한 글을 많이도 올렸습니다.
요즘 좀 뜸해진 것은 같은 주제로 계속 글을 쓰는 것도 멋적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제 흥미가 그만큼 식었다고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될 것 같습니다.
키보드를 취미로 한다는 건 대부분에게는 장비를 취미로 한다는 게 됩니다.
새로운 물건을 사고, 그 신선함이 사라질 때가 되면 또 다시 새로운 물건을 사고, 이것을 반복하는 꼴입니다.
지난 몇개월간 키보드에 돈을 많이도 써 왔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에게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많은 돈을 썼습니다.
물론 힘들게 돈 번을 쓰는 만큼 카드를 긁을 때는 그 나름의 합리를 가지고 소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 합리라는 것이 취미의 범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얄팍하고도 얄팍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래서 다르니까 사야 하고, 저것은 저래서 나중에는 못 구하니 사야 하고.
어쩌면 그래봐야 본질은 컴퓨터용 휴먼 인터페이스 장비인 키보드일 뿐입니다.
(글이라도 많이 두들겨 써내려가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죄책감이 좀 덜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취미라는 단어의 정의부터가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적당한 선을 모른다는 것이 됩니다.
취미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초심자 시절에는 즐거울 따름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취미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새로움도 잠시간입니다.
좋은 것을 많이 쓰고 겪을수록 점점 "좋음"의 기준선은 높아만 갑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들여야만 좋은 것을 맛볼 수 있고,
처음에는 모든 게 좋고 새롭게 느껴졌다면 이젠 좋은 것을 맛보는 빈도가 줄어들어만 갑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준이 높아질 수록 한때 평범했던 것들에서 결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키보드는 너무 서걱거리고, 이 키보드는 배열이 불편하고, 이 키보드는 키감이 균일하지 못하고...
예전에는 잘만 사용했던 키보드들이지만 이젠 만지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 됩니다.
어느 선에서 만족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그 자본주의적 가책 때문에서라도 한 취미를 오래 붙잡지 못하고 결국에는 멀어지고 마는 것 같습니다.
2. 커피
커피는 그래도 비교적 꾸준히 붙잡고 있는 취미입니다.
커피도 장비적 취미로 들어가면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취미입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커피 용품을 모으는 일보다는 다양한 커피를 맛보는 일이 아직까지는 더 즐겁습니다.
제가 커피를 즐기는 방법은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겁습니다.
볶지 않은 커피 생두를 사서 직접 볶고 직접 갈아서 직접 내려 마시는 건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과정에 크게 부담을 느끼지는 않으려 합니다.
원두를 볶는 것도 전문 장비 없이 시간이나 온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무쇠 냄비만을 이용해 볶고,
커피를 내리는 것도 물 온도나 수질, 상세한 드립 기술까지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만큼 균일도가 떨어지고 반복성이 결여됩니다.
같은 원두를 볶더라도 볶을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볶아지고,
같은 커피를 내리더라도 내릴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내려집니다.
변수 관리를 빠듯하게 하지 않는 대신에 그 우연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변명하고는 합니다.
(물론 그런 만큼 상업적으로 돈 받고 팔 만한 것은 못 되겠지요)
그렇지만 가끔씩은 회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두를 쓰더라도 제가 잘못 볶아서 낭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
거기에 모자라서 추출까지 대강 해 버리는 게 된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은 커피가 어떤 맛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취미로 커피를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키보드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취미를 누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임스 호프만이라는, 얼핏 봐서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이 사람을 접한 것은 유튜브 추천 영상을 통해서입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영국식 억양으로 영국식 유머를 담아 커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워낙에 화자의 캐릭터가 강했던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커피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람의 미각과 후각에 관련된 만큼 종종 추상적으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커피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종종 희떱게 느껴질 때도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다시 추천 영상란에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지난 주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사람에게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한때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이었고, 지금 잘 읽고 있는 책인 커피 아틀라스의 저자이고,
런던의 로스터리인 스퀘어 마일의 설립자이고, 무엇보다 그렇게 허우대만 멀쩡한 사람이 아닌,
겸손하면서도 지식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도 며칠 전의 일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이 사람의 영상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입니다.
위에서는 키보드에 빗대어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것도 이 사람의 말을 응용한 것입니다.
"If everything you drink is special, then nothing is special."
"마시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면, 마시는 그 어느 것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가끔씩은 덜 특별한 커피도 마시고, 덜 특별한 키보드도 만져 보는 것이 현실 직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취미로서의 키보드에서 느꼈지만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던, 그 무의식적인 권태가 설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 하는 그대로 커피를 즐기려 합니다.
결국 취미는 취미를 하는 사람이 즐겁다면 그걸로 된 것이니까요.
3.
원래 키보드를 시작한 계기도 컴퓨터로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키보드가 장비를 사는, 소비적인 취미라면 글쓰기는 생산적인 취미입니다.
취미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만큼, 한 취미에 몰두하면 다른 취미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적인 취미는 머리를 그만큼 굴려야 하는 만큼 소홀해지는 속도도 더욱 빠릅니다.
글을 쓰는 도구에 빠져 글쓰기가 소홀해진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이 완성되려면 얼만큼의 시간이 걸릴 지는 모릅니다. 애초에 완성이 되기나 할런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인 만큼, 전문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그 과정을 즐기려 합니다.
무언가를 잘 하려면 꾸준히 많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키보드를 두들겨 글을 써 보았습니다.
글감이라는 것이 원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닌 만큼, 글감이 생겼을 때 글을 써야지요.
일면식 없는 사람의 신변잡기를 길게 늘어놓은데다가 잘 쓰여지지도 않은 글을 누가 읽을지는 모릅니다.
수필의 탈을 쓴 잡글이고,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며 쓴 글은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저 문득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을 뿐이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읽기 어렵거나 지루한 글만 아니었으면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조금 더 영양가 있는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공개 커뮤니티 게시판을 블로그처럼 쓰는 것에 대해서도 형식상으로나마 심심한 사과를 올립니다.
그래서 저는 기계식(체리청축) 7년 무접점(노뿌) 45g균등 2년 쓰다가 지금은 펜타만 쓰고 있습니다.
음향도 실제 음이라는 레퍼런스가 있는데 반해 키보드는 저가 멤브레인이라도 못 쓸 정도는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