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세상에는 수많은 리듬게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오투젬이나 이지 투 디제이, 그리고 최근 넥슨과의 콜라보로 화제가 되었던 디제이맥스도 유명하지요.
저는 음악을 좋아하고 리듬게임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리듬게임은 아직 마니아의 영역에 있는 탓인지 난이도를 조금만 높여도 정신없고, 난해하고, 박자나 멜로디에서 엇나간 노트들을 제시하면서 유저들을 불친절하게 맞이하는 것을 느낍니다. 리듬 게임을 '잘 하기' 위해서는 리듬 감각보다는 동체시력과 암기력이 더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지요.
디제이맥스 리스펙트 V 플레이 영상
(출처- 디시인사이드 디제이맥스 리스펙트 V 갤러리)
이러한 난이도 조절 장치들은 리듬게임을 도전의 영역에 두는 코어유저들에게는 도전욕구와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으나, 저와 같이 리듬게임을 음악을 즐기는 수단으로 여기는 라이트 유저에겐 오히려 흥미를 저하시키는 요소가 됩니다. 낮은 난이도를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난이도로 나아가기 꺼려지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엇나간 노트, 빽빽한 노트를 통해 난이도를 조절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키보드형 리듬게임이 가지는 숙명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게임의 근본적인 플레이 구조를 뒤틀지 못하는 이상 악곡의 멜로디와 메인 비트를 노트로 배치하면 너무 뻔하고 간단한 패턴이 제시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세요, 저는 디제이맥스도 아주 재미있게 했습니다. 상위 난이도 플레이가 재미가 없었을 뿐이에요)
균열
그러나 2019년, 얼음과 불의 춤이라는 원버튼 리듬게임이 크게 흥행하면서 리듬게임의 틀에 균열이 생깁니다.
얼음과 불의 춤은 하나의 버튼, 박자를 옮겨타는 맵이라는 신선한 플레이 방식으로 라이트 유저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각 월드마다 배속 조절이나 엇박, 스윙 등의 명확한 테마를 가지고 계단식 학습 구조를 제시하고, 월드의 마지막 곡에서는 뛰어난 퀄리티의 음악과 함께 지금까지 연습한 것을 적용하는 방식을 통해 리듬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큰 도전의식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과 불의 춤 1월드 마지막 스테이지 플레이 영상
1월드의 앞단계에서 배웠던 빠른 엇박과 느린 엇박 장치가 잘 활용되었다
(출처- 게임조선, 박성일 기자)
목표가 제시되지 않고 지루한 반복 플레이를 요구하는 디제이맥스류 게임과 다르게 RPG의 구조를 본따 만든 얼불춤의 계단식 설계는 지속적인 플레이와 몰입을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맥류 게임의 하드모드 도전과는 다르게 충분한 연습을 통해 익힌 패턴이 바로 활용되고, 멜로디와 비트에 잘 맞는 노트가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플레이어들이 실패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고, 도전의 동기를 수월하게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혁명
그리고 2021년 2월. 얼음과 불의 춤 제작사의 신작인 리듬 닥터가 출시되었습니다.
아직은 앞서 해보기 단계인지라, 볼륨에 비해 비싸게 느껴지는 가격 때문에 저는 구매를 망설이고 있었고, 2022년 4월. 출시 1년 2개월이 넘은 시점에서 생일선물로 리듬 닥터를 선물받아 처음으로 플레이 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Steam 정가 16,500원이다
트레일러부터 비트를 좀 친다.
(출처- 7th Beat Games 공식 계정)
게임 소개는 매우 간단합니다. 7번째 박자마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면 되지요(실제로는 아무 키나 눌러도 됩니다).
하지만 얼불춤의 개발사 아니랄까봐, 단순한 인간 메트로놈 식의 패턴은 첫 스테이지에서 이미 끝납니다. 이후 각 스테이지마다 박자를 제시하는 새로운 방법을 간단한 튜토리얼로 연습시키고, 바로 새로운 방법이 적용된 곡을 플레이하게 됩니다.
얼불춤과 다르게 리듬닥터는 연습 스테이지 없이 매 스테이지가 새로운 곡을 플레이하는 실전 스테이지이고, 챕터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박자와 연주법이 추가되어 현재까지 공개된 분량(4챕터)에서는 크게 보면 7박자에 누르기, 2박자에 누르기, 7박자에 눌렀다 떼기(홀드)의 세 가지 연주법과 그 변주들이 존재합니다.
글쓴이가 좋아하는 X-WOT 스테이지. 세 가지 연주법과 다양한 변주가 모두 담겨있다.
어려워 보이겠지만 실제로 어려운 곡이 맞다.
하지만 정식 스테이지를 모두 마치고 플레이하는 콜라보레이션 스테이지에 포함된 곡이고, 플레이어가 준비되기 전에는 시키지 않으니 게임 난이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자!
(출처- OneHo님의 유튜브 채널)
독특하고 재미있는 연주법은 리듬 닥터의 재미를 만드는 핵심적인 특징이지만, 제가 리듬 닥터를 플레이하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다름아닌 연출에 있습니다.
노트의 모양을 볼 필요 없는 원버튼 게임, 그리고 맵의 모양도 볼 필요 없는 박자 신호 기반 게임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리듬 닥터는 게임 화면을 노트의 제시 수단이 아니라 연출의 무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시로 든 게임들의 플레이 화면. 리듬 닥터는 눈을 가리고도 할 수 있다)
게이머에게 과제를 내는 화면과, 연출을 보여주는 BGA를 분리해놓은 전통적 리듬게임을 넘어 과제와 연출을 동시에 보여주는 얼불춤이 등장했고, 얼불춤의 한계를 넘어 화면으로는 연출을, 소리로는 과제를 제시하는 새로운 경지의 리듬 게임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거기에 더해 각 스테이지와 배경설명에 등장하는 스토리는 게임과 곡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리듬게임과 스토리의 결합이 특징적이였던 Just Shapes & Beats의 장점을 훌륭하게 흡수하여 게임의 연출과 좋은 시너지를 냈습니다.
리듬 닥터의 연출 기법과 박자 제시, 스토리텔링은 스테이지를 거듭하며 풍부해지고, 2-X 스테이지를 맞이하여 절정에 다다릅니다.
주의: 스포일러
영상과 실제 플레이 경험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직접 플레이를 통해 경험해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영상을 보지 않으신다면, 음악만이라도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All The Times-fizzd
(출처- BluPen님의 유튜브 채널)
저는 2-X 스테이지를 처음 플레이하고서 최근 몇년간 느껴본 적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이 게임은 게임사에 큰 획을 그을 걸작이라는 것을.
저에게 엘든 링이나 몬스터헌터는 재미있는 게임이였고, 리듬 닥터는 감동적인 게임이였습니다.
도전과 재미를 주는 게임은 많았지만, 감탄과 감동을 주는 게임은 흔치 않습니다.
드럼 엔 베이스 음악을 즐기신다면, 박자를 좀 타실 줄 안다면, 그리고 리듬게임의 재발명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런 당신에게 리듬 닥터를 추천합니다.
요약
장점
직관적이고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플레이 방식
뛰어난 자체제작 수록곡들
장르를 혁신한 연출
훌륭한 한글화
게임의 맛을 잘 살려주는 역동적이고 깔끔한 도트풍 그래픽
도전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스텀 맵 제작과 공유 기능
로컬 2P 플레이 가능
DRM-Free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itch.io에서도 판매중
단점
'보통' 모드에서의 판정이 예민해서 헤드셋과 스피커를 오갈 때 보정을 다시 해줘야 함
지금까지 개발된 스테이지 중에는 2-X 스테이지와 비견될만한 스테이지가 없음
'앞서 해보기' 단계라 볼륨이 크지 않음 (총 4스테이지+콜라보 및 엑스트라 곡)
수록곡들을 출퇴근길에 듣고싶어도 음원 사이트에 등록되어 있지 않음
이 게임을 이제서야 만나다니 인생 절반 손해봄
한줄평: 리듬게임의 틀을 뛰어넘은 예술작품. Great God Game Of The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