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서 발생하는 참사(물리)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케이스 깊숙한 곳 어디선가 섬광과 함께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거나, 어디까 깨지고 부러지고 휠 수도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지나 부주의 때문이라면 차라리 낫습니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고, 실수는 조심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나는 분명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고가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AM4 소켓에서 쿨러를 뽑았더니 CPU까지 같이 딸려 나오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실 CPU까지 함께 나오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CPU의 핀이 휘어버린다면? 그것도 한 두개가 아니라면? 휜게 아니라 아예 구부러졌다면? 그걸 펴는 것도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며, 제대로 펴지고 정상 작동한다는 보장은 누구도 해주지 않습니다.
AMD가 이걸 고쳐줬음 참 좋으려면, 인텔처럼 소켓을 자주 갈아치우는 못된 습관이 없다보니 최소 AM5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CPU에 충분한 열을 줘서 써멀 그리스를 녹여도(?) 여전히 뽑혀 나오고, 쿨러를 좌우로 비틀어서 빈틈을 만들어보려 해도 공간이 좁다보니 그게 어렵습니다. 그러니 유일한 대안은 점성이 낮은 써멀 그리스로 바꾸는 것 뿐이죠.
아니면 아예 점성을 빼면 됩니다. 써멀 그리스의 역할은 CPU와 쿨러 사이를 빈틈없이 매꿔주는 것이지, 진득진득하게 달라 붙는 게 아닙니다. 그 사이에서 흘러내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약간의 점성을 더하지만, 바꿔 말해서 써멀 그리스가 움직일 일이 없다면 점성을 지녀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써멀 그리스가 아닌 패드인 Thermal Grizzly Carbonaut처럼 말이죠.
제품명 | Thermal Grizzly Carbonaut |
종류 | 카본 탄소 섬유 써멀 패드 |
크기 |
AMD AM4/인텔 HEDT 20 시리즈용: 38x38mm 인텔 LGA 115x용: 32x32mm AMD TR4용: 51x68mm NVIDIA GPU용: 25x25mm NVIDIA RTX 2080 Ti용: 31x25mm |
열 전도율 | 62.5W/m.k |
두께 | 0.2mm |
사용 온도 |
-250~150도 |
기타 | 점성은 없어도 전도성은 있음 |
참고 링크 | https://www.thermal-grizzly.com/produkte/298-carbonaut |
가격 | 38x38mm가 19.95달러2019년 8월 아마존 기존) |
시작하기 전에 열전도율을 보고 넘어갑시다. 카보나우트? 카보넛? 뭐라고 읽어야할지 난감하니까 그냥 Carbonaut라고 쓸께요. 써멀 그리즐리의 다른 열전도 제품들과 비교했을 때 열전도 성능이 그리 좋진 않습니다. 이건 써멀 그리즐리가 자사 홈페이지에 올린 표니까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죠. 그런데 표기 스펙의 열 전도율은 무려 62.5W/m.k입니다.
이거 때문에 열 전도율 보는 방법부터(넓이 1제곱m인 물체에서 두께가 1m고 양쪽 온도 차가 1도일 때, 1시간 동안 통과한 열량) 다른 써멀들의 스펙을 다 뒤져봤는데요. 써멀의 대명사인 MX-4가 8.5W/mK고, 써멀 그리즐리의 고급형 제품인 Kryonaut조차 12.5W/mk입니다. 그런데 왜 Carbonaut은 열전도율이 혼자 다른 세상에 가 있는데 성능은 안 좋다고 나올까요?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하나입니다. Carbonaut 같은 얇은 천쪼가리(?)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보통의 써멀 그리스같은 진득한 액체처럼 빈틈을 촘촘하게 매꾸지 못합니다. 대신 열전도율 그 자체를 무식하게 높인다면 어떨까요? 빈틈은 생겨도 다른 써멀 그리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썩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군요.
Thermal Grizzly Carbonaut입니다. 한국에선 안 팔고 가장 만만한 곳이 미국과 일본인데, 이 시국에 일본에서 시키긴 좀 거시기할 것 같아서 가격은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만만한 미국 아마존에서 샀습니다. 배송까지 정말 오래 걸립니다. 알리 익스프레스하고 비빌 정도로요.
뒤쪽에 여러 언어로 설명이 있네요.
38x38x0.2mm 짜리로 샀습니다. 왜냐면 AM4 소켓의 CPU에 맞는 크기가 이거거든요. 신발이나 옷은 넉넉하게 큰 걸 사도 되지만 이건 안 됩니다. 전도성을 지녔기에 옆으로 삐져나온 Carbonaut가 기판에 붙기라도 하면 폭☆8.
뜯어봤습니다. 진짜 별 거 없습니다. 오른쪽의 QR 코드가 써진 종이에 중국어가 써져 있어서 기분이 나빠질 뻔 했지만 그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QR 코드는 진품/가품을 가리는 용도로 씁니다. 짝퉁의 나라 중국에선 저런 QR 코드와 설명서가 당연히 필요하겠지요. 국내에서 아직 판매하진 않는데 한국어 설명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써멀 그리즐리 홈페이지에서 정품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설마 이베이도 아니고 아마존에서 짝퉁을 보내랴,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주문했는데 실패하진 않았군요.
스티커로 꼼꼼하게 봉인한 포장을 자르니 Thermal Grizzly Carbonaut이 나왔습니다. 워낙 얇아서 더 포장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보니 좀 허탈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AMD AM4 소켓에 맞춰 38x38mm 짜리를 샀습니다. 인텔 LGA 115x 소켓의 CPU는 이보다 더 작은 32x32mm를 사야 합니다.
만져보면 정말 부드럽고 얇습니다. 예전에는 뇌가 불건전한 용액 안에 절여져 있어 이상한 걸로 오해하도록 비유했을텐데 요새는 그렇게 타자치기도 귀찮습니다. 공간을 촘촘히 매꾸려면 얇고 부드러울 필요가 있겠죠. 이렇게 만들어도 써멀 그리스 만큼의 성능이 안 나온다는 건 아쉬운 일입니다.
CPU 쿨러를 떼어냈습니다. AMD 레이스 쿨러의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시지요. 그만큼 빈 공간을 잘 채워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신 CPU 표면은 물론이고 옆에도 써멀 그리스가 들어가 있고, 더러는 소켓에 묻기도 합니다.
CPU 쿨러에도 써멀 그리스의 자국이 묻어 있습니다. 귀찮을 땐 이대로 쓰기도 하지만 정석은 닦아주고 다시 써야죠.
CPU를 깨끗하게 닦아줬습니다.
38x38mm의 Thermal Grizzly Carbonaut을 살포시 올렸습니다. 이 상태에서 바람이라도 불면 옆으로 날아갑니다. 그러니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멀리하고, 가급적 빠르게 CPU 쿨러을 얹으세요.
쿨러를 올려 놓고도 제대로 붙어 있나 옆에서 확인해 봤습니다. 애석하게도 히트파이프와 램과 방열판과 슬롯과 쿨러 지지대에 가려서 옆으로 삐져나왔는지 제 자리에 들어갔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네요.
비교용으로 쓴 써멀 그리스는 PROLIMATECH PK-Zero Nano Aluminum입니다. 아틱 쿨링의 MX-4가 워낙 유명하니 그것만큼 만만한 선택이 없겠으나, 이 써멀 그리스는 8W의 그럭저럭 쓸만한 열 전도율에 무려 30g의 대용량 포장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야 써멀 한번 발라두면 1년 후에 청소할 때나 재도포하지만, 저는 메인보드 리뷰하거나 CPU 테스트할 때마다 쿨러를 재조립하는 귀찮은 짓을 벌려야 합니다. 그래서 대용량 써멀이 필요했고, 그 중에 가장 만만한 가격과 성능을 지닌 게 이거였습니다. 단점은 뚜껑을 열기 힘들어서 펜치로 잡고 돌려야 한다는 거. 그리고 점성이 꽤 높아 CPU가 잘 뽑혀 나옵니다. 써멀을 닦아내기 귀찮다는 건 Carbonaut과 비교하면 단점인데, 이건 다른 써멀 그리스도 마찬가지네요.
테스트 환경입니다. 에어컨을 25도로 틀고, AMD 레이스 프리즘 쿨러를 장착했으며, 팬 속도는 75%로 맞췄습니다. 대충 2200rpm 중반 쯤 나오는군요. 그리고 오픈 케이스라 공기의 흐름은 별 영향을 주지 않고 다른 쿨링팬은 쓰지 않았습니다.
테스트에 사용한 부품들입니다. 여기에 윈도우 10 정도?
AMD 라이젠 7 3700X https://gigglehd.com/gg/5201526
MSI MEG X570 갓라이크 메인보드 https://gigglehd.com/gg/5201838
MSI 지포스 RTX 2070 게이밍 Z D6 8GB 트윈프로져7 https://gigglehd.com/gg/3761311
와사비망고 UHD320 Real4k HDMI 2.0 옵티컬 재은이 모니터 https://gigglehd.com/gg/323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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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시 58.4도가 나오네요. 이 때 CPU 클럭은 4.2~4.3GHz.
1시간 동안 OCCT 린팩을 실행하니 78.5도까지 올라갔습니다. CPU 클럭은 4.1GHz 정도를 유지했습니다. 부스트가 될 만큼의 온도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그런 듯 합니다.
이제 Thermal Grizzly Carbonaut입니다. 여기도 처음에는 CPU 클럭이 4.2GHz까지 올라가며, 온도는 61.3도를 찍습니다. 써멀 그리스보다는 확실히 높군요.
1시간 동안 OCCT 린팩을 실행하니 80.8도가 됐습니다. 보통의 써멀 그리스보다 2.3도가 높네요. 0.5도 차이로 이 써멀이 좋니 저 쿨러가 좋니 하는 게 이쪽 업계 분위기인데, 2.3도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Thermal Grizzly Carbonaut를 계속해서 쓸 생각입니다. 테스트 후 쿨러를 탈착했는데 CPU 표면이깨끗 그리고 깔끔했거든요. 휴지로 여기를 닦고, 손에 묻을 일도 없어 작업이 참 편합니다.
CPU 히트스프레드 위치에 맞춰서 테두리가 좀 잘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히트파이프 자국도 남았네요. Carbonaut를 재활용하려면 쿨러 표면이 거울처럼 가공된 제품을 골라야겠군요. 열전도율을 위해 두께를 줄이다보니 내구성이 썩 좋다고 말하긴 힘듭니다.
일반 써멀보다 더 비싼 돈을 주고 더 못한 성능의 써멀을 써야 하는가? 그건 CPU 쿨러를 들었더니 CPU까지 함께 뽑혀 나오는 트라우마가 얼마나 진하게 남아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AMD AM4 소켓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쿨러를 자주 탈착해야 한다면 평범한 써멀 그리스 대신 이런 제품을 시도해볼만한 이유는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써멀패드와 호환되지 않는 쿨러도 있으니 잘 알아보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인텔 초코파이 쿨러의 경우 패드 높이가 너무 낮아서 열전도가 아예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