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에는 여러 과정을 거칩니다. 가장 먼저 설계가 있습니다. 설계는 기술자만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기술자가 차지하는 인건비는 결코 싸지 않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인력을 그리 비싸지 않은 인건비로 고용할 수 있는 곳에 설계 거점이 위치합니다.
완성된 설계를 가지고 반도체를 제조합니다. 제조는 전 공정(웨이퍼)과 후 공정(패키징/테스트)로 나뉩니다. 전 공정과 후 공정은 같은 곳에 있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됩니다. 또 설계 장소와 전 공정이 꼭 같은 곳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대게 반도체 공장이라고 하면 전 공정을 가리킵니다.
전 공정은 전력과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야 하고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인력을 고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속도로나 공항과 접근성을 확보하고, 또 공장 부지를 더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인건비의 비율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후 공정의 요구 조건도 비슷하지만 여기에선 인건비의 비중이 커집니다.
이렇게 세 단계를 거쳐 반도체를 만들면 유통 업체에 넘어갑니다. 반도체 제조사가 반도체 사용자와 직접 연락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구매 수량이 엄청나게 크다면 몰라도요. 애플, 삼성, 화웨이, 샤오미 같은 회사들이라면 직접 연락합니다. 이들 큰손들은 계약을 맺어 구매 수량과 가격, 납품일을 결정합니다. 계약 기간은 1분기 단위로 합니다.
대부분의 중소 규모 사용자들은 유통사를 통해 반도체를 조달합니다. 당연히 대형 업체들보다 비싸게 삽니다. 또 짧은 기간 동안 가격이 크게 바귀기도 합니다. 이를 현물 가격이라고 합니다. 반도체 공급이 부족하면 수요가 몰리면서 실제 수요보다 가수요가 늘어납니다. 그래서 가격이 폭등합니다. 메모리의 경우 이런 가격 폭등과 폭락이 반복됐습니다.
반도체 회사들은 이런 경험 때문에 수요가 몰린다고 해서 바로 증산하지 않습니다. 또 자체 생산 라인과 파운드리를 모두 활용해 수요 변동에 대처합니다. 실제 수요가 공급보다 많이 높다고 판단해야 생산 규모를 늘리고, 반도체 업체들이 투자해도 수급 균형이 맞춰졌다고 판단하면 구매자 쪽에서는 투자를 멈춥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반도체 공장을 새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반도체 공급 부족이지만, 가장 큰 목적은 그게 아닙니다. 반도체 생산의 전 공정이 아시아 지역에 집중되면서 생기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 아시아 외에 다른 지역에서 전 공정 생산 라인을 만드려는 것입니다.
미국 반도체 산업 협회가 2021년 4월에 발표한 Strengthening the Global Semiconductor Supply Chain in an Uncertain Era(불확실성의 시대에에서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망의 강화)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에 국가/지역별 전 공정 생산 능력은 대만이 20%, 한국이 19%, 일본이 17%, 중국이 16%였습니다. 극동 아시아만 72%라는 소리죠. 미국은 13%, 유럽 8%, 기타(싱가포르, 이스라엘)은 7%입니다.
아시아에 반도체 공장이 집중되면 아시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위험 부담이 커집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입니다. 대만과 일본은 대지진의 위험 부담이 있고 한국은 북한 문제가 있지요. 여기에 중국의 패권 쟁탈이 뚜렷해지고,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투자가 부쩍 늘었습니다.
미국 반도체 협회는 2030년에 이런 문제가 더욱 커질테니, 정책적으로 나서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2019년부터 주장했습니다. 미국에 전 공정을 담당하는 생산 라인을 만들어야 하며, 여기에 연방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만약 아무런 대비도 없다면 미국의 점유율은 2010년 13%에서 2030년 10%로 줄어들고, 중국은 11%에서 24%로 늘어나며, 대만의 21%를 넘어 세계 초고가 될 거라 경고했습니다.
이런 요구에 맞춰서 조 바이든 정권은 반도체 생산 확대와 연구 개발 강화에 나섰습니다. 연방 정부는 반도체 생산과 연구 개발 지원을 위해 미국 의회에 500억 달러(55조원)의 예산을 요청했습니다. 또 인텔은 미국과 유럽의 전 공정 생산 라인을 활용해 실리콘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애리조나주에 200억 달러를 들여 전 공정 라인을 2개 세우고, 파운드리 사업을 별도의 그룹으로 분리해 운용합니다. 인텔의 이런 움직임은 미국과 유럽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에 맞춘 것입니다. 미국 정부와 미국 기업의 협력을 통해 반도체 생산 라인을 확보한다면 지금까지 동아시아에 집중됐던 분위기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