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그 좋다는 기계식에 정전용량식 키보드를 일삼고 있을 때, 그저 가격 하나만 보고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다가, 노트북에 달린 펜타그래프 키보드가 참 마음에 든다는 걸 깨달은 이후론 데스크탑에서도 어떻게든 펜타그래프 키보드를 쓰려 고집했습니다. 노트북에서 펜타그래프는 흔해 빠졌어도 데스크탑에서 '품질 좋은' 펜타그래프는 그리 많지가 않은데, 기껏해야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정도.. 로지텍도 있긴 한데 이건 직접 타이핑을 해보질 못해서 뭐라 말할 수가 없네요.
펜타그래프에 적응하고 나니 이제는 다른 키보드, 그러니까 기계식이나 멤브레인처럼 '높은' 키보드들은 너무 불편해서 쓸 수가 없게 되더군요. 기계식 키보드가 어떻다고 말을 하건, 기계식 키보드가 얼마나 저렴해지건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중국에서 나름대로 슬림한 기계식 키 스위치를 컴퓨텍스에 전시했고(https://gigglehd.com/gg/1185107 ) 그 스위치를 사용한 키보드가 국내에 출시되서 충동구매해봤습니다. http://prod.danawa.com/info/?pcode=5243292&cate=1131635
결론부터 말하면 다얼유 EK820 블루투스 겸용 슬림 LED 기계식 키보드는 기계식 치고는 두께가 줄어들긴 했습니다. 지금 사용중인 기계식 키보드보다 좀 더 얇은 것을 원한다면 괜찮은 선택일지도요. 하지만 펜타그래프를 대체할 수준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기계식의 태생적인 한계를 벗어날 정도는 아니라고 해야할 듯 싶네요.
다얼유 EK820 블루투스 겸용 슬림 LED 기계식 키보드입니다. 히익 중국제라니! 하실 분은 없겠죠. 요새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 중에 중국제가 아닌 제품이 어딨다고. 블루투스 기능으로 스마트폰과 페어링해 쓰라는 의미인지 스마트폰 스탠드도 사은품으로 주지만 퀄리티는 별로... 오히려 저 토끼모양 스탠드보다는 예약판매를 신청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이름을 넣은 인쇄물이 더 감격스럽네요.
구성물은 별거 없습니다. 키보드 본체. 설명서. USB 케이블. 하지만 각각의 수준은 꽤 괜찮은 편. 설명서는 한글화도 됐고 나름 친절합니다. USB 케이블도 만져봤을 때 느낌이 나쁘지 않네요. 무엇보다 스마트폰/태블릿을 통해 충분히 보급된 마이크로 B 타입 케이블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듭니다.
카일 LP 스위치를 사용해 두께를 22.5mm로 줄였고, 키패드가 빠진 텐키리스 디자인에, 블루투스와 마이크로 5핀 유선 겸용, 민트색 LED를 장착했다는 점이 이 키보드의 특징입니다. 다른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두께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는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왼쪽은 애플의 데스크탑 키보드입니다. 펜타그래프 스위치를 사용한 전형적인 제품이죠. 가운데는 다얼유 EK820입니다. 오른쪽은 브라보텍이 유통하는 VARMILO VA87M 기계식 키보드 https://gigglehd.com/gg/508793 입니다. 기계식 키보드 중에서 특별히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편이죠.
애플 펜타그래프 키보드가 생각보다 두꺼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뒷부분의 USB 포트 부분 때문에 그런 것이지 키 자체의 높이는 상당히 낮습니다. 그리고 다얼유 EK820는 평범한 기계식 키보드에 비해 분명 높이가 낮긴 하지만 아주 파격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주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 때문에, 펜타그래프를 기대하면 실망하게 될 것이나 기계식 사용자라면 적응하기가 어렵진 않습니다.
오늘 주인공은 좀 더 자세히 봐야지요.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의 비율과 비교해보면 우선 키캡 자체가 낮습니다. 키보드 기판이 있는 몸체도 나름 얇다고 할 수 있으나, 이건 굳이 LP 타입 스위치를 쓰지 않아도 만들 순 있겠죠.
기계식 키보드를 나름 얇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카일 LP 축 덕분입니다. 국내엔 적축과 청축의 두가지 모델이 들어왔는데, 옆에서 청축 소리 듣는것도 시끄러운데 저까지 같이 딸깍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적축으로 샀습니다. 확실히 딸깍거리는 소리는 없지만 그래도 펜타그래프보다는 훨씬 소리가 큽니다. 키 스위치가 끝까지 완전히 눌리면서 나는 소리는 막을 수 없으니까요. 뭐 그렇다고 해서 설계를 잘못해서 공진음이 나온다 그런건 아니고 기계식이라 어쩔 수 없는 거.
바꿔 말하면 누르는 느낌 하나는 확실하게 납니다. 이게 참 말이 도는데.. 펜타그래프처럼 얇게 만들면 기계식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은 많이 줄어들겠죠. 그리고 이 누르는 느낌을 지키기 위해선 얇게 만드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어찌보면 기계식을 얇게 만들어봤자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하는게 맞으려나요.
ESC 키 오른쪽에는 커넥트 LED가 있습니다. 블루투스 연결 상태를 보여주는 용도입니다. F1과 F2 사이엔 고정 나사가 있네요. 나사를 이런 식으로 전부 숨겨놨기에 분해하려면 애를 좀 먹습니다.
키를 누르지 않았을 땐 3mm 정도.
누르면 1mm가 됩니다. 키 스위치가 2mm 정도 눌린다고 보면 되는데, 이게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큽니다.
스페이스 바처럼 긴 키보드들은 스테빌라이저가 들어갔습니다. 때문에 보통 키보다 눌렀을 때의 느낌이 좀 더 무거운 편인데, 키 크기에서 워낙 큰 차이가 나다보니 그 점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기계식 키보드의 장점으로 키캡 교체놀이를 꼽는 사람이라면 이 키보드를 사면 안됩니다. 독특한 디자인의 전용 키캡을 사용하기에 바꿔 끼울만한 대안이 없거든요. 기본 키캡의 품질은 쓸만한 수준은 됩니다. 키캡 표면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각인 폰트도 봐줄만하거든요. 다만 이보다 더 고급스러운 재질의 키캡이 많이 나온 상황이다보니, 높아진 눈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한게 사실.
그리고 키캡 안족을 보면 아시겠지만 강도가 썩 높아 보이진 않습니다. 두개의 플라스틱 기둥으로 키 스위치에 고정하는 구조이기에, 심심하다고 뺐다 끼웠다를 반복하다간 저게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갈아끼울 키캡도 없겠다 어지간해선 빼지 않기를 추천합니다.
키보드 표면은 검은색으로 도장한 금속 패널로 덮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름대로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키보드 모서리를 사선으로 깎아낸 가공은 별로 마음에 안 드네요. 천장의 조명이 거기에 비쳐서 눈이 부시거든요. 고급스러운 느낌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다는 점은 이해하겠지만 그냥 안 넣는 게 나았을 듯.
키보드 표면은 10만원의 정가까지는 아니어도 75000원의 할인가에는 어울릴 수준으로 마감했으나, 바닥의 플라스틱 커버는 4천원짜리 키보드에서 볼법한 재질입니다. 하지만 키보드 바닥에 누가 얼마만큼이나 관심을 가질거라고 생각하면 뭐..
높이 조절용 스탠드와 블루투스 기능 스위치.
스탠드를 쓰면 뒤쪽만 조금 더 올라갑니다.
절대로 권장하진 않지만 키보드를 분해하고 싶다면 이 사진에 나온 키캡들을 전부 떼어내면 됩니다. 그럼 키 사이의 십자 나사를 풀어내고, 분해가 됩니다.
분해 자체는 별거 아닌데 재조립할 대는 신경써야할 것이 2개 있습니다. 하나는 기판에 부착된 블루투스 스위치와, 키보드 케이스의 스위치가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둘은 내장 배터리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는 거. 양면 테이프로 붙였는데 이게 딱 맞춰서 고정된 건 아니라서요.
바닥은 별거 없고, 기판 위에 배터리가 전선으로 연결됩니다.
300mAh 3.7V의 배터리. 블루투스 키보드의 전력 사용량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걸로도 최대 40시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테스트는 안 해봤네요.
BCM20730-A1KFBG. 블루투스 모듈입니다.
이건 키보드 컨트롤러 칩이 아닐까 추측 중.
커넥트 스위치.
기판의 조립이나 마감 상태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습니다. 저가형 기계식 키보드 중에는 정말 상태 심각한 것들이 많거든요. 다만 이 키보드가 정가 10만원의 결코 저렴한 제품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 봐야 할 듯.
옆에서. 키보드 표면의 금속 패널이 스위치 지지대를 겸하는 구조입니다. 요새는 이렇게들 많이 나오죠. 옆에서 보면 LP 타입 스위치의 높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판에 납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일반 기계식보단 좀 낮긴 합니다.
그 외에 민트색 LED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과, 블루투스 키보드라면 당연한 페어링 기능 등이 있습니다. 캡스 락/스크롤 락은 해당 키의 LED가 기능 키의 사용 여부를 함께 보여주고 있네요. 저는 블루투스도 LED도 관심이 없어서 꺼두고 싶은데, 블루투스는 스위치로 끌 수 있지만 LED는 컴터 전원 꺼버리면 설정이 초기화되니.. 매번 부팅할때마다 Fn F6 눌러서 꺼두네요.
'블루투스를 지원하니 스마트폰이나 태블릿과도 함께 써라, 무게도 520g밖에 안한다.' 이런 식으로의 마케팅도 노리는 듯 하지만, 스마트폰용 키보드가 520g이면 정말 무거운 겁니다. 케이스 겸용도 아니고 그냥 키보드라면 200g만 되도 무겁단 소리 듣습니다. 거기에 접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 지지대가 달린 것도 아닌데 이걸 들고 다니면서 페어링해서 쓴다? 이건 좀 아닌것 같습니다. 항상 어디서든 기계식 아니면 키보드를 칠 수 없다! 이런 경우라면 몰라도.
정리해보죠. 한줄 요약하면 "보통 기계식보다 조금 더 낮고, 텐키레스에, 블루투스 기능을 갖춘 키보드인데 가격은 좀 있음"입니다.
1. 나는 그냥 기계식 키보드/텐키레스 기계식 키보드가 쓰고 싶다: No. 10만원이면 이거 말고도 정말 좋은 기계식 키보드 많습니다. 아니, 그냥 이거 절반 가격에 쓸만한 기계식 키보드 사세요. https://gigglehd.com/gg/1054812 요런거라던가.
2. 나는 무선 기계식 키보드가 쓰고 싶다: Yes. 의외로 블루투스 기능이 내장된 기계식 키보드가 시장에 많이 들어오지 않았네요. 무선+블루투스를 국내에서 손쉽게 구하고 싶다면 의외로 이게 편한 선택이 될지도.
3. 나는 펜타그래프 수준으로 얇은 기계식 키보드가 쓰고 싶다: No. 포기하세요. 그런 스위치가 나와야 그런 키보드를 만들던가 할텐데 아직까진 없는듯.
4. 나는 기계식 키보드의 높이가 조금만 더 낮았으면 좋겠다: Yes. '얇은 키보드'임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제품이지만, 요구하는 '높이'에 조금만 욕심을 버리면 이건 꽤 괜찮은 제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엔 일반 기계식 키보드는 손목 받침대 없이는 절대로 못쓰겠다고 궁시렁거리는데, 최소한 이 키보드의 경우엔 주간뉴스 쓰고 이 키보드 리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쓰고 있지만 손목이 불편해서 포기할 정도는 아직 아니네요. 이 글 다 쓰면 원래 쓰던 펜타그래프로 다시 바꿀 것 같지만.
5. 나는 다양한 기능을 지닌 키보드를 쓰고 싶다: No. 텐키레스라서 키의 수도 줄었고 멀티미디어 키도 달려있지 않으며, LED는 달려 있지만 단색입니다. LED 컨트롤 기능이야 요새 나오는 기계식 키보드라면 다 있지요. 이건 이것저것 다 달린 키보드를 원하는 사람에게 맞는 키보드가 아니라, 나름대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한테 맞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