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CPU 시장의 화제는 단연 라이젠 5000 시리즈입니다. 발표 전에는 분명 가격이 비싸다, AMD가 주장하는 성능은 못 믿겠다는 의견들이 많았는데요. 정식 출시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라이젠 5 5600X의 가격이 저렴하다고 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비싼 인텔 코어 i9-10900K를 성능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겠죠. 이제는 AMD CPU는 무조건 아무 이유 없이 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멸종한 듯 하고, 공식 발표한 성능조차도 암레발이라며 믿지 못하는 의심병 환자들 역시 자연스럽게 완치된 듯 합니다. 써놓고 보니 AMD가 참 대단한 일을 했군요.
하지만 라이젠 5000 시리즈가 불어온 돌풍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컴퓨터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고요. AMD나 라이젠을 몰라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닙니다. 라이젠 5000 시리즈의 압도적인 성능은 잘 알고 있지만, CPU에 큰 돈을 투자할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도 그럴것이 라이젠 3000 시리즈만 해도 지포스 RTX 30 시리즈 같은 최신 그래픽카드의 성능을 뽑아내기엔 문제가 없거든요. 물론 라이젠 5000 시리즈는 더 좋습니다. 그러나 목표하는 가격대가 다르지요. 라이젠 5 5600X와 라이젠 5 3600이 17만원 쯤 차이나니 무조건 최신 제품을 고르라고 할 순 없겠죠.
라이젠 5000 시리즈에 아직 보급형 제품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젠2에서 젠3로 오면서 CCX 구성을 비롯해 많은 부분이 달라졌고, 기존과 다른 설계의 칩을 새로 만들어야 하니 당연히 제조 원가에도 영향을 줍니다. 기존 제품이야 1년 넘게 만들면서 쌓아온 노하우가 있으니 제조와 공급 모두 안정화가 됐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리프레시 모델인 XT 시리즈도 만드는 거고요. 하지만 최신 아키텍처를 적용한 새 칩은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은 고급형 제품에만 공급하기에도 벅찹니다. 그래서 CPU건 그래픽카드건 신형 아키텍처는 고급형부터 먼저 만들고 나중에 보급형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AMD가 라이젠 5 5600이라던가 그 이하 CPU를 추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 아직은 알 수 없고요. 그 전까지 AMD는 20만원 이하의 보급형 CPU에 라이젠 5 3600이나 라이젠 3 3300X같은 기존의 제품들을 유지할 겁니다. 사실 그래도 됩니다. AMD 입장에선 보급형 CPU에 최신 아키텍처의 적용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거든요. 경쟁 상대가 인텔 10세대 코어 프로세서니까요. 고급형이야 위에서 말한대로 라이젠 5000 시리즈가 다 휘어잡았고요. 보급형 제품의 경우 성능에서 밀리니 가격이라도 인하해서 가성비를 높이겠다는 생각인지, 최근 인텔의 보급형 CPU는 값을 꽤 낮췄습니다.
하지만 이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왜냐면 제품이 바뀐 게 아니거든요. 가격을 인하하면 가성비는 높아지겠지만, 성능에서 상대방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냥 싼 맛에 쓰는 하위 모델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인텔의 가격을 내리면 AMD도 따라서 내린다는 겁니다. AMD는 지난달에 라이젠 5 3600의 멀티팩 공급을 늘려 실질적인 가격 인하를 단행했으며, 최근에는 라이젠 3 3300X의 멀티팩 모델을 출시하면서 10만원 중반대의 가격에 안착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고급형 CPU의 성능은 더 높아졌고, 보급형 CPU의 가격은 더 저렴해졌으니 어느 쪽이건 나쁠 게 없군요.
10만원 중반에서 20만원 초반대까지 가격대에 판매되는 보급형 CPU의 성능 우위에 대해서는 전에도 몇번 소개했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결론은 같습니다. CPU가 달라지진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새 그래픽카드도 나왔겠다 간단히 벤치마크 몇 개 소개하겠습니다. 돈 있어도 못 구한다던 지포스 RTX 30 시리즈도 가장 아래에 3070이 추가되면서 수급이나 가격 부담에도 많이 여유가 생겼는데요. 여기에선 AMD 라이젠 5 3600, 라이젠 3 3300X, 인텔 코어 i5-10400에 지포스 RTX 3070를 조합해서, 현재 한국에서 인기가 가장 높은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 배틀그라운드, 오버워치의 평균 프레임과 최소 프레임을 측정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평균 프레임
리그 오브 레전드: 최소 프레임
리그 오브 레전드는 AMD와 인텔의 성능 차이가 유독 큰 편입니다. AMD가 우세한 쪽으로 말이죠. 아마도 라이젠 3000 시리즈부터인것 같은데요. 그 오래된 게임이 얼마나 하드웨어를 먹는다고 프레임을 따지냐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처럼 연식에 비해 하드웨어 자원을 은근히 차지하는 게임도 흔치 않습니다. 게임은 오래됐어도 계속해서 바뀌다보니 그런가 봅니다. 이 테스트에서 인텔은 최소 프레임 120fps 방어가 되지 않았고 AMD는 코어 i5-10400보다 더 저렴한 라이젠 3 3300X에서도 125fps를 유지했습니다. 높은 리프레시율의 게이밍 모니터를 쓴다면 이 정도 차이는 무시할 수 없겠죠.
오버워치: 평균 프레임
오버워치: 최소 프레임
오버워치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와 비교하니 롤이 은근히 하드웨어를 많이 쓰는 게임이라는 게 다시 한번 드러나는군요. 여기에서는 코어 i5-10400의 평균 프레임이 라이젠 5 3600보다 조금 높게 나왔는데, 진지하게 따질만한 차이는 아닙니다. 라이젠 3 3300X는 그보다 더 낮았으나 가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기대 이상의 결과를 보여줬다고 해도 될 겁니다. 또 화면 전환이 빠르고 움직임이 많은 fps 장르의 게임에선 평균 프레임보다도 최소 프레임이 얼마나 유지되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여기서 코어 i5-10400과 라이젠 5 3600은 완전히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으며, 라이젠 3 3300X의 차이도 크지 않았습니다.
배틀그라운드: 평균 프레임
배틀그라운드: 최소 프레임
테스트가 가장 귀찮은 게임인 배틀그라운드입니다. 잊을만 하면 업데이트를 하면서 기존 세이브 파일과 호환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테스트 때마다 프레임 구간이 좀 다르게 나오는데, 그래도 본질적인 성능 차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평균 프레임과 최소 프레임 모두 코어 i5-10400보다 라이젠 5 3600이 좀 더 높은 숫자가 나왔고요. 라이젠 3 3300X는 다른 두 CPU보다 작은 코어/스레드 수에도 불구하고, 평균 프레임과 최소 프레임 모두 크게 떨어지지 않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라이젠 3 3300X은 16MB L3 캐시의 레이턴시를 최소화한 CCX 구조 덕분에, 게임같은 일부 작업에선 코어 수 이상의 성능을 보여준다는 평을 듣고 있지요.
AMD는 라이젠 5000 시리즈로 중고급형 CPU 시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10만원에서 20만원대의 보급형 CPU 시장은 라이젠 3000 시리즈 그대로 유지됩니다. 주력 모델인 라이젠 5 3600과 라이젠 3 3300X의 경우 멀티팩 버전이 출시되면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졌습니다. 연산이나 작업 성능이야 말할 것도 없이 라이젠이 우수하니 굳이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고요. 최신 지포스 RTX 30 시리즈 그래픽카드와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의 조합에서도 라이젠이 경쟁 모델보다 더욱 안정적인 프레임을 뽑아주니 보급형 CPU 시장에서 우위를 가져가기에 충분하다 보입니다.
또 메모리 차이도 있습니다. 라이젠 3000 시리즈 CPU는 모든 모델이 DDR4-3200MHz의 고클럭 메모리를 지원하며, 저렴한 메인보드를 써도 메모리 오버클럭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인텔은 CPU에 오버클럭 제한이 걸려있는 건 물론이고, 메모리 오버클럭조차도 고가의 메인보드를 써야 하기에 기본 스펙 이상의 성능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CPU에서 제공하는 모든 기능을 적극 활용하여 가격 대 성능비를 최대한 뽑아내길 원하는 분들이 라이젠을 선택지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품과 똑같은 A/S와 쿨러까지 제공하며 가격까지 저렴해진 멀티팩 버전이라면 가성비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