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개요
컴퓨터는 스쳐가는 인연이요, 키보드는 평생 갈 반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키보드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장비라는 뜻이겠지요. 개발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개발자에게 더 중요하죠. 좋은 키보드를 쓰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코드를 더 고통스럽게 짜느냐 아니면 즐겁게 짜느냐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력있는 개발자라면 만원짜리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더라도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낼 순 있겠지만, 저는 불행히도 그런 실력있는 개발자는 아니더라고요.
그런 개발자들 중 특이한 사람들, 개중에서도 정말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키보드가 있습니다. 바로 해피해킹 키보드입니다. 이 키보드만큼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제품은 없는데요, 왜 평이 그리 극도로 갈리는지, 그리고 제가 쓰기엔 어땠는지 이번 리뷰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모든 키보드는 사용환경에 따라 그 평이 크게 갈릴 수 있으니만큼, 제 사용환경부터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vi를 애용합니다. 물론 메인 에디터로 vi나 vim을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요, 파이참같은 IDE에 vi 키매핑 플러그인을 사용해서 개발을 합니다. 여기에 가끔식 vscode나 주피터/제펠린 노트북을 사용하고요. 문서작업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1. 사양 및 구성품
구성품은 정말 단촐하다 못해 소박한 수준입니다. 키보드 하나와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된 설명서가 끝이에요. 더 뭐 없냐고요? 없습니다. 심지어 저 키캡도 추가금 3만원을 들여서 넣은 것입니다. 물론 무각 키캡, 유각 키캡 이렇게 한 쌍을 제공하긴 하지만, 그래도 키캡 겨우 4개에 3만원이 넘는 금액은 조금 납득하기 힘들죠. 이렇게 해서 총 37만원이 넘습니다. 물론 커스텀 기계식 키보드는 100만원이 넘는 것들도 있긴 한데, 그건 아예 수작업으로 만든 것이고 이건 공장제라 이 가격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긴 좀 어렵죠.
아, 그래도 건전지 두개는 양심적으로 넣어줍니다. 왜 넣어주는지는 있다가 말하도록 하죠.
사양은 이렇습니다.
2. 작동 방식
해피해킹 하이브리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선으로도, 무선으로도 쓸 수 있는 구조입니다. 또 맥, 윈도우, 그리고 리눅스 모든 환경에서 쓸 수 있고요(물론 윈도우 환경에서 이걸 썼다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으실 겁니다.) 그런데 작동 매커니즘이 특이합니다.
먼저 무선으로 동작하는 방식이 되게 특이합니다. 배터리를 키보드 안에 내장한 것이 아니라, 건전지 두개를 키보드 안에 넣어서 키보드를 작동시킵니다. 물론 무선으로 작동시킬 때 말이죠. 그리고 유선은 또 usb-c 케이블을 사용해서 연결합니다. 앞서 보셨다시피 유선 케이블을 동봉해주지 않기 때문에 유선으로 키보드를 쓰려면 따로 usb-c 케이블을 사야 합니다. 환경을 생각해서 충전기는 빼지만 라이트닝 케이블은 절대 usb-c타입으로 안 바꿔주는 애플도 케이블은 주는데,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것 말고도 특이한 게 또 있습니다. 바로 서로 다른 os간 호환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6개의 핀을 사용해서 OS별 호환을 하게 되는데요, 이걸 딥스위치라고 합니다. 저는 주로 맥에서 쓰기 때문에 2번, 3번, 그리고 6번을 켜놓습니다. 우분투의 경우 1번 5번을 켜면 되고요, 업무상 다른 리눅스 배포판을 쓰지는 않아서 나머지 리눅스는 어떻게 설정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웬만하면 1번 5번 켜시면 호환이 될 겁니다. 윈도우는... 뭐 굳이 토프레가 취향이라고 하셔도 레오폴드 있잖아요. 다른 좋은 키보드 쓰세요. 이건 윈도우에서 쓰라고 만든 키보드가 아닙니다.
아, 그리고 딥스위치를 연결 상태나 블루투스에 연결된 상태에서 조작하지 마세요. 저 스위치가 회로를 바꾸는 거라서 연결된 상태에서 저걸 조작하시면 높은 확률로 고장납니다.
3. 배열
해피해킹의 아이덴티티는 이 특이한 배열에 있습니다. 컨트롤 키가 캡스락 자리에 있고, 다른 모든 쓸데없는 키를 모두 fn키를 사용해서 매핑하도록 되어있죠. 그래서 해피해킹을 처음 사용하신다면 절대 무각 사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제가 지금 경험하고 있거든요. 개인적으론 키보드 옆부분에 특수키 표시만 되어있는 키캡이 있으면 딱 좋겠다 생각하는데, 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라고요.
문제는 이 배열이 일반적인 사용에 있어서는 정말 치명적인 단점이라는 것입니다. 윈도우와의 호환성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 주범이자, 해피해킹을 사용한 문서작업이 지옥이 된 원인이죠. 문서작업을 할 때 특수키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PPT 하나 만들때도 특수키를 꽤 많이 활용하는데 말이죠. 엑셀이요? 방향키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작업이 바로 엑셀인데, fn키 누르고 [;'/ 누르면서 엑셀 작업을 하면 아마 새끼손가락이 고장날 겁니다.
단점은 이거 하나입니다. 그것 빼곤 완벽해요. 물론 vim을 쓴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죠. 이 거지같은 배열은 리눅스 터미널 환경과 vi/vim을 만나면 거꾸로 장점이 됩니다. SQL 구문 쓸 때 빼고는 거의 쓰지도 않는 캡스락 키 자리에 컨트롤을 박아둬서 ctrl이 자주 쓰이는 터미널 환경에서 손의 피로를 덜어주고요, 또 hjkl로 커서를 옮기는 vi의 특성상 방향키의 부재는 전혀 거슬리지 않습니다. 크기도 작아서 손이 키보드에서 많이 움직일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시간 타이핑할 때에도 그리 피곤함을 못 느끼죠.
그렇다고 문서작업을 할 때 아예 못 써먹을 환경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노션에 뭐 쓸 때에 방향키를 헤비하게 누르지는 않잖아요. 그 외에는 마크다운으로 문서작업을 할 때가 있겠는데, 어차피 마크다운 쓰는거나 코드 쓰는거나 다를 게 없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IDE나 에디터 단위에서 vi 플러그인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라면 몰라도요.(제가 지금까지 써본 IDE/에디터 중 vi를 지원하지 않는 경우는 한번도 못 봤습니다)
거기다가, 굉장히 가볍습니다. 한무무는 거의 돌덩이라서 백팩에 넣고 움직일 때마다 정말 힘들었는데, 이건 한무무보다 훨씬 가벼워서 휴대하기 훨씬 편하더라고요. 실제 카탈로그상 스펙도 540g이라 거의 서피스 수준인 830그램의 한무무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회사에 출퇴근하면서 키보드를 휴대하고 다니는 입장에서는 정말 큰 차이죠.
요약하자면, 정말 거지같은 배열이지만 터미널 + vi 한정으론 이것보다 더 좋은 배열이 없습니다. 거기에 휴대성도 필요하다? 이것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4. 키감
끝판왕 키감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구입하신 분들에게 있어선 좀 실망스러운 키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계식 키보드에서 느껴지는 클릭감이잘 느껴지지 않거든요. 반발력이 끝에만 살짝 느껴지는 오묘한 키감이라서 청축의 클릭키한 키감을 기대하셨던 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키감입니다. 그런 분들께는 오히려 토프레보단 노뿌(한무무등)가 취향일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이런 키감이 중독되면 또 끊을 수 없는 키감입니다. 도각도각거리고 동시에 서걱서걱거리는 느낌인데요, 키가 서걱서걱 거리면서 동시에 끝에 하이힐 소리마냥 도각도각하는 느낌이 납니다. 그리고 해피해킹은 끝에서 반발력이 나오는 느낌이라서 해피해킹으로 타이핑을 좀 하다가 한무무를 쓰면 이게 왜 이렇게 무겁지? 싶은 느낌도 듭니다. 한무무가 더 키압이 높은 게 아니냐 하실 수도 있는데, 해피해킹도 45g, 한무무도 45g입니다.
설명이 너무 길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키보드 타건음 한번 들어보고 가시죠. 핸드폰 녹음 특성상 실제 체감 소음보다 시끄럽다는 점 감안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실제 소음은 영상에서 나는 소음의 1/3에서 1/2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계속 동영상이 쇼츠로 올라가서 링크로 겁니다.
https://youtube.com/shorts/P8n5UODZ98s?feature=share
5. 총평?
해피해킹 키보드를 하루정도 사용해본 결과, 제 입장에선 정말 괜찮은 키보드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무접점 키보드인데, 키감도 준수하고 휴대성도 좋거든요. 뭣보다 vi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이 키보드는 정말 최고의 키보드입니다. 특히 배열이 정말 환상적이에요.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윈도우를 쓰거나, vi/vim을 안 쓰거나, 혹은 키감만 바라고 쓰신다거나 하면 이 키보드는 정말 돈 낭비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vi를 사용하는 사람이 리눅스/맥에서 코딩을 할 때 특화된 키보드거든요. 당신이 vi로 스프레드시트를 만든다거나 혹은 소설을 쓴다거나 하는 게 아닌 이상, 이 키보드의 구입은 재고해보시는 게 맞습니다. 정말로요.
1. 키감은 끝판왕이라기엔 좀 모자르고
2. vi/vim에만 특화된 배열에
3. 각종 작업에서 주로 쓰는 특수키들은 죄다 fn키를 눌러야 하며
4. 윈도우 호환성은 개나 줘버리고
5. 가성비는 정말 안 좋은
게 바로 해피해킹 키보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어 만족하지만, 그렇다고 PPT같은 다른 작업에서도 이 키보드를 잘 쓸지는 모르겠네요. 아마도 PPT만 할 수 있는 다른 키보드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키보드를 바꿨음에도 한무무를 그대로 안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무각인은 매력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