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지 《네이쳐 바이오테크놀로지》 최신호에 신기한 논문이 실려 소개합니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Zurich)의 로베르트 그라스(Robert Grass) 교수 연구팀과 이스라엘의 과학자 야니브 에를리치(Yaniv Erlich) 박사는 공동 연구를 통해 3D 프린터로 출력한 물체에 DNA로 정보를 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사물 DNA(DNA-of-things)라고 부르는군요.
이들은 “스탠포드 버니”라고 불리는 유명한 3D 모델의 STL 파일을 해상도를 낮춰 파일 크기를 100kB로 맞추고 다시 gzip으로 압축하여 데이터 용량을 44.42kB까지 줄였습니다. 이 데이터를 12,000개의 DNA에 담고, 그 DNA들을 약 160nm 크기의 수많은 유리구슬에 나눠 담은 다음 이 유리구슬을 3D 프린터용 필라멘트 재료에 섞었습니다. 이 필라멘트로 3.2g 무게의 스탠포드 버니를 출력한 다음, 그 출력물을 0.01g 정도 떼어낸 것에서 DNA를 추출하여 그 정보로 다시 스탠포드 버니를 출력했습니다. 실험 결과 이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DNA 정보의 오류율이 올라가긴 했지만, 최종 추출된 STL 파일의 SHA256 해시값은 변하지 않아 오류 정정이 완벽한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해당 실험 조건에서는 DNA가 80% 날아가도 원래 정보를 복구할 수 있다네요.
또다른 시연으로는 화질을 낮춰 1.35MB 용량으로 줄인 2분 20초짜리 YouTube 동영상을 30만개의 DNA에 담아 같은 방식으로 안경 렌즈를 만드는 플라스틱에 집어넣어 안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안경 렌즈의 투명도에 영향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는군요. 해당 조건에서도 추출된 데이터의 해시값에 문제가 없었고, DNA가 원래의 4분의 1만 남아 있어도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복구 가능성을 낮추면 더 적은 DNA에 더 많은 데이터를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에다가 그 사물에 대한 정보를 삽입할 경우, 사물의 아주 작은 조각만으로도 그 사물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치 생물의 세포 하나만으로도 그 생물의 모든 DNA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다만, 현재로서는 이런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사물에 집어넣는 DNA는 소량이어도 충분하기 때문에 일단 DNA를 만들고 나면 집어넣는 데는 비용이 적게 들겠지만, 그걸 추출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 같습니다.
신기해서 좀 더 찾아봤는데, 로베르트 그라스 교수는 예전부터 DNA를 이용해서 정보를 저장하는 것에 대한 연구를 하던 과학자인 모양입니다. 특히 DNA를 장기 보관하기 위해 작은 유리구슬에 담는 방법과 그 응용법을 최소 4~5년 전부터 연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야니브 에를리치 박사는 개인의 DNA를 분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명 업체인 마이헤리티지(MyHeritage)의 수석 과학자로, 2017년에 DNA에 디지털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인코딩 방법인 ‘DNA Fountain’을 발표했었습니다. 당연히 이번 연구에서 DNA에 디지털 데이터를 담을 때도 이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