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3D 게임이 있습니다. 키보드를 누르고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이 바뀌면, GPU가 변화하는 그래픽을 그려 화면에 출력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GPU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연산 절차도 복잡하지만, GPU까지 데이터가 전달되는 과정만 따져도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3D 게임이나 애플리케이션은 그래픽카드 같은 하드웨어를 직접 조작하지 않습니다. GPU를 직접 실행하는 건 그래픽카드 드라이버의 몫이고, 드라이버에서 원하는 기능을 구동하는 건 3D 그래픽 API 라이브러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3D 애플리케이션->그래픽 API->드라이버->GPU의 순으로 연산 명령이 전달된다는 소리죠.

 

 

위에서 늘어놓은 말이 어렵다고 느끼실 분도 있을텐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 접하던 단어가 아니라서 생소할 뿐이지, 결코 어려운 단어는 아닙니다. 하나하나 짚어보죠. 그래픽카드 드라이버가 뭔지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시죠? 3D 그래픽 API도 마찬가지입니다. 3D 그래픽 API라고 하니까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다이렉트 X는 다들 알고 계시잖아요? 다이렉트 X에서 3D 연산을 맡은 부분이 다이렉트 3D이며, 다이렉트 3D는 가장 대표적인 3D 그래픽 API입니다. 3D 애플리케이션이 보낸 명령을 해석해서 그래픽 드라이버에 전달하고, 새로운 3D 기능을 보다 편리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PC 게임에서는 다이렉트 X의 인지도가 워낙 높아서 다른 API의 존재를 모르는 분들도 제법 있겠지만, 3D 그래픽 API가 다이렉트 3D만 있는 건 아닙니다. 다이렉트 3D를 제외하고 현재 가장 유력한 API라면 불칸(Vulkan)이 있습니다. 오픈소스 표준 API를 만들던 크로노스 크룹이 오픈GL 이후 새로 내놓은 그래픽 API로, 원래 AMD가 개발했던 맨틀 API의 핵심 요소를 많이 이어받았습니다. 2015년에 처음으로 등장해 https://gigglehd.com/zbxe/12651925 2018년에는 버전 1.1 https://gigglehd.com/gg/2541433 올해 초에는 버전 1.2 https://gigglehd.com/gg/6449990 까지 발전해온 3D 그래픽 API입니다. 

 

 

다이렉트 X가 있는데 불칸이 등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성능입니다. 위에서 3D 애플리케이션의 명령은 다이렉트 X 같은 API와 그래픽 드라이버를 거쳐서 하드웨어에 명령을 보낸다고 했는데요. 그래픽 처리에 필요한 전체 시간 중에서 API와 드라이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픽 연산에 등장하는 수많은 오브젝트마다 이런 오버헤드가 따라 붙거든요. 이 과정을 효율적으로 처리해서 여기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면 사용자가 체감하는 성능은 더 늘어나겠지요. 다이렉트 X 10의 가장 큰 변화도 이것입니다. 다이렉트 X 10에선 오브젝트를 자동으로 드라이버에 대입해 이 시간을 줄였습니다. 

 

 

불칸은 그보다 더 영리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픽 API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GPU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애플리케이션에 많은 부분을 개방했습니다. 중간 과정이 대폭 줄어들면서 하드웨어에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처리한다고 해서 로우레벨 API(Low level API)라고도 부릅니다. 따지고 보면 불칸의 로우레벨 API의 도입은 AMD 맨틀이 적잖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으며, 경쟁 상대인 다이렉트 X도 최신 버전인 다이렉트 X 12부터 로우레벨 API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코어에서 작업을 전부 처리하는게 아니라 모든 코어에 나누고 마지막에 모으는 구조 덕분에 멀티스레드 효율도 높습니다. 

 

 

그리고 범용성이 있습니다. 다이렉트 X는 윈도우에서만 사용합니다. 하지만 불칸은 윈도우, 리눅스, macOS, 안드로이드 등의 다양한 환경에서 지원합니다. 윈도우 환경으로만 게임을 출시한다면 모르겠으나, 개발 단계부터 여러 플랫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갈수록 게임 시장에서 모바일 플랫폼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모바일이나 PC로 먼저 출시된 게임을 다른 플랫폼으로 출시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CPU 코어 수가 늘어나고 모바일 플랫폼이 더욱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이들 모두에 유리한 불칸은 게임 개발자들이 한번 쯤은 고려해볼만한 선택임에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다 이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불칸이 우수한 잠재력을 지닌 것과, 불칸을 써서 게임을 개발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불칸을 최대한 활용해서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 내려면 불칸을 잘 이해하는 게임 개발자가 필요합니다. 하드웨어에 근접한 로우레벨 API라는 말은 그 만큼 하드웨어의 구조에 능통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드웨어적인 차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수많은 그래픽 아키텍처 중에는 불칸을 좀 더 효율적으로 실행하기에 적합한 구조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알아보냐고요? 어렵진 않고 조금 귀찮은 방법이 있습니다. 벤치마크에서 비교하면 되지요.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불칸을 지원하는 게임입니다. 불칸을 지원하는 게임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나 그걸 다 벤치마크에 쓰진 못하죠. 생전 처음 보는 게임으로 벤치마크를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의 인지도가 있는 게임 중에서, 내장 벤치마크가 있어 개관적으로 비교하기가 편리한 걸로 골랐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레인보우 식스 시즈, 레드 데드 리뎀션 2, 월드 워 Z, 애쉬즈 오브 더 싱귤러래티: 에스컬레이션, 스트레인지 브리게이드입니다. 이들 게임은 실행하기 전에 불칸이나 다이렉트 X 중에서 하나를 고르거나, 내부 옵션에서 그래픽 API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테스트 환경은 그래픽카드지요. AMD에선 애즈락의 라데온 RX 5600 XT 팬텀 게이밍 D3 6G OC를, NVIDIA는 지포스 RTX 2060를 테스트에 사용했습니다. 드라이버는 현재 최신 버전인 라데온 아드레날린 2020 에디션 20.1.3, 지포스 게임 레디 드라이버 442.19입니다. 그 외 다른 테스트 환경은 아래에 나온대로입니다.

 

AMD 라이젠 7 3700X https://gigglehd.com/gg/5201526

MSI MEG X570 갓라이크 메인보드 https://gigglehd.com/gg/5201838

BYKSKI B-FRD 360 RBW 수냉 쿨러 https://gigglehd.com/gg/5761047

파워는 시소닉 PRIME 1300 Platinum SSR-1300PD Full Modular

그 외에 DDR4-3200 8GB x2 메모리, 윈도우 10 1909입니다. 

 

 

GPU-Z 스크린샷. 서로 다른 회사와 아키텍처를 지닌 제품이니, 작동 클럭 정도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레인보우 식스 시즈의 결과입니다. 1920x1080 해상도에서는 다이렉트 X에서 불칸으로 오면서 성능이 늘어나긴 고사하고 오히려 떨어졌는데요. 1920x1080 해상도에서 프레임이 워낙 높아서 더 크게 오를만한 여지가 없어서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2560x1440 해상도에서는 라데온 RX 5600 XT는 미세하게 올랐으니 지포스 RTX 2060은 아예 성능이 떨어졌고, 3840x2160에서는 지포스 RTX 2060의 성능 하락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불칸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려면 게임 개발자가 불칸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레인보우 식스: 시즈가 딱 거기에 속합니다. 지포스라면 불칸을 절대로 써선 안 되고, 라데온 사용자라면 고해상도에서 불칸을 써도 손해는 아니겠네요.

 

 

 

 

 

레드 데드 리뎀션 2입니다. 비디오 메모리를 워낙 많이 차지하는 게임이라 매우 높음에 모든 옵션을 다 켜면 1920x1080 해상도까지만 설정할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선 두쪽 모두 성능 향상 효과가 있습니다. 0.1% Low에선 지포스 RTX 2060이 엄청나게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표현 방식의 한계입니다. 프레임으로 따지면 4프레임에서 6.6프레임이 된거라서요. 그러니 65%가 오른 건 맞지만 실제 프레임의 변화는 크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요구 스펙이 꽤 높은 편이고 두 카드가 비슷한 성능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평균 프레임의 상승폭이나 전반적인 성능 향상 효과를 따져보면 라데온 RX 5600 XT가 조금 더 높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이보다 더 높은 등급의 그래픽카드에선 차이가 더 벌어질 수도 있겠죠.

 

 

월드 워 Z입니다. 여기서부터 불칸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불칸을 좋아하는 에픽의 입김이 많이 닿은 게임이라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특히 라데온 RX 5600 XT의 효과가 큽니다. 성능 향상이 가장 컸던 1920x1080 해상도의 경우 라데온 RX 5600 XT는 평균 프레임이 19% 가까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최소 프레임과 1% Low도 올랐고요. 해상도를 올리면 상승폭이 줄어들지만 그래도 불칸의 효과는 있습니다. 지포스 RTX 2060은 라데온 RX 5600 XT 수준까진 아니지만 고해상도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효과는 볼 수 있습니다. 불칸을 켜서 크게 손해볼 건 없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애쉬즈 오브 더 싱귤러래티: 에스컬레이션입니다. 벤치마크로 애용하는 게임이지요. 이쪽의 결과도 레인보우 식스: 시즈와 비슷합니다. 라데온 쪽은 조금씩이라도 성능이 오르는데 지포스는 평균 프레임이 꽤 떨어집니다. 1920x1080 해상도에선 라데온 RX 5600 XT의 최소/1% Low/0.1% Low의 상승 효과가 두드러집니다. 불칸이 최저 프레임을 끌어 올려 게임에서 부드러운 프레임을 체감한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있었는데, 게임에 따라서는 정말 그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인지 브리게이드입니다. 불칸의 효과가 상당히 크며, 고해상도로 갈수록 두드러집니다. 라데온과 지포스 모두 평균 프레임과 최소 프레임이 많이 올랐습니다. 평균 프레임의 경우 저해상도에서는 비슷하게 오르다가 4K 같은 고해상도에서는 라데온과 지포스 사이에서 차이가 크게 납니다. 둘 다 평균 프레임 60프레임 사수가 가능한 수준까지 올랐으나, 라데온 RX 5600 XT 쪽이 더 여유가 있습니다. 변화 폭 그래프에서 0.1% Low가 아주 많이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봤자 1프레임 차이입니다. 워낙 숫자가 작다보니 조금만 바뀌어도 그래프는 크게 나오네요. 

 

 

 

 

 

 

불칸이 만능은 아닙니다. 하지만 불칸을 지원하는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프레임 상승 효과가 분명 있습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방법도 아니고 화질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기본값이라서 별 생각 없이 다이렉트 X를 사용했던 분들이라면 불칸으로 바꿔 보세요. 게임 옵션의 변경만으로 프레임이 상승한다면 사용자 입장에서 불칸을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불칸이 우수한 범용성을 지닌 API인 만큼, 앞으로 더 많은 게임에서 불칸을 제공하리라 기대해볼만 합니다.

 

 

그리고 같은 환경이라면 지포스보다는 라데온의 효과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죠. AMD가 불칸에 큰 영향을 준 맨틀의 개발을 주도했고, GPU 아키텍처의 차이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줄 겁니다. 이런 사정이야 어찌됐건, 라데온은 불칸을 통해 경쟁 상대보다 더 큰 성능 향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불칸을 지원하는 게임을 위해 그래픽카드를 새로 구입하겠다면, 불칸을 적용했을 때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라데온을 선호하게 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