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메인 시스템에서 딱 한 가지 키보드만 씁니다. 펜타그래프 스위치를 내추럴로 배치한 유선 키보드요. 하지만 이게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또 지독하게 고집을 부린다고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키보드 가지고 고집을 부린다는 소리를 하려면 말이죠. 키 스위치가 청축인지 똥축인지, 액추에이션 포인트가 얼마인지, 구조나 레이아웃이 어떤지를 따지는 수준으로는 택도 없고요. 레노버가 IBM의 싱크패드 사업부를 인수한지 17년이 지났는데도 빨콩 없는 건 못 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좋게 말하면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발전하면서 노트북이나 컴퓨터의 입력 장치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노트북에 터치스크린을 넣고 힌지의 작동 범위를 늘려 2in1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우스 대신 스타일러스 펜을 자연스럽게 꺼내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발전된 최신기술을 도입한 대체제가 많은 상황에서 굳이 90년대 감성의 포인팅 스틱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써놓고 보니 이성이 아닌 감성이라면 고집할 수 있겠네요.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말릴 순 없겠지요. 하지만 2022년 기준으로 빨콩이란 입력 장치가 터치 조작에 익숙해진 다수의 사람들에게 실용적이고 효율적이며 편리한 입력 방식이라고 권할 수 있을까요?
시작부터 빨콩을 성토하는 이유는 누가 빨콩 달린 키보드로 기글에 악플을 써 왔다는 사실을 발견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요. 씽크패드 로고가 박힌 키보드로 뒷통수를 후려 갈기는 급습을 받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젠 늙고 병들어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 펜타그래프가 아닌 키보드는 케이스를 순금으로 만들고 키캡에 다이아몬드를 박아준 게 아닌 이상 거저 줘도 못 쓰겠고, 책상 위에 남은 공간이 없어 키보드를 자꾸 바닥에 떨어트리다 보니 자주 안 쓰는 부분은 쳐낸 텐키리스는 어떨까 알아보던 차에, 좀 비싼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키감이 형편없진 않을 것 같은 키보드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빨콩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산 것이 씽크패드 트랙포인트 키보드, 속칭 울트라나브입니다. 처음부터 빨콩은 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고요. 펜타그래프와 텐키리스, 이 두가지만 보고 샀습니다. 2세대 모델에선 무선과 블루투스 기능이 추가됐지만 이동성이 전혀 필요하지 않아 일부러 구형인 유선 모델로 샀습니다. 1세대와 2세대 사이에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았다면 기왕 사는 김에 신형으로 갔을 법도 한데, 두 제품의 가격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더라고요. 1세대는 한때 4만원 후반에서도 살 수 있었고 지금은 6만원 언저리인데, 무선은 12만원이 넘거든요. 그래서 몇 달 써본 지금 내본 결론은 이겁니다. 단종되기 전에 두개 쯤 더 사놓을까봐요.
제품명 | 레노버 씽크패드 컴팩트 USB 트랙포인트 키보드 0B47209(속칭 울트라나브) |
키 배열 | 78키, 텐키리스, 6열 |
키 스위치 | 펜타그래프(시저스 타입 스위치) |
마우스 기능 | 트랙포인트, 마우스 기본 버튼 3개 |
연결 방식 | 마이크로 USB, 길이 150cm(무선/블루투스 버전도 있음, 더 비쌈) |
부가 기능 | 높이 조절, 멀티미디어 키 |
색상 | 검은색 |
크기 | 306x164x14mm |
무게 | 440g |
참고 | https://prod.danawa.com/info/?pcode=2164244 |
가격 | 58,320원(2022년 8월 다나와 최저가 기준) |
현장 친화적인 텐키리스
벤치마크용 시스템을 놓는 공간이 협소하고 시스템을 자주 교체하면서 키보드의 위치가 자주 바뀌다보니, 기존에 쓰던 풀사이즈 키보드가 바닥에 몇 번 떨어지고 구르면서 1번 키가 빠져버렸습니다. 다른 키라면 몰라도 1은 자주 쓰는 키라서 불편함을 느껴 좀 더 작은 텐키리스 키보드를 찾아 봤는데요. 키감 좋은 텐키리스라면 애플 키보드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macOS에서 쓰라고 만든 물건이기에 윈도우 시스템에서 쓰려면 특수 키를 일일이 맵핑해 줘야 합니다. 프린트 스크린 같은 특수 키를 자주 쓰고, 포맷도 은근히 잦은 벤치마크용 시스템에서 맵핑까지 해가며 굳이 이걸 쓰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고른 것이 이 키보드인데, 쓰다보니 국제 사무기기 회사 IBM 시절의 노하우가 느껴지네요. 키패드와 특수키를 빼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텐키리스 키보드 중에는 프린트 스크린도 빼고 페이지업/다운을 이상한 위치에 박아넣는 등, 이걸 직접 써본 사람이 디자인한 게 맞는건가 의혹이 생기는 제품도 있었는데요. 이 키보드는 아닙니다. 키패드를 뺐지만 키보드는 달려 있고, 다른 기능 키는 과감히 뺐지만 프린트 스크린은 한자와 한영키 사이에 넣는 센스를 발휘했습니다. ESC나 백스페이스, 엔터와 시프트처럼 자주 쓰는 특수 키의 크기를 줄이고 거기에 다른 키를 넣는 뻘짓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벌크 아닌가 싶은 박스
한쪽엔 보증서, 다른 쪽엔 시리얼이 붙어 있지만 A/S는 전혀 기대하지 않으니 그냥 버렸습니다.
충격을 완화할 구조는 전혀 없는 매우 친환경적인 포장
구성품은 별거 없습니다.
키보드 전면
키보드 뒷면
키보드 측면
시대에 뒤떨어진 마이크로 USB 포트 케이블.
크기 306x164x14mm
벤치마크 시스템에서 쓰던 풀사이즈 키보드와 크기 비교. 이렇게 보면 그냥 작은 키보드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실제로 사용하는 현장에서는 그 차이가 상당히 큽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 풀사이즈 키보드를 놓고 쓰니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죠.
상대적인 우위를 지닌 키감
이 키보드를 사기 전에도 작은 키보드는 몇 개 있었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키보드를 새로 샀습니다. 하나는 그 키보드들이 무선이라는 겁니다. 안 쓸때는 구석에 쳐박아 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야 하는데, 그 때마다 전원이 안 들어오면 배터리는 안녕하신지 안부를 여쭈어야 하고 전원 스위치를 일일이 켜고 꺼야 하다보니, 코앞에 둔 시스템을 조작하기 위해 굳이 무선 키보드를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키감입니다. 펜타그래프 방식의 키보드는 많지만 개중에는 이걸 사람이 쓰라고 만든 건가 싶을 정도로 키감이 형편없는 제품이 많은데요. 씽크패드 로고를 박았으면 그 정도는 아닐거라 생각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키가 좀 무겁습니다. 좋게 말하면 쫀득쫀득하게 달라붙고, 나쁘게 말하면 키를 누를 때 생각보다 힘을 많이 줘야 합니다. 이걸로 글을 썼다면 손가락이 피로하다느니 이것도 수행이라 탄지신공을 쓸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느니 등의 뻘소리를 할 기회가 생겼을텐데, 벤치마크용 시스템에서'만' 쓰는 키보드라 본격적인 타이핑은 하지 않고요. 키가 무거우니 오타는 줄겠구나, 아무리 무거워도 멤브레인만도 못한 품질로 허접이라 매도해주고 싶을 수준의 싸구려 키보드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시험삼아 키 하나를 뜯어봤는데 구조에서 특별한 건 찾지 못했습니다.
쓰던 키보드의 1번 키가 빠졌다는 이유로 새로 샀는데, 새 키보드의 구조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키를 하나 빼보기로 했습니다. 펜타그래프가 대부분 그렇듯 재조립은 안 되네요. 저 때는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키 스위치의 내부 구조는 별거 없습니다. X자 모양으로 키를 지탱하는 펜타그래프, 혹은 시저스 타입 스위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높낮이 조절. 옆에 버튼이나 커버처럼 생긴 게 달려있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약간 아쉬운 배열, 빨콩은 안쓴다고요
위에서 프린트스크린을 넣은 위치가 절묘하다 칭찬했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긴 합니다. 왼쪽 아래의 Fn 키가 그것입니다. 키보드 오른쪽에 한/영과 한자키를 넣으면서 Ctrl과 Alt 키는 무조건 왼손으로 눌러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요. Ctrl+C, V, Alt+F4 등 자주 쓰는 단축키는 어차피 왼손으로만 쓰니까 이런 결정에는 불만이 없지만, Ctrl이 Fn에게 밀려서 옆으로 한 칸 들어왔다는 게 문제입니다. Ctrl의 위치를 가늠할 때 '무조건 키보드 가장자리에 있다'고 판단하지, 'Fn 옆'이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Ctrl 대신 Fn을 누르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적응이나 다음 버전에서 개선이 필요합니다.
Fn 키와 조합해서 쓸 수 있는 단축 기능들은 키보드 상단의 펑션키에 있습니다. 이런 최신 문물을 거부하는 극렬 보수론자들은 Fn+Esc로 펑션 락을 걸어두면 되고요. 그 옆의 남는 공간에는 홈/엔드/인서트 등의 키를 잘 때려 넣었습니다. 키보드 중앙에는 왠지 한번 꾸욱 누르거나 살살 비틀어보고 싶게 생긴 빨콩이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빠르고 정확하며 편리한 마우스를 연결하기 귀찮은 상황이라면 모를까 굳이 이걸 써야 할 이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포인터 조작을 아주 가끔 하거나 마우스는 물론이고 트랙패드까지 놓을 공간이 부족한 경우라면야 유용하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으니 그냥 언급을 안 하겠습니다.
케이블과 연결된 키보드
키 배열은 대체로 나쁘지 않습니다. 왼쪽 아래의 저 Fn 키의 위치만 빼고 말이죠.
프린트 스크린은 은근히 쓸 곳이 많지만, 텐키리스에서 어디 넣기 애매한 키인것도 사실입니다. 한영키와 한자키 사이라는 위치는 아주 나쁜 선택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물티슈로 키보드를 대충 닦다보니 본건데, 저 빨콩이 참 쉽게 빠지네요. 고장난 줄 알고 기겁하며 도로 끼웠는데 정상 작동하긴 합니다.
레노버 씽크패드 컴팩트 USB 트랙포인트 키보드 0B47209
텐키리스 디자인을 채택해 크기를 줄였지만 빨콩과 특수키를 넣어 이것 하나로도 어지간한 작업은 다 해낼 수 있으며, 싸구려 키보드보다는 확연히 나은 펜타그래프 스위치가 있습니다. 대놓고 말하면 비슷한 가격대의 로지텍이나 마이크로소프트 키보드보다 낫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용도와 몇 가지 사소한 아쉬움 때문에 사용기를 정리하는 순간까지도 이게 최고라는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써 본 키보드 중에서 테스트 시스템에 물리기에는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은 드네요. 가격이 조금만 더 저렴했다면 3개 정도 더 사두고 이 글을 썼을텐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사재기는 고민을 더 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