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객차형 광역 급행 열차가 될 무궁화호의 전량 퇴역은 다가올 2027년입니다. 정확히는 마지막 도입분이 2003년이니 내구연한 25년 후인 2028년에 말소되지만, 2000~2003년 도입분이 전부 새마을호 등급으로 개조된다면 그 직전 도입분이 1999년이니 2024년에 내구연한이 도래해 폐지될 예정입니다.
코레일은 기형적인 수입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자회사로 분리된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존속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국토부의 지시로 건설한 경부고속선의 빚을 철도공단이 떠안고, 철도공사는 철도공단에게 일정 선로 사용료를 지불하여 철도공단의 막대한 빚을 청산하는 일련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경부고속선의 선로사용료는 매출액에 연동되어 KTX로 수입을 얼마를 벌든, 고정 비율로 선로사용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는 철도공사뿐만 아니라, SR 역시 동일한 상황입니다. 철도 동호회 측에서는 ‘실패한 신자유주의 영국형 모델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라며 오송역 분기 못지 않게 후려치는 부분입니다만, 뭐 국토부도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겠지요. 그래도 나라 빚을 공사나 공단에 떠넘기고 꼬리자르기를 하는 걸 보면 기분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런 기형적인 한국의 철도 환경 덕택에 코레일은 KTX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의 일정량을 선로사용료로 지불해야 하고, 따라서 실질적인 순이익 산출은 불가능합니다. 이 배경을 알고 있어야만,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어째서 코레일이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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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수익 연동 선로사용료 지불로 코레일의 추가적인 현금 확보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날히 오르는 유가 때문에 열차를 굴릴수록 적자가 나는 벽지의 지방 철도선은 매우 저렴한 무궁화호의 최저운임 2600원으로는 도저히 충당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KTX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메꿀 수 없는 시스템인 것이지요. 이 부분이 운영 주체가 선로도 보유해서 선로사용료 등의 추가 지출이 없는 일본의 철도 환경과 가장 대비되는 점입니다.
유가가 너무 치솟는다면 한가지 저렴한 대안이 있습니다. 전기 열차를 굴리면 되지요. 경북선처럼 처참한 수요를 보이는 벽지나 서부경전선처럼 굴려도 돈이 안되는 애매한 노선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기존선은 현재 전철화 작업이 진행중이거나 예비타당성조사 단계를 넘어서 사업이 확정된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무궁화호가 전량 퇴역하는 시점 이후에는 대부분 철도 노선은 전철화가 완료되어 있을 겁니다. 사실 국가 예산이 부족해 준공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라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2020년 현재 시점에서는 그래도 꽤 미래가 보이는 수준입니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포스트 무궁화호 폐지 시대는 셔틀화 시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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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선 셔틀이나 광명셔틀 같은 건 들어보셨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려는 셔틀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물건들이지만, 근본적으로 셔틀은 비교적 짧은 거리를 왕복해서 적은 열차로 좁은 구역을 압축해서 운행하는 물건입니다. 간단히 말해, 전남권·전북권·경남권·경북권·충청권·강원권 등 특정 지역만 운행하는 일종의 광역 전철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좀 더 적은 열차로 좀 더 잦은 배차 간격을 제공하여 중·단거리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광역 셔틀을 도입해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잠재적인 철도 수요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 또한 셔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궁화호로 예시를 들면 1998년 기준 1인당 평균여행거리(인킬로/인원)는 178.2km 정도, 정기 외 이용객으로 계산하면 180km로 평균적으로 서울~대전 정도의 거리를 이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2018년 기준 95.9km, 정기 외 이용객으로 한정하더라도 101.1km로,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를 이용하는 수준으로 거의 60% 정도까지 압축되었습니다. 이는 두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만큼 단거리 통근 이용이 활성화되어서 사실상 좌석형 급행전철 수준의 이용이 크게 늘었음을, 다른 하나는 KTX를 이용하기 위해 지선 내지는 구간 이용이 주류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어쩌면 최근 여러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광역전철 사업이 무궁화호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부선 경산 이남 구간, 호남선 정읍 이남 구간, 전라선 전주 이남 구간, 장항선, 충북선, 경북선, 태백선, 영동선, 경전선 진주 이서 구간, 중앙선 남원주 이남 구간같이 지자체에서 계획이 없거나 수요가 불분명한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계획안을 추진중입니다.
다만 이 부분이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갑자기 무궁화호가 사라진다면 이는 큰 타격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특히 일부 지역은 벽지산간으로 단순히 교통수단 하나가 없어진 수준이 아니라,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발이 되어줄 교통수단 자체가 부재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구간의 무궁화호 폐지는 충분한 고려 이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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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호의 적자율은 단순히 연료비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차의 유지보수나 운용, 그에 따른 부대비용(직무교육이나 인건비 등) 또한 무시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용을 KTX 수익으로 충당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2600원이라는 기본 요금은 가혹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코레일은 적극적으로 무궁화호 등급 폐지를 시도했고, 요금 인상의 일환으로 ITX-새마을이 무궁화호를 온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소문은 철도 동호회에서 암암리에 떠도는 기정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동차 형태로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지역간 셔틀이 될지, 전철 형태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실질적으로는 재정 부담 때문에 동해선과 같이 코레일에 위탁 운영하겠지만) 광역 전철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궁화호의 폐지는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며, 다가오는 포스트 무궁화호 폐지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지에 대한 대답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대신 말할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