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잘못을 했다면 반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과나 시말서 정도로 넘어가면 참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죠. 합의금이 필요하게 될 때도 있고, 무료 법원 투어가 제공되는 경우도 있겠죠. 그럼 잘못된 물건을 만든 기업은 어떻게 반성해야 할까요. 치명적인 문제라면 리콜로 잘못을 인정하거나, 몰래 리비전이라는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온갖 문제가 터져나왔던 2016년에 발표한 맥북 프로에 대해서 애플은 어떻게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딱히 안 했죠. ‘극소수의 기기에서™’ 문제 생겼을 때만 수리로 때우고 말았지.
그런데 2021년, 그 잘난 애플이 돌연 맥북 프로 14인치라는 반성문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맥북 프로 2016를 애용했습니다. 인내심을 기르면 쓸만하기도 했고 터치바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요. 듀얼코어 CPU에 내장 그래픽이니 출시 당시에도 특출난 성능의 물건은 아니긴 했습니다마는, 역시 슬슬 연식은 못 이기죠. 게다가 이게 바로 디스플레이가 돌연사하는 문제, 디스플레이 코팅이 벗겨지는 문제, 키보드가 죽는 문제, 배터리가 부푸는 문제가 전부 해당하는 바로 그 환장과 기적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가을,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맥북 프로 14인치를 보고 주문을 넣었지요. 저는 멀티코어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아서 CPU 8코어와 GPU 14코어 M1 Pro를 선택했습니다.
우선 변경점.
1. 가격이 올랐습니다.
가성비가 창렬 중 가장 창렬하던 상위 트림 맥북 프로 13인치를 대체하면서 그 높던 가격에서 20만원이 더 올랐습니다. 세상에.
2. 하드웨어가 바뀌었습니다.
디스플레이로 Mini LED가 맥에도 들어왔고, 다양한 포트들이 귀환, 게다가 터치바가 삭제되었습니다.
동시에 13인치에서 14인치로 커지면서 300g 정도 무거워졌고, 곡면에서 평평한 판때기로 바뀌면서 손으로 잡았을 때 훨씬 두껍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게 말이 좋아 14인치지, 16:9 노트북 LG 그램 15인치랑 세로가 똑같아요. 그래서인지 맥북 프로 13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는 느낌도...
3. ARM.
CPU가 인텔에서 ARM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성비는 확실히 좋아졌습니다. 화면을 여는 순간 뜨끈해지기 시작하던 그 전기장판은 이제 없습니다. 풀로드시에도 (팬 안 돌리기로 유명한 애플 노트북 치고는) 덜 뜨겁습니다. 싱글코어에서 10W 근처, 멀티에서는 30W 근처인 CPU가 인텔 12세대랑 그럭저럭 경쟁이 가능하니 말 다했죠. 성능 벤치는 저보다 전문적인 매체가 많으니 그 쪽을 참고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 사용에서 노트북에서 이 정도의 성능과 이 정도의 전력 소모면 좋은 균형이지 않나 싶네요. 맥북 프로 13인치 2020 (인텔 10세대)은 불타서 반품했었거든요.
상세.
1. 디스플레이
디스플레이는 참 좋습니다. 원래도 맥북 프로 디스플레이는 좋았죠. 아이패드 프로를 흘겨보면서 침 흘리던 HDR도 120Hz도 드디어 맥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괜히 시비를 걸자면 SDR 컨텐츠는 500니트가 최대라 아이폰/패드처럼 일반 화면을 더 밝게 볼 수는 없다는 점?
그래도 10/10 디스플레이.
(좌 맥북 프로 14, 우 아이패드 프로 12.9)
대신 블루밍이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에 비해서는 확실히 적어 보입니다. 애플에서 백라이트나 LCD가 달라졌다는 말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이패드에 있던 두꺼운 유리가 사라지면서 빛번짐이 덜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이렇다 할 과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 아쉽게도 ARM에서 DisplayCal 플러그인이 바로 작동 안 하기도 하고, 아직 미니 LED는 제대로 측정을 못 한다는 얘기도 있어서 이 글에서 디스플레이 캘리 등은 다루지 못할 듯 합니다.
2. 노치.
디스플레이 얘기라면 그걸 파먹은 노치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죠.
노치가 있나요? 네.
사용 중에 노치가 잘 보이나요? 애매하게 아니오.
노치가 안 거슬리게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어 놨나요? 전혀요.
1) 노치 때문에 메뉴바 아이콘이 공간이 없어서 생략되는데, 생략된 아이콘이 있다는 표시나 스크롤 같은 기능이 없습니다.
2) 자동으로 베젤을 늘려버려서 노치를 없앤다는 해괴한 짓을 옵션이랍시고 줬는데, 이게 일부 프로그램이랑 꼬이면서 재시작 전까지 안 풀리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3) 노치가 있는지를 모르는 프로그램에서는...
극소수의 프로그램은 통째로 14.2인치 화면을 쓰면서 노치에 정보가 가려집니다.
한줄요약: 노치는 멍청하고, 노치 처리는 더 멍청합니다.
2-1. 웹캠?
그럼, 화면 파먹으면서까지 들어간 웹캠이라도 좋으면 말이 되겠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아이패드처럼 센터 스테이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 밝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특출난 것 없는 평범한 노트북 웹캠 정도... 아무리 봐줘도 저 큰 노치를 정당화할 웹캠은 아니네요.
3. 배터리
배터리는 좋아요. 당연히 예전 인텔 맥북 프로보다 오래 가는데, ARM이라고 하면 두 배쯤 갈 줄 아는 경우도 많죠. 맥북 프로 13인치 M1이 실제로 그랬으니까요.
근데 14인치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성능 생각하면 그래도 좋은 배터리 아닌가 싶다가도, 또 경쟁하는 x86 노트북들이 1년 사이에 많이 따라오고 있지요. 가벼운 문서 작업에서는 인텔 맥북 프로의 1.3~1.5배 정도 느낌, 줌이나 포토샵처럼 약간씩 로드가 걸리기 시작하면 인텔의 1.5배~ 정도의 느낌? 대신 위의 사진처럼 디스플레이 밝기가 60~70%를 넘어가는 순간 화면 패널도 따뜻해지고, 배터리가 뚝뚝 떨어지는 점은 살짝 아쉽네요. 아이패드 프로 12.9도 그런 걸 보니 미니 LED 종특인가 봅니다.
4. 게임.
맥북 게이밍은 두괄식으로 적자면 할 물건이 아닙니다.
문명 5는 턴당 타임과 프레임 모두 할 만은 하지만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노치에 가려져서 특정 해상도가 강제됩니다.
데이어스 엑스 맨카인드 디바이디드는 중하옵에서도 30프레임 아래.
스타크래프트 2는 중옵에서 70~90프레임을 유지하는 수준이고 상옵부터는 갑자기 프레임이 반토막 + 프레임 타임이 매우 불안정. GPU 코어가 절반인 일반 M1하고 거의 차이가 없는 셈인데, 똑같은 증상인 CS:GO처럼 로제타 문제가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프로스트펑크는 뭘 건드려 봐도 600명 도시에서 30프레임 유지 불가.
따라서 애플 아케이드나 성능이 중요하지 않은 게임이면 모를까, 로제타로 돌아가는 (대부분의!) 3D 게임은 크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쪽이 좋아 보입니다. 페럴렐즈나 크로스오버를 쓰면 할만한 게임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저는 데스크탑을 켜렵니다...
6. 그 외 잡다한 것들.
키보드는 취향의 영역이고, 키감에 정답은 없습니다. 근데 오답은 있어요. 버터플라이 키보드라고.
역시 가위식으로 돌아온 팬터그래프의 키감은 훌륭합니다. 키 옆까지 검정색으로 칠한 건 개별 키 구별이 잘 안 되게 만들기는 하네요.
트랙패드는 언제나 좋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맥북 프로 13인치보다 트랙패드가 살짝 작아졌는데 팜 리젝션 오류가 확 줄어서 만족. 폴링 레이트도 2배로 늘어서 120Hz 디스플레이에서 쓰기가 쫀득하고 참 좋습니다.
스피커는 음질보다도 공간감이 확 좋아진 느낌입니다. 원래도 애플이 잘 하는 분야지요.
포트의 귀환은 당연히 환영합니다. 아이패드 때문에 충전은 USB-C만 쓰지만, 역시 가끔 사진 찍으면 SD 카드 리더기는 유용합니다.
7. 소프트웨어
ARM 이주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의외로?) 많은 프로그램들이 맥에서 ARM+x86를 동시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텔 맥에서 쓰던 여러 시스템 확장 프로그램이 막히거나, 업데이트가 끊기면서 ARM 빌드가 없는 프로그램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앱들도 작동 자체는 로제타 2로 돌아갑니다만 핵심 기능이 막혀서 의미가 없는 경우(eg. RDM, Flour)도 있고, 이 문제를 제하더라도 x86 프로그램은 전부 P 코어에서만 돌아가요. 이 정도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버그 하나도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상태까지는 아닌 듯 합니다. 게다가 iOS 앱이 돌아간다는 점을 홍보한 것 치고 정작 쓸만한 앱들은 이미 맥 앱스토어에서 이미 내려간 경우가 많아서 의미가 반쪽. 인스타그램이나 99%의 게임 앱들이 그런 상태고, 제가 쓰는 iOS 앱 중에 맥에서 설치가능 + 쓸만한 상태인 앱은 스타벅스랑 에어비엔비밖에 없었네요.
8. 성능?
일부러 성능 얘기를 적당히 피해 왔는데 마지막까지 그럴 수는 없죠. 원래도 맥북이 그랬듯이, 가격을 생각하면 그렇게 순수 성능이 좋은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싱글 코어 성능은 M1이랑 동일하니까 굉장하고 멀티코어도 상당하지만, 그래픽 성능은 최적화 여부나 워크로드에 따라서 편차가 상당합니다. 대신 미디어 엔진을 쓰는 ProRes 코덱을 쓰면 날아다닌다고 하니, 언제나처럼 맥을 파컷이나 로직 때문에 쓰시는 분들은 만족도가 높으실 것 같네요. 이런 특정한 프로그램에 특화된 성능이 필요하신 분에게 M1 Pro의 성능은 정말 좋은 편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이라고 해도 전성비에서 x86보다는 확실히 앞서 있는 점에서 가산점이 있으리라 봅니다.
마지막으로.
윈도우나 리눅스, 순수한 GPU 연산성능, 아니면 게이밍 용도를 찾으신다면 그 언제보다도 맥북은 별로인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맥북을 써야 하는 분에게도 가격이 발목을 잡습니다. 언제나 디자인 바뀐 맥북 1세대는 완전히 벗겨 먹는 가격책정으로 유명하고, 이번에도 비싸요. 정말.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지금” 좋은 맥북이 필요하시다면, 이게 그 물건이에요. 2016~2020 사이에 나왔던 맥북 (프로)들은 전부 어느 것 하나는 아쉬운 점이 있었고, 그 경험이 매일 쌓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맥북을 써야 하나?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작업에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치명적으로 기분을 잡치는 요소요.
그런데 이번 맥북 프로 14인치는 도구로서 시키는 일 충실하게 하면서 기분 나쁜 점이 없어요. 둥글둥글하게 모든 면에서 전부 평균 이상이라 쓰면서 기분 나쁘지 않고, 하나의 패키지로서 완성도가 정말 높습니다. 키보드, 배터리, 디스플레이, 포트, 발열 모두 좋고, ARM 전환 1.5세대 격임에도 x86하고 경쟁이 가능한 성능에, 위에서 온갖 혹평을 했지만 하여튼 99%의 프로그램을 실행시켜주는 로제타 2까지.
특히 2등 시민 취급하면서 내장그래픽이나 달아놓고 250만원을 받던 "소형 맥북 프로"에서 이 정도의 성능이 나온다는 점은 감격스러울 정도입니다. 가격이 올랐지만 구 맥북 프로 13인치보다 오히려 가성비가 나아요! 그래서인지 저한테 이번 맥북 프로 14인치는 2013년 맥북 프로나 서피스 북만큼 만족도가 높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애플은 2016년부터 두께에 집착하다가 모든 노트북이 불탔던 것, 키보드가 폐급이었던 것, 프로라면서 포트를 포기한 것, 희대의 기믹 터치바 등등 반성해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들을 5년 가까이 방치한 꼴을 보고 맥을 떠날까? 라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애플은 놀랍게도 이 잘못들을 시인하고, 완전히 바뀐 맥북 프로 14인치라는 반성문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이 반성문, 정말 잘 썼어요. 이번에는 용서해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