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논어 양화편에서 처음 나온 말이나 삼국지연의의 화웅이 했던 말로 더 유명합니다.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라는 뜻이죠. 그리고 이것만으로 스킬 SKIL 8600 송풍기를 가지고 컴퓨터를 청소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은 충분히 됐으리라 봅니다.
컴퓨터 안엔 복잡한 형태의 전자 부품이 들어차 있고, 이들 부품의 열을 식히기 위한 통풍구나 쿨링팬은 필수입니다. 클린룸에 컴퓨터를 놓고 쓰는 게 아닌 이상 쿨링팬이나 통풍구를 통해 먼지가 항상 들어올 수밖에 없으며, 각양각색의 부품 사이사이에 먼지가 끼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먼지야 털어내면 되죠. 하지만 컴퓨터 부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털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진공청소기로 빨아내는 방법도 있으나, 작은 먼지까지 깔끔하게 흡입할만한 청소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강한 바람을 불어내는 공구를 이용해서 먼지를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가장 만만한 방법이라면 먼지제거용 스프레이를 쓰는 것입니다. 한 캔이 몇 천원밖에 안 하는데다, 사용법도 간단합니다. 허나 압축 공기의 양이 은근히 적어서 자주 쓰다보면 금새 떨어지고, 압력도 약해서 먼지를 말끔하게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소감으론 그냥 입으로 부는 거랑 별 차이가 없더라구요.
용산 같은 곳에선 컴프레셔를 사용해서 컴퓨터 부품의 먼지를 청소하곤 합니다. 덕분에 어두컴컴한 피씨방에서 니코틴에 타르와 몇년을 뒹군 부품이라 해도, 겉으로는 깔끔하게 만들 수 있지요. 문제는 돈입니다. 에어탱크가 달린 모델에 에어건, 수분필터까지 다 더하면 아무리 못해도 십만원은 잡아야 하거든요.
(소형 컴프레셔를 싸게 구할 방법을 찾다가 저처럼 돈낭비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https://gigglehd.com/gg/93967 )
그래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송풍기입니다. 바람을 한 곳에 몰아서 불어준다는 점에서 선풍기와 다르고, 뜨거운 바람이 아닌 실온 그대로의 바람이 나온다는 점에서 드라이어와 다릅니다. 무엇보다, 불어주는 바람의 세기가 선풍기나 드라이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그래서 먼지도 잘 털어내지요.
솔직히 말해서 스킬이란 브랜드가 딱히 고급은 아닙니다. 브랜드로 따지자면 마끼다나 보쉬, 하다못해 계양이 더 윗급이겠죠. 그런데도 숱한 송풍기 중에서 스킬의 SKIL 8600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싸다는 거죠. 먼지제거용 스프레이 10개 값인 26000원이거든요.
최대 소비 전력 | 600W |
최대 회전 속도 | 16000rpm |
최대 풍량 | 3.3제곱m/분 |
크기 | 200x430mm |
무게 | 1.7kg |
전선 길이 |
3m |
솔직히 박스를 보고 놀랬습니다. 가격 대비 상당히 포장이 잘 됐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이 생각은 박스를 열어보고 나서 바뀌게 됩니다.
제품의 기능과 용도를 설명했네요. 여기 사진에 나온대로 작은 먼지보다는 흙을 밀어버리는 게 송풍기의 본분에 더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만.
박스를 여니 송풍기가 바로 나옵니다. 스폰지나 스티로폼까진 바라지도 않는데 그 흔한 비닐 한장 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박스는 써야할테고 거기에 그림 넣어 인쇄하는 건 별 일도 아닌데, 화려한 박스를 보고 지나치게 감격했나 봅니다.
구성품도 별거 없습니다. 설명서와 보증서가 전부. 허나 다른 게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오히려 여기에 서비스로 사탕이라도 하나 넣어줬다면 나프탈렌인가?! 하고 그냥 버렸을 겁니다.
송풍기 자체는 덩치가 꽤 나가지만 꺼내보면 상당히 조신한 자세가 나옵니다. 송풍기의 노즐은 따로 분리된 상태며, 케이블도 잘 감겨서 사이에 끼워져 있습니다.
노즐을 본체에 끼운 후 돌려주면 체결이 끝납니다. 노즐은 꽤 말랑말랑한 편이라 어디 눌리거나 부딛히는 것 정도로 손상되진 않을 듯. 항상 무언가에 닿게 되는 부분이니 이런 재질을 쓴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 보입니다.
스킬 8600을 판매하는 곳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질문 중 하나가, 흡입구에 노즐을 끼워서 이걸 송풍이 아닌 흡입용으로 쓸 수 있냐는 건데요. 흡입구 안쪽을 보면 얼핏 노즐 비슷한 걸 끼우도록 파낸 흔적이 있으니 이런 오해를 사는 것도 당연합니다.
허나 저가형 송풍기인 스킬 8600은 흡입 기능은 없습니다. 당연히 기본 노즐도 여기에 끼워지진 않지요. 흡입 기능을 원한다면 이보다 더 비싼 제품 중에서 찾아보셔야 할 듯.
노즐의 직경은 2cm 쯤 됩니다. 컴퓨터 부품 사이사이에 낀 먼지를 청소하기 위해선 이보다 더 작은 노즐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작은 크기의 노즐을 원한다면, 노즐을 바꾸기보다는 그냥 컴프레셔를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모터와 흡입구, 손잡이가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때문에 차지하는 공간이 은근히 비효율적입니다. 송풍기라는 제품의 특성상 디자인은 어쩔 수 없겠죠. 허나 이걸 사용하지 않을 때 모셔둘만한 장소를 찾기가 아주 쉬운 일은 아닐 듯 합니다.
케이블은 3m로 짧진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넉넉하다곤 할 수 없습니다. 설마 방 한가운데서 바람과 먼지를 풍풍 날리면서 송풍기로 컴퓨터 청소를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신 분은 안 계시겠지요? 작업하기 괜찮은 곳까지 들고 나가기엔 3m의 케이블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게는 케이블 다 포함해서 1.666kg이 나오네요. 덩치에 비해 무겁진 않습니다. 장시간 손에 들고 쓰긴 좀 힘들겠지만, 어차피 송풍기를 그리 오랬동안 들고 있을 것 같진 않네요.
손잡이입니다. 잠금 버튼의 위치를 보아하니 오른손잡이 전용이네요. 조작 방법은 간단합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송풍기가 작동하고, 버튼에서 손을 떼면 멈춥니다.
전원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잠금 버튼을 누르면 송풍기가 작동 상태로 고정됩니다. 계속해서 바람을 불어줄 필요가 있을 땐 이 기능이 유용하겠네요.
바람의 세기는 다이얼을 돌려서 조절합니다. 특이하게 7단으로 올릴 때만 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나며, 그 아래에선 부드럽게 움직이네요. 어지간하면 7단은 쓰지 말라는 경고일지도.
1단은 그냥 장식입니다. 모터가 우우웅 하고 돌아가긴 하는데 바람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1단과 2단 사이 쯤에 두면 바람이 나오기 시작하지요. 역시 저렴한 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모터에는 제품의 스펙을 알 수 있는 스티커가 있고, 모터 뒷편에는 일자 드라이버로 풀어내는 마개가 있는데요.
설명서에는 카본 브러쉬라고 나와 있네요. 안에 보이는 건 모터인듯.
브러쉬의 구조는 스프링과 자석이 다입니다. 청소는 3개월마다 한번식 하라고 하는데, 송풍기를 자주 쓸 일이 없어서 언제나 열어볼지 모르겠습니다.
강력한 바람을 뿜어내며 먼지를 휘날리는 송풍기를 방 한가운데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런 분들도 소음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네요.
사실상 송풍기 구실을 못하는 1단이 70dBA며, 실질적인 사용 범위의 시작인 2단은 93dBA입니다. 4단부터는 모터가 고속으로 돌아서 그런지 웨에에엥하는 소리는 귀에 거슬리는데 소음 측정기에서 인식하는 값은 별 차이가 없네요. 사실 100dBA건 105dBA건 장시간 들을만한 수준이 아닌 소음이라는 점에선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요.
컴퓨터에서 70dBA가 나면 이거 엄청 시끄러운 물건이구나 할 겁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진공청소기나 드릴하고 해야 겠네요. 잠깐잠깐 먼지를 털어내는 거라면 몰라도 장시간 사용할 거라면 귀마개는 꼭 있어야 할 겁니다.
전력 사용량. 1단이 정말 무쓸모인건 맞나 봅니다. 22W밖에 안 먹으니까요. 하지만 송풍기 구실을 하는 2단은 107W로 치솟더니 이후론 100W씩 꼬박꼬박 늘어나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전력 사용량 측정계를 쓰면서 610W를 찍는 건 처음 봤네요. 물론 송풍기를 계속 틀어놓고 쓸 일은 없을테니, 실질적인 전력 사용량은 아주 많다고 하긴 힘들 듯.
그래서 과연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느냐? 사용 중이던 메인보드를 끄집어 냈습니다.
위에서 보신대로 전력 사용량과 소음이 워낙 무시무시한지라 2단까지만 사용했으며, 송풍기로 먼지를 불어낸 것 외에 다른 청소는 하지 않았습니다.
메인보드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특히 방열판은 그래픽카드에서 나온 먼지가 줄을 지어 자리잡았네요.
송풍기로 먼지를 털어내니 메인보드 위에 쌓여있던 먼지는 많이 줄었습니다. 방열판 위에는 자국이 좀 남아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한번 문질러 보니 먼지가 급격히 줄었네요. 따라서 송풍기만 사용하는 것 보다는, 다른 청소 방법을 병행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인텔 정품 쿨러입니다. 쿨링팬에 붙어있는 먼지도 먼지지만, 안쪽 방열판에 끼어있는 검은색 먼지들을 유심히 봐 주세요.
쿨링팬 날개 끝부분엔 여전히 먼지가 붙어 있지만, 방열판의 먼지는 깨끗하게 청소됐습니다.
두번째 실험대상인 그래픽카드입니다. 이것도송풍기를 2단으로 놓고 청소했습니다.
송풍기로 바람을 쐰 시간은 기껏해봣자 10초 정도인데, 이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 변했을까요?
청소하기 전에는 알루미늄 히트싱크 사이사이에 먼지가 끼어 있으며, 플라스틱 쿨러 커버 안쪽과 쿨링팬에도 먼지가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청소 후에는 먼지를 찾아보기 힘드네요. 히트싱크와 커버는 물론 쿨링팬에도 남은 먼지가 없습니다. MSI Torx 팬이 인텔 정품 쿨러보다 청소하기도 더 나은 듯.
분명 효과는 있습니다. 저 먼지를 일일이 붓으로 털어냈다간 바닥에 쌓인 먼지의 양에 비례해서 짜증이 늘어났을 테고, 먼지 제거용 압축공기 캔은 한통을 다 써도 저 만큼 깔끔하게 끝내진 못했을 겁니다.
허나 100dBA에 육박하는 굉음을 내며 몇백W의 전기를 쳐묵쳐묵하는 송풍기까지 동원해서 컴퓨터를 청소하는 것 자체가 너무 스케일이 큰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그것도 출력을 가장 약하게 줄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할계언용우도라는 말을 붙인 겁니다.
허나 아무리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기 아깝다고는 해도, 닭 잡는 칼이랑 소 잡는 칼의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면? 굳이 닭 잡는 칼을 살 필요는 없겠지요. 자주 사용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하나 있으면 분명 요긴하게 쓸만한 물건입니다.
개인적인 바램으론 컴퓨터 청소에 맞춰 모터 출력과 덩치를 줄인 송풍기가 나와도 괜찮을 듯 합니다. 26000원도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저렴한 모델이 나온다면 먼지청소용 압축 공기 캔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 듯.
나중엔 머리 식히는 용도로 쓰실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