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제품을 내돈내산하진 않으나,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하는 이 회사가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들을 많이 내놓았음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빛나는 사과 마크를 앞세운 잡스느님이 흉악한 인터넷 연결 버튼을 몰아내고 Wi-Fi를 스마트폰에 보급했다는 전설같은 소리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요. 노트북에서만 보이던 펜타그래프 방식의 키보드를 데스크탑 PC에 들고 오고, 스마트폰부터 워크스테이션까지 케이스 재질을 알루미늄으로 통일하고 나중에는 그걸로 키보드까지 만드는 시도는 애플이 가장 먼저 했던 것 같네요. 가장 먼저는 아니더라도 보급에 앞장선 건 분명하겠죠. 그 시도가 혁신적인지 뻘짓인지는 딱 잘라서 판단할 순 없지만 저는 펜타그래프 키보드와 알루미늄 케이스 모두를 좋아하기에, 좀 더 많은 회사가 애플을 따라해 비슷한 컨셉의 제품들을 더 많이 내놓길 바라고 있습니다. 왜 애플 제품을 안 사고 다른 회사가 그렇게 하길 바라냐고요? 애플은 비싸잖아요.
알루미늄이야 이제는 고급 제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됐으니 굳이 데이터베이스 서버를 낭비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장점을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접지가 잘 되서 전기가 오르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습니다만. 그러나 펜타그래프는 애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트북에나 쓰는 키보드라 취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더라고요. 기계식 키보드에서 로우 프로파일에 울트라를 붙여야 따라올 압도적으로 짧은 키 트래블 덕분에, 다른 키보보다 힘을 덜 쓰고 조금만 눌러도 입력이 되고 소음까지 적으니 저처럼 허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에게는 이것만큼 좋은 키보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키보드를 만드는 회사들이 많지가 않네요. 좀 찾아보면 펜타그래프를 취급하는 회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로지텍처럼 지가 애플인줄 알고 비싸게 팔거나, 중국산 제품에 국내 브랜드만 붙여서 펜타그래프라 부르기 싫을 정도로 키감이 형편없는 제품이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맘에 드는 제품을 구하기 힘든 펜타그래프 키보드 시장에서 쿠거의 포지션은 좀 특이합니다. 쿠거가 국내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브랜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해외에서는 게이밍 디바이스를 꾸준히 팔고 있는 곳이고, 키보드 전문 회사는 절대로 아니지만 그래도 펜타그래프 키보드에 감히 게이밍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파는 시도를 하는 용감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저도 적당한 가격에 쓸 만한 펜타그래프 키보드를 찾다가 쿠거 밴타 1세대를 사서 써 봤는데, 아주 만족스럽진 않아도 그럭저럭 쓸만은 했습니다. 리뷰를 따로 올리진 않았지만요. 그러다가 바닥에 떨어트리면서 숫자키 1이 빠져버리니 쓰기 불편해졌고, 똑같은 걸 다시 사긴 싫고 그렇다고 가격이 많이 오른 신형 버전을 사긴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던 차에 하뉴나가 생일선물로 비싼 쿠거 밴타 AX 키보드를, 그것도 밴타 시리즈 중에 가장 비싸고 남 앞에서 꺼내기 민망한 핑크로 보내는 바람에 써봤습니다.
제품명 | COUGAR VANTAR AX (Pink) |
재질 | CNC 가공 알루미늄 프레임 플라스틱 바닥/키캡 |
키 스위치 | 펜타그래프, 시저스 타입 |
인터페이스 | USB 타입 A, 길이 1.6m |
안티 고스팅 | 주요 19키 |
LED | 8가지 RGB LED, 키보드에서 속도/방향/밝기 설정 가능 |
키캡 | 반투명 키캡, 한글 각인 |
기능 | 멀티미디어, 매크로, WASD/방향키 전환, 윈도우 키 방지 |
크기 | 445x127x15mm |
참고 링크 | https://prod.danawa.com/info/?pcode=14125607 |
가격 | 70,900원(2022년 9월 다나와 최저가 기준) |
키감은 조금 무거운 편인듯 합니다. 제가 허약해서 그런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믿고 싶어서 생기는 느낌적인 느낌인지는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우나, 익숙한 펜타그래프의 키감보다는 멤브레인이나 기계식의 무게가 조금 실려 있습니다. 게이밍 키보드라는 컨셉에 맞춰서 누르는 재미를 주기 위해 이런 양념을 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느낌도 처음에만 잠깐 들 뿐이지, 계속 쓰다보면 적응하게 됩니다. 적응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말해서 사람똥은 아니고 개똥같은 키감이다 싶었으나, 계속해서 쓰다보니 나름대로 괜찮게 타이핑이 쳐집니다. 위에서 분변을 들먹거리며 폄하하긴 했지만, 펜타그래프라는 이름을 달고 파는 것 중에 이보다 훨씬 냄새가 심각한 똥같은 물건들이 많다보니 이 정도만 되도 충분히 수준급이라 보입니다. 이 키보드를 실사용 중인 마누라는 집에서 쓰던 애플 맥 키보드가 낫다고 하는데 솔직히 애플보다 좋은 물건은 없겠지요.
동시 입력 기능은 좀 쳐지는 감이 있습니다. 모든 키가 다 동시 입력이 되는 건 아니고 '주요 19키'에서만 안티 고스팅이 된다고 하는데, 주요 19키라고 해봤자 qwerasdfzxcvb와 방향키, 일부 특수키 뿐입니다. 대부분의 FPS 게임에서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키보드 전체를 활용해야 하는 게임에서는 이걸로 입력하다가 삑사리가 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펜타그래프 방식의 키보드에서 이것까지 기대하기는 쪼금 어려운건가 싶네요. 그래도 가격이나 다른 기계식 키보드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키 배열도 괜찮습니다. 이런 표준 디자인의 키보드에서 배열을 따질 일이 얼마냐 있냐고요? 은근히 나옵니다. 특수 키, 그리고 한글 키보드에만 있는 한/영 키나 한자키의 위치에서 은근히 엿을 선사하는 키보드도 있는데 이건 그렇진 않습니다. 백스페이스와 역슬래시는 그 옆에 다른 걸 넣으려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합니다. 엔터도 일본이나 유럽에서 보이는 해괴망측한 생김새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자형입니다. 왼쪽 컨트롤 키를 키보드의 가장자리에 두어 그걸 누르다가 습관적으로 다른 키를 누를 일이 없고, 알트 키 사이에는 윈도우 키와 펑션 키를 넣었습니다. 한/영과 한자키를 넣었으니 공간이 부족해질 법도 하지만, 게이밍 키보드에서는 방해만 된다고 평가받는 윈도우 키와 메뉴 키를 빼서 스페이스 바의 길이를 유지한 것도 마음에 듭니다. 가장 아랫줄에 타협 없이 모든 키를 어거지로 쑤셔넣은 키보드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한/영 키를 찾다가 짜증이 치솟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건 손가락만 내리면 바로 닿습니다.
두께는 정말 얇습니다. 하지만 팜레스트의 부재가 크게 느껴집니다. 제가 팜레스트가 딸린 내추럴 키보드에 너무 익숙해졌나 봅니다. 여기에 기계식이나 멤브레인 키보드에나 쓸법한 팜레스트를 쓰긴 무리고, 알루미늄 케이스로 두께를 이만큼 줄였으면 더 얇게 만들긴 힘들테니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니다. 알루미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소린데 금속의 느낌이 매우 분명하게 납니다. 다른 재질로 아무리 흉내내봤자 알루미늄의 그 느낌은 나지 않습니다. 플라스틱에 아무리 공들여 색을 칠해도 플라스틱이죠. 한겨울에 이 키보드를 만지면 좀 추울것 같지만 금속 부분이 피부에 직접 닿을 일은 많지 않습니다.
분해가 어렵지 않길래 뜯어봤는데 구조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기판이 있고 키 스위치가 있네요. 상판은 알루미늄이지만 바닥은 플라스틱입니다. 이건 여느 기계식 키보드에서도 많이들 쓰는 구성이니 그러려니 합니다. 어차피 힘을 가장 많이 받는 부위는 상판이니, 내구성에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뜯는 김에 키 스위치 안은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 제껴볼까 생각도 들었으나, 원래 쓰던 쿠거 밴타 키보드나 레노버 울트라나브 키보드를 비슷한 이유로 고장냈기에 이번에는 참기로 했습니다.
키보드의 RGB LED를 끄면 키캡이 좀 못생겨 보입니다. 키캡 내부의 구조가 대놓고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숨긴 것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불을 켜면 그럭저럭 어울린다. 어설프게 테두리만 비치는 것보다는 키 전체가 빛나는 게 괜찮아 보입니다. 키캡 각인은 그보다 더 실망스럽습니다. 한글과 영어 폰트가 다르다보니 둘이 따로 놀고 있네요. 이 문제는 국내에 정발하는 키보드들이 다들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키보드에 들어가는 한글 폰트 중에 예쁜 게 없어 보인단 많이죠.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괜찮은 펜타그래프 키보드긴 한데 7만원이라는게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유선을 아주 좋아하지만, 유선보다 무선 키보드가 비쌀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7만원이면 무선 펜타그래프 중에도 나름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제품을 살 수 있거든요. 똥인지 된장인지 모를 3, 4만원 자리 펜타그래프 키보드보다는 그래도 이게 낫지만, 펜타그래프와 알루미늄에 7만원 씩이나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새 기계식 게이밍 키보드가 너무 싸게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럭저럭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인 물건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키감이 무겁게 느껴진다니 제 취향이랑 맞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