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사랑에는 이별이 있지만, 우정은 영원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마저 세월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그 형태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해왔던 랩톱의 내장된 키보드가 그 오랜 시간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TAB, Q, W, D 이 4개의 키가 인식되지 않고 전혀 영원하길 원하지 않았던 침묵만을 보였습니다.
| 침묵의 이유가 고용주의 임의분해라는 비인도적인 행동에 기반을 뒀다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리게 된 키보드는 그저 키보드만 고장 나 컴퓨터의 역할에는 현재로서 현역이라고 주장하며 복직을 요구하는 랩톱을 위해 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채용한 새로운 친구입니다. 어차피 이 친구 외에 다른 동료라고는 근속 10년을 바라보며 캐퍼시터 폭발 사고로 본래의 그래픽 카드를 잃고 구형 카드로 연명 중인 데스크톱밖에 없으니 새 키보드가 순직한 기존 내장 키보드를 대체하기에 손색없는 제품인지 지금부터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2. 제품 소개
이 키보드의 이름은 'IRIS-210'입니다. 삼성물산 상사부문에 속해있는 PC 및 모바일 주변기기를 판매하는 PLEOMAX에서 중국 하도급으로 만든 게이밍 키보드입니다. 물론 삼성물산이라고 해서 사후지원하면 떠오르는 그 삼성을 생각하시면 곤란한 것이 전국 곳곳에 존재하는 삼성 서비스 센터가 아닌 이오피스코리아가 사후관리를 맡고 있고 오직 용산에만 센터가 존재하니 지방에서는 택배를 부쳐야 하므로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나저나 장미랑은 연관성 있어 보이는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왜 IRIS라는 이름이 쓰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품 이름 외우기도 편하고 이름을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니 키보드에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봐야 억울하게 상처 주는 일이므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1> 다나와 키보드 카테고리: 비키 스타일, 스텝스 컬처 2, 이중 사출 키캡을 선택, 낮은 가격순 정렬.
이번에 키보드를 눈여겨보면서 알게 된 것이 비키 스타일, 스텝스 컬처 2, 이중 사출 키캡 이 삼총사를 단돈 만 원이면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먼지 청소도 쉬워지고 손가락 건강에도 좋고 글자 지워질 걱정도 없는 이 모든 게 세종대왕님 한 분이면 되는 겁니다. 아! 배송비는 별도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 지는 좀 되었겠습니다만, 본디 사람은 본인에게 필요하지 않으면 먼저 관심을 두기 어려운 법이니 그러려니 넘어가 주는 관용을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맞수라 할 수 있는 현대글로비스 산하 INOGRAB의 제품도 보이는군요. 그런데 보아하니 똑같은 모양에 로고만 다른 제품들이 많은 것이 아무래도 한 회사에서 같은 설계로 주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양산하는 제품인 것 같습니다.
IRIS-210의 접점은 흔한 멤브레인입니다. 요즘은 기계식도 대륙의 기상을 발단으로 보급형 제품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는 좋은 세상이지만, 현재 제게는 저소음 환경과 신뢰성 있는 단순한 구조가 필요한 상황이고 아직은 웃돈을 주고서야 만나볼 수 있는 저소음 적축 키보드나 인제야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광축 키보드를 제외한다면 자본주의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서민에게 있어 멤브레인만큼 친숙하고 좋은 가격의 선택지는 없을 겁니다. 팬터그래프는 전례가 있듯 부셔 먹을까 봐 겁이 났고 플런저는 혹자 왈 "기계식의 청각과 멤브레인의 촉각의 만남"이라기에 여기에 도박을 걸 수는 없다고 판단해 안전한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키보드는 유/무선을 모두 지원하면 좋겠지만 비싸며, 무선은 유지비가 들어가기에 이 악명 높은 구두쇠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유선밖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나름 노이즈 필터까지 갖춰 유선 키보드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특징들은 모두 가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거기에 요즘 대세라는 생활방수도 들어갔으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물고문하던 시절처럼 도무지 답도 안 나오게 악의를 가지고서 부어대지 않고서야 물 잔이나 찻잔에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3. 개봉기
<사진 2> 제품 상자 외부
상자에 노란 딱지는 무엇인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텐데 컴퓨존에서 제품을 구매하시면 저런 스티커를 하나 붙여줍니다. 아마도 컴퓨존 측에서 분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QR코드와 제품 정보가 작성되어 있습니다. 임의로 삭제한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진 3> 제품 상자 측면
상자가 쉽게 열리지 않도록 저렇게 이중으로 잠겨지는 상자를 사용합니다. 덕분에 이런 것에 손재주가 별로였던 필자로서는 소소한 곤욕을 치렀습니다만, 그렇다고 배송 중에 아무 힘 없이 열려서 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사진 3> 제품 상자 내부
내부에는 저렇게 스티로폼과 비슷한 질감이 느껴지는 얇은 포장지 하나가 제품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배송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긁힘 등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따로 스티로폼이나 에어캡 포장은 없는 것이 아연 판금 프레임이라 휘거나 쉽게 부서질 걱정이 없다는 걸 과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덕분에 무게는 880g이 되었습니다.
<사진 4> IRIS-210 실물
사실 이쯤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아직은 제가 사진 촬영하는 실력이 영 형편없습니다. 반듯하게 촬영할 수 있었음에도 다시 확인해보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나태는 이런 실수들을 연이어 만들어냅니다. 키는 표준 104 키이며 Fn 글자가 보이듯이 펑션 키가 존재해 이를 통해 멀티미디어 동작이나 윈도 키 잠금, 백라이트 밝기 조정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엔터키가 독특하게도 ㄱ자입니다. 글자가 선명하지 않고 글씨체가 손글씨처럼 둥글둥글한 점이 눈에 띕니다.
<사진 5> 비키 스타일
키보드를 자세히 보시면 키캡이 버섯처럼 솟아올라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비키 스타일입니다. 저런 구조 덕분에 키보드 사이의 틈새로 먼지가 들어가 키보드 내부 기판으로까지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마감이 깔끔하지 못한지 오돌토돌한 키가 일부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진처럼 눈에 보이는 바깥 부분은 괜찮지만 보이지 않는 안쪽은 도색이 덜 된 듯한 부분들이 보입니다. LED를 위함일까요?
<사진 6> 스텝스 컬처 2
키보드 측면에서 보실 수 있듯이 저렇게 안쪽으로 살짝 휘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스텝스 컬처라고 부릅니다. 키마다 높이를 달리해 마치 계단처럼 만들어서 스텝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본래 처음엔 스텝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인체공학적인 구조로 손가락 피로도를 줄이고자 한 것입니다만, 손가락 피로를 줄이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역시나 휴식입니다. 손가락도 근로 시간을 준수해주지 않으면 파업합니다. 아쉽게도 사진에 보이는 저 힌지는 높이 조절이 불가능한 고정된 받침대에 불과합니다.
4. 사용기
게이밍 키보드라고 하였지만, 으레 게이밍 제품이라면 가지고 있는 매크로 기능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무용 키보드라고 하기에는 잡다한 기능들이 많이 있으니 염가형 게이밍 키보드 정도로 쳐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기에 게임에 주로 쓰는 WASD나 방향키와 같은 특정한 키들은 19키 동시 입력이 가능하니 웬만해서는 동시 입력 문제가 발생할 일이 없습니다. 솔직히 손가락보다 많잖습니까? 키보드 하나로 2인용 게임을 한다 해도 서로 손이 꼬일지언정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 키보드는 별도의 설명서가 없습니다. 그 덕분에 펑션 키 사용법을 위해 PLEOMAX 홈페이지의 광고 사진을 다시금 열어봐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하나하나 눌러보면 알지만 WASD와 방향키를 서로 전환하는 펑션 키 + W 키 조합은 정말로 홍보 사진을 안 보면 모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키마다 키압이 살짝 균일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특히 W 키가 약한 것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습니다. 우측 Shift 키도 약하면서 시끄러운 편이며 반대로 백스페이스나 체리식 스태빌라이저가 적용된 스페이스 바는 탄탄합니다.
<사진 7> LED 백라이트
이 키보드에는 LED 백라이트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파랑, 빨강, 보라 총 3가지로 선택할 수 있고 펑션 키와 조명 키를 같이 누르면 숨쉬기라고 해서 색상 순서대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합니다. 색상별로 3단계의 밝기 조정이 가능합니다. 다만 보라색이 실질적으로는 자홍(Magenta)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LED가 빨강과 파랑 2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감은 빨강과 파랑이 만나면 보라색이 되지만 광원은 빨강과 파랑이 만나면 자홍이 되니까요. RGB 중 G, 그러니까 녹색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쉬운 점은 NumLock, CapsLock 표시등은 파랑뿐입니다. 거기다 따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지 않기 때문인지 컴퓨터를 켤 때마다 키보드의 LED 색이 내가 정한 마지막 색이 아닌 파랑 최대 밝기 기본 설정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쉽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ABS 재질이라고 하지만 뭔가 손의 기름이 묻기 쉬울 것 같은 저렴한 질감을 보입니다. 삼성제 번들 키보드 같은 물건은 ABS치고는 정말 잘 만든 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5. 결론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마감이 깔끔하지 못하고 아쉬운 점들로 가득한 물건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키보드의 가격은 단돈 1만 원 이내. 사실상 이 가격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들어갔으며 키보드 본연의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기능들도 사용자에 친화적인 부분이 떨어지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제품 하자도 없습니다.
저로서는 이 정도면 가격 대비 만족스러운 물건입니다. 무엇보다 Tab, Q, W, D를 아예 누르지도 못하던 과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IRIS-210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만일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를 찾으신다면 키보드 특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기대감을 인지하고 있으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일생을 살아오며 대적해오던 지루함이라는 강적을 이 누추한 글에서조차 또 맞서 싸워야만 했던 피할 수 있는 운명을 짊어지고 두서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