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역에서 착발하여 평창과 만종, 원주역을 거쳐 서울역까지 1시간 40분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주파하는 경강선 KTX는, 2018년 동계 올림픽이 강원도에 남겨준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속도가 빠르고 많은 양의 열차를 투입할 수 있는 KTX는 그 특성 덕에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태양신에게 소원을 빌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인생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도시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서울에서 온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비싼 가격에 중간 품질의 음식을 판매하는 강릉 식당가의 매출 역시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초대박이 난 노선이죠. 인기가 워낙 좋아서인지 일부 편성은 동해역 구간까지 연장되어, 동해 시민들도 잘 이용하고 있는듯.
이에 따라 기존의 일반열차 노선은 수익성이 떨어지게 되었죠. 여전히 국내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대한민국의 준 라스베이거스이자 강원도 내 특정 지역의 유일한 밥줄에 돈을 꼬라박으러 가는 몇몇 도박쟁이들 및 태백 및 원주 등의 지역에서 저렴한 가격에 서울로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간 수요를 어느 정도 만들어 주고 있기에 완전히 망해버린 노선은 아니지만, 끝에서 끝까지 탈 이유는 확실히 줄었습니다. 태백역에서 동해역까지는 타는 사람을 뭐 거의 본 적이 없네요. 당연히 강릉-청량리 무궁화호는 동해-청량리로 축소되었으나, 그렇다고 동해 사람들이 서울을 가기 위해 이 무궁화호 열차를 타지는 않습니다. 뭐 고속도로가 잘 뚫린 요새는 태백시민들도 잘 안탄다고 하니... 4량 구성의 열차인데다가 하루 운행하는 편성이 많지 않은데도 매진이 잘 안 뜨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대체 강릉에서 서울을 가는데 있어 왜 굳이 셔틀열차 운임까지 따로 내서 타고 동해까지 가서 무궁화호로 환승해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까지 가야만 했느냐? 라는 건데요. KTX도 할인 잘받으면 정말 싸게 갈 수 있고 KTX가 싫다면 우등 고속버스를 타고 가도 1.7만원에 두시간 반 컷이지만, 뭐 똥도 찍어 먹어봐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앞으로 무궁화호는 감차에 감차를 반복하다 결국에는 폐지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니까, 내가 죽든 무궁화호가 죽든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다가 영영 사라지기 전에 한 번쯤은 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설령 부정적인 경험이더라도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믿기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닌게, 동해에서 착발하는 KTX를 타면 약 3만원의 운임으로 좁긴 해도 나름대로 쾌적한 환경에서 두 시간 정도만 앉아 있으면 서울역까지 갈 수 있으나, 무궁화호를 타면 약 1.9만원의 운임에 4시간 40분을 답답하고 냄새나는 쌍팔년도 열차 안에서 기다려야 하죠. 절반의 시간에 훨씬 쾌적한 환경을 제공받는다면, 운임 1만 원 정도 차이는 충분히 납득 가능합니다. 아니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던지. 러시아워만 피하면 버스 역시 고속열차급은 아니더라도 적당한 운임에 그럭저럭 빠르게 도착할 수 있으며, 차가 막히는 시간대라도 넉넉하게 잡아 3시간 반이면 갑니다. 뭐가 어떻게 되던간에 무궁화호보다는 빠를걸요. 명절 대이동 시즌만 아니라면. 명절이나 새해 ktx와 버스표가 전부 매진됬고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부를 돈 그리고 깡이 없다면, 최후의 선택으로 고려해볼 만한, 그런 열차입니다.
객차가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철도 오다구가 아니라 그런쪽은 관심 없구요, 모니터가 달린 차량과 에어컨이 달린 차량으로 구별되기는 하네요. 슈퍼임포즈 방식으로 영상 위에 자막을 덮어씌워서 출력하는 모니터가 있습니다. 컴퓨터로 틀어주는 배경 영상을 슈퍼임포즈 기기 내부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수신하는지 아날로그 특유의 비디오 노이즈가 포함되어 있구요, 슈퍼임포즈로 뜨는 글자는 글씨체가 전반적으로 비슷합니다. 열차의 연식이 연식이라 그런지 PC 기반의 최신식 영상 재생 시스템을 탑재할 수는 없었고, 예전에 쓰던 슈퍼임포즈 기기에 대충 PC를 물리는 방식으로 해결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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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뭐 어떻게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아무튼 열차 실내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레트로의 풍채가 있습니다. 뭐 사실 좋게 말해야 레트로고, 사실은 그냥 세월의 흔적이죠. 수명이 다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는 부품은 무궁화호 열차용 새 부품을 발주하기보다는 싸제 및 대충 맞는 호환 부품으로 대충 땜빵하기를 반복하여 어떻게든 굴리고 있습니다. 문열림 버튼부터 모니터와 에어컨까지, 오래된 분위기의 열차에서 쓸데없이 최신 분위기의 부품이 간간히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 그나마 와이파이 라우터는 달려있지만,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부분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최신식 열차보다 더 나은 점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레그룸인데요, 상당히 넓어서 매우 편합니다. 시트의 품질 역시 80-90년대 생산된 열차 치고는 나쁘지 않았고, 뒷자리와 앞자리에는 220V 교류 콘센트가 있어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습니다. 정말 아쉬운 점이라면 간이 책상이 없다는 점 정도가 되겠습니다.
차내 PA 시스템을 제어하는 곳이 여기인 듯 싶습니다. 차내 방송이 잘 들리는 편은 아닙니다.
온갖 깡촌이란 깡촌은 다 경유하며 역 비스무리한 건물만 있어도 풀브레이크부터 걸고 보는 최하위 등급 열차 안에서 저 멀리 아름답게 펼쳐진 강원도 산골의 풍경 너머로 내일을 기약하며 붉게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서울로 향하는 일은, KTX '따위' 나 고속버스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감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효율성이 높다는 주장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 대신 감성이라는 오직 무궁화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요소와 등가교환했기에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싶네요.
동해역에서 착발하는 경강선 KTX가 평균적으로 6개 정도의 역을 경유하고, 강릉발 KTX는 이번에 직통열차가 생긴다고 하는 마당인데 무궁화호 열차는 15개의 역을 경유하며, 그 역 중 일부는 일생에서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청량리나 동해라는 지명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지명이지만, 사북읍과 같은 곳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죠. 고속선이 아닌 일반열차 노선을 경유하며, 영동선으로부터 시작하여 태백선과 중앙선을 경유합니다. 선형이 불량한 태백선 상에서 열차의 평균속도는 크게 감소하며, 태백선이 충청북도 제천시까지 연결되어 있기에 강원도 착발 열차가 충청도까지 경유하는 상황이 됩니다. 지도를 보면 생각보다 당연한 일임을 깨닫게 될 수 있지만, 그냥 말로만 들으면.. 얼마나 빙빙 돌아야 충청도까지 들르냐 하는 의견부터 나오는 게 일반적이죠. 제천역 이후부터는 중앙선에 합류하면서 열차의 평균속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중앙선을 경유하기에, 청량리에 도착하기 전에 양평역에 정차합니다.
태백선을 달리는 동안, 열차는 속도를 내지 않습니다. 평균 60km/h 정도이며, 열차 스펙 이전에 선로의 한계로 인해 속도를 뽑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요. 그야 당연한 것이, 태백시 및 주변의 역은 해발 고도가 약 1000미터 이상이고 각종 산지란 산지는 최대한 피해서 가느라 경사가 쎄고 커브가 많아 쏠래야 쏠수가 없는 환경입니다.
그나마 제천역을 지나 중앙선에서 분기하는 구간 이후로는 빠르게 달리는 편인데요. 원주 지방에서 서울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최고속도가 150km/h 정도, 평균 90km/h를 살짝 넘습니다. 아마 한시간 반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면 나름대로 크게 나쁘지는 않네요.
디젤 기관차로 견인하지만, 디젤의 소음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선로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열차 내부 공조 장치의 소음에 묻힌건지, 디젤 기관차가 정말 조용해서 그런건지. 전시상황에서 전깃줄 없이 운행할 수 있는 열차가 필요하기에 디젤 기관차가 영원히 퇴역하는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여객열차에서 디젤 기관차를 볼 일은 무궁화호를 제외하면 이제는 뭐 전혀 없겠죠.
또 탈거냐? 묻는다면 무조건 YES. 사실 또 타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시간이 안 맞아줘서 못 타고 있습니다. 운행 시간이 상당히 길고 하루에 운행하는 편성수도 많지 않아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죠. 그러나 머지 않은 미래에 전 구간이 고속열차화 되거나 최소한 기존의 썩어터진 무궁화호 기차가 비슷한 등급의 신형 열차로 교체된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두 번 다시 기차 여행만의 감성을 느낄 수는 없겠지요. 탈 수 있을때 실컷 타고 싶습니다.
강릉에서 서울가던 기차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