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아이패드 프로 4세대를 받았습니다. 11인치 Wi-Fi 128GB 모델입니다.
A12X와 사실상 동일한 칩셋에 그래픽 코어만 하나 살려놓은 A12Z, 똑같이 휨에 약한 폼팩터, 똑같은 액정과 똑같은 배터리를 탑재한 토사구패드로 논란이 된 그 녀석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2년 전 프로 2세대를 사용할 때 4GB 램에서 아쉬움을 좀 느꼈던지라 6GB 램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기본 용량이 드디어 128GB로 늘어난 점이 맘에 들었으며, 또 지금 당장 아이패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별 고민없이 국내 출시 첫날에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이틀 동안 대략적으로 느낀 점을 적어보려 합니다. 두어달 쯤 사용하고 나면 더 상세한 사용기를 올려보겠습니다.
언박싱 사진을 못 찍었는데, 택배 상자 안쪽이 비닐로 꽤 뜯기 어렵게 감싸져 있더라구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코로나19 영향으로 외부와 차단하는 비닐을 추가한 건가 싶습니다. 안쪽은 보통의 애플 상자 그대로였고, 화살표 따라 비닐 뜯는 맛이 좋았습니다. 노치 때문인지 XS 때부터 검은 기본 배경을 쓰는 아이폰과는 달리, 베젤도 얇고 노치나 홀도 없어서 아주 컬러풀한 배경화면이 박스에 프린팅되어 있습니다. 아, 그리고 휨 이슈 때문에 걱정했는데 양품이 온 거 같아요. 빌드 퀄리티가 아주 좋습니다.
전원을 켠 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디스플레이겠죠. 사실 아이패드 액정 좋다는 말은 이제 좀 식상합니다만, 막상 받아보니 정말 좋긴 좋네요. P3 와이드 컬러, 264ppi, 120Hz 프로모션 가변 주사율, 정확한 색상과 색온도, LCD 중 최고 수준의 명암비, 훌륭한 색 균일도와 저반사 코팅 등 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프로모션은.... 이거 쓴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제 아이폰 스크롤이 끊겨 보여요. 연말에 프로모션 지원하는 아이폰 12 프로가 나오면 못 참고 질러버릴 것 같습니다. 마치 마약과도 같으니 돈을 아껴야 하는 분들은 실물을 구경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애플의 '프로' 기기에서 트루톤을 디스플레이의 메인 장점 중 하나로 홍보하는 건 이해가 안 가요. 아이폰이나 그냥 아이패드에서야 뭐 좋죠. 주변 조명에 맞춰주니 눈도 덜 아프고 컨텐츠도 더 잘 보이고. 그런데 '프로'를 표방한 기기들은 기본적으로 컨텐츠 생산, 혹은 적어도 정확한 감상이 가능해야 하는데 트루톤을 켜면 색온도가 제 멋대로 변해버립니다. 특히 몇 달 전에 나온 XDR 모니터에서도 트루톤을 광고하는 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색온도가 제 멋대로 변하는 700만원짜리 모니터라....흠. 아이패드와 맥북에서는 항상 끄고 쓰는 기능이에요. 다만 그림을 그리거나 영상편집을 하는 등의 용도가 아니라면 켜고 쓰는 것도 충분히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스피커도 정말 좋습니다. 원래 아이패드 프로 라인업이 스피커가 좋긴 하지만 기대 이상입니다.... 웬만한 중저가 노트북 스피커도 씹어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프로 2세대 쓸 때도 스피커가 상당히 괜찮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그보다도 훨씬 더 좋아졌네요.
FaceID는 처음 써보는데, 진짜 빠르네요. 저는 원래 TouchID 를 선호하는 입장이었는데, 진짜 훨씬 빨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웹서핑 중 로그인 할 때는 최고인 거 같아요. 그냥 밑에 뜨는 키체인 버튼 누르고 1초만 있으면 로그인이 되네요. TouchID 사용할 때는 키체인에서도 홈버튼에 손가락을 대는 단계가 하나 더 있지만, 이건 그냥 키체인 사용을 누르는 순간 로그인이 된다는 느낌입니다. 위에 잠금화면을 찍은 동영상을 보면 자물쇠 해제되는 모션이 안 보이는데, 액정이 켜지면서 카메라가 노출값을 다시 잡는 시간보다 잠금해제가 더 빨라서, 하얗게 빛이 번질 때 잠금해제가 이미 끝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잠금화면에서 언락은 조금 불편합니다. 아이패드 화면을 항상 정면에 가깝게 쳐다보고 있진 않으니까요. 사실 이걸 왜 맥북에 아직도 안 넣어줬나 궁금할 정도로, 태블릿보다는 랩탑에 딱인 기능이라고 생각해요.
엑스레이 분석 결과 A12X와 정확히 같은 칩이라고 이미 판명이 났는데, 성능을 굳이 자세하게 측정해볼 필요는 없겠죠. 그냥 긱벤치5 깔고 아무 세팅 없이 한 번 돌려본 후 바로 삭제했습니다. A13 Bionic 대비 싱글은 조금 딸리고 멀티는 압도합니다. 그래픽 성능은 A12X에 비해 딱 7~8퍼센트만 향상됐네요. 램은 알려진 대로 6GB로 증가했고, 긱벤치 상에서는 아직 등록이 안 된 모양인지 A12Z라고 뜨진 않습니다.
스케치는 새로 산 4세대에서, 아래 인물 페인팅은 예전 2세대에서 그렸습니다. 4세대는 이틀째라 아직 제대로 그림을 그려보진 않았네요.
그림 도구로써는, 정말 너무 좋네요. 제가 써본 디지털 페인팅 툴 중에 이 정도의 만족감을 주는 기기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인튜어스5와 신티크 16 프로도 써봤는데, 그건 PC와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의 우월함 때문에 쓰는 거지 사실 일체감이나 편의성 부분에서 아이패드 프로랑 비교가 안 됩니다. 기기 자체의 마감이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구요. 특히 언제든 꺼내서, 기본 탑재된 메모 앱만 써도 상당히 훌륭한 드로잉이 가능하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애플 펜슬의 필압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256레벨 혹은 512레벨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512레벨이라고 가정해도 와콤 현세대 라인업들의 8192 레벨에 비하면 1/16 수준의 필압감지 능력인데, 놀라운 반응속도와 훌륭한 팜 리젝션/손가락 인식 간의 전환, 세심한 기울기 인식으로 오히려 실사용 시에 와콤보다 나은 느낌마저 전해줍니다. 여러 와콤 기기와 아이패드 프로를 써 보면서 느낀 게, 하드웨어의 필압 레벨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OS와 프로그램에서 그 필압을 얼마만큼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는지, 그리고 필압 인식이 기울기 인식, 라인 보정, 소프트웨어적 터치 예측 등과 함께 어울려 얼마나 부드러운 그리기 경험을 제공하는지가 더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다만 정밀하게 페인팅을 할 때 가끔씩 필압이 아주 정밀하지는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이 부분은 물리적 필압 레벨 자체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새로 나온 아이패드 프로용 매직 키보드나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를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집에 있는 매직 키보드를 쓰기로 했습니다. 네, 새로 나온 녀석 말고 원래 있던 그 알루미늄으로 된 키보드요. 아이패드용 매직 키보드는 무게와 기능성이 맘에 안 들고,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는 직접 받아보니 마감 관리가 엉망이라는 인상을 받아서 하루만에 환불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스마트 폴리오와 맥용 매직 키보드 조합으로 쓰려구요.. 매직 키보드야 뭐 펜타그래프 중에서 워낙 뛰어난 기기라서 키감이나 연결성, 사이즈, 무게, 디자인 등에는 별 불만이 없는데, iPadOS의 시스템에 불만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상단 기능키 중 F3이랑 F4가 안 먹어요. 밝기 조절이나 재생, 음량 조절은 먹는데 저 둘만 안 됩니다. F3과 F4는 macOS에서는 각각 미션 컨트롤과 런치패드 키입니다. iPadOS에서는 멀티태스킹 창과 홈 화면(스프링보드)에 정확히 대응하는 기능인데, 전혀 기능이 할당되어 있지 않습니다. 홈 단축키는 Cmd + H를 사용해야 하고, 멀티태스킹 창은 아예 단축키가 없는 대신 Cmd + Tab으로 앱 간 전환이 가능합니다만 그래도 아쉽긴 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고쳐줬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로는 한/영 전환 이후 대문자 전환이 느립니다. 영어로 전환 이후 Shift 키를 눌러 대문자를 쓰려고 하면 1초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전환 직후 바로 Shift를 누르거나, 미리 눌러두고 입력하면 인식을 못하고 소문자가 나와요. 맥에서는 전혀 그런 증상이 없었던 걸로 봐서 iPadOS의 문제인데, iPadOS 기본 설정과 달리 한/영 키가 Caps Lock에 배정되어서 생긴 문제인 거 같기도 합니다. 상당히 불편한데, 서드파티라면 모를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통합을 강조하는 애플의 자사 키보드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좀 당황스럽습니다.
카메라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죠. 음.... 일단 외관은, 생각보다 그렇게 보기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게 빛에 따라서 좀 다른데, 일단 튀어나온 카메라 부분의 색상이 완전 블랙이 아니에요. 주변 알루미늄과 비슷한 스페이스 그레이 톤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물론 반사율도 다르고 유리에는 폴리싱도 되어있는 만큼 강한 빛 아래에 가면 좀 거슬리긴 하는데, 일상적인 빛 아래에서는 생각보다 막 거슬리진 않아요. 몸체와 색상을 잘 맞춰서 재질 차이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 일체감을 끌어낸 거 같습니다. 실버 모델에서는 좀 눈에 띌 거 같기는 하네요.
카메라 성능은 아직 잘 안 써봐서 모르겠는데, 솔직히 초광각 카메라는 AR 대중화 이전에는 아무 쓸모도 없을 거 같아요. 이걸 들고 다니면서 엄청나게 넓은 화각의 사진을 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AR을 밀어주려는 애플의 의도는 알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왕 렌즈 하나 추가할거면 괜찮은 망원 카메라나 하나 더 넣어주지, 라는 생각이 들어요. 라이다 센서는 성능이 꽤 준수합니다. 제가 사용해 본 모바일 AR 기기 중 가장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근데 AR 자체가 좀 제 맘에 안 들고 활용하는 앱도 많지 않아서, 아직은 쓸모를 모르겠습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제게 아주 좋은 첫인상을 주었습니다. 첫인상으로 100점 만점에 85점 정도를 줄 수 있을 거 같고, 프로 2세대를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최고의 태블릿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모든 태블릿 PC를 사용해 본 건 아니지만, 아이패드 프로는 그 타이틀을 받기에 충분하죠. 현존 모바일 칩셋 중 최고의 성능, 만족스러운 디스플레이, 훌륭한 애플 펜슬의 필기감, 얇고 미래적인 디자인, 빌드 퀄리티, 미친 듯 빠른 FaceID, 그리고 다른 애플 기기들과의 연동. 물론 iPadOS가 이 멋진 하드웨어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아이패드에는 이런 OS가 찰떡입니다. 여기 macOS 넣어 봤자 사용성 엉망 될 게 뻔해요. 차라리 여기서 프로 앱들 출시되고, 애플이 막았던 기능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고 봐요. 게다가 이젠 나름 괜찮은 수준의 마우스 지원과 USB-C 포트를 통한 외장 메모리 접근도 지원합니다. 제약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 부분은 앞으로 사용해 보면서 얼마나 불편할지, 또 2017년의 아이패드 프로 2세대와 비교해 얼마나 극복됐을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굳이 이 기기에서 단점을 꼽자면, 그건 iPadOS에서 나오는 제약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이패드의 뛰어난 하드웨어가 장점이자 단점이 될 거 같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면요, 아이패드라는 기기 자체가 너무 미려해요. '프로'용 기기로 사용하려면, 그보다는 좀 더 투박한 맛이 있는 게 낫습니다. 아이패드 프로에는 원할 때 아무렇게나 휙휙 꺼내서 그림 그리다가, 다 쓰면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자리를 옮겨야 하면 가방에 툭 던져 넣거나 맨손에 들고 나가서 쓰는, 그런 워크호스같은 느낌이 없어요. 항상 곱고, 얇고, 날렵하고, 정갈해야 할 것 같은 기기입니다. 제가 지켜줘야 할 거 같고, 떄 타거나 흠집이 생기면 큰일이라도 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애플 펜슬로 스케치를 한 시간 정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이거 보호필름을 사야 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밴드게이트로 알려진 휨 이슈도 그런 생각을 한층 더해주죠. 물론 그렇다고 투박하고 두꺼운 케이스로 아이패드를 완전무장시켜 강제로 '거친 녀석'으로 만들어버릴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저는 얇고 가볍고 아름다운 아이패드가 좋으니까요. 다만 그 장점이, 도리어 사용자가 떠받들어야 하는 기기라는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2일째 치고는 좀 긴 사용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