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후지필름 X100을 서브 카메라로 들였습니다. 카메라 들고 돌아다닐 시간도 없고,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올해 봄에 결국 팔아버렸는데, 제가 샀을 때부터 중고 시세가 더 올랐더군요. 전 그걸 모르고 샀던 가격 그대로 내놓아서 되팔이의 배나 불려줬지만요.
후지필름 X100 자체는 나온지도 5년이 넘은 물건이라 스펙이나 성능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스펙은 넘어가고, '구입 전에 생각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지', '왜 아직도 인기가 나쁘지 않은지'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카메라 스펙을 모르면 혼이 없고, 사진이 비정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스펙은 넘어가겠다고 했지만, 왜 X100을 샀는지 구구절절이 구차한 이유를 대자면 스펙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묵직한 DSLR을 들고 다니긴 귀찮고, 폰카의 화질에는 다소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을 때, DSLR보다는 작아서 갖고 다니기가 그나마 낮고, 화질에선 APS-C 포맷의 1230만 화소 센서와 후지논 렌즈로 크게 꿀리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 X100에 눈이 돌아갔지요.
거기에 개인적으로는 광각, 그것도 최소 촬영 거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바싹 붙여서 찍는 걸 좋아하는데요. 후지필름의 23mm 렌즈는 35mm로 환산하면 35mm. 아주 광각까진 아니어도 스냅 촬영에는 이보다 더 좋은 화각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고, 최소 촬영 거리도 매크로 모드에서 10cm니 바싹 붙여 쓰기에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조리개도 F2니 심도 표현하기도 괜찮을 것 같고.
부족한 것도 있습니다. 워낙 예전 모델이니 동영상 기능을 기대할 순 없고, 연사나 셔터스피드는 평이한 수준이지요. 2.8인치 스크린이 46만 화소니 고급형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이며, 배터리 사용 수명도 썩 긴 편은 아닙니다. 대신 하이브리드 뷰파인더가 있어 DSLR처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촬영할 수 있다는 점과, 평가가 좋은 후지필름의 색감이나 화이트밸런스 같은 장점도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카메라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다는 겁니다. 바로 매뉴얼 정독하기. 매뉴얼은 제조사 홈페이지를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이것만 읽어봐도 겉으로 드러난 스펙 뒤에 감춰진 진짜 성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거든요. 특히나 X100은 후지필름 X 시리즈 라인업의 초기 모델이다보니, 완성도나 구현에서 의외로 부족한 부분이 은근히 드러나게 되더군요.
내가 이럴려고 X100 샀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X100의 접사 테스트. 벽돌을 접사로 촬영했습니다. 접사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AF 모터는 징징거리고 초점은 오락가락하고 결정적으로 OVF를 쓰지 못합니다.
저는 펜탁스 K200D로 DSLR에 입문했습니다. 그래서 형편없는 AF에는 상당한 내성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펜탁스만 AF가 별로인 것도 아닙니다. 소니 A7을 처음으로 만져봤을 때, 소니는 이걸 지금 쓰라고 내놓은 건가 속으로 비웃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후지필름 X100을 잡아보고 나서 소니 A7을 폄하한게 정말 미안해지데요. 단언하건데 후지필름 X100의 가장 큰 문제는 AF입니다.
그나마 꾸준한 펌웨어 업데이트로 AF 성능을 높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별로입니다. AF를 논할 때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AF를 판별하는 검출 능력, 그리고 원하는 위치까지 빠르고 조용하게 렌즈를 움직이는 모터 성능을 모두 따져보게 되는데, 이 두가지가 모두 형편없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버벅거리고, 또 위치를 포착했다 해도 거기까지 움직이는 시간이 상당히 걸립니다.
모 일본 카메라 잡지에서 한 일본 사진작가가 X100을 가지고 스냅사진 찍기에 최고의 카메라라고 찬사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스냅 사진을 전부 MF로 찍는건가 생각이 들 정도더군요. 스냅이라면 셔터 찬스를 빠르고 정확하게 포착할 AF 성능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X100은 그런 순발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카메라가 아닐까 싶네요.
물론 X100의 출시 시점을 간과할 순 없습니다. 첫 선을 보인 게 2010년이고, 이후로 꾸준히 펌웨어 업데이트가 됐다고는 하나 오래된 카메라임은 분명하지요. 허나 오래됐어도 쓸만한 카메라와, 오래되서 한계가 있는 카메라는 분명 다르지 않을까요. 요새 현역으로 쓰이는 카메라와 비교했을 때 X100의 AF 성능은 분명 실망스럽습니다. X100S나 X100T 같은 후속 기종도 그래서 나온 거지만요.
하나 더. 꼴에 DSLR로 사진을 시작했다고,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쳐다봐야 사진을 찍는 맛이 난다는 마인드를 아직 버리지 못한지라, OVF는 물론이고 EVF까지 갖춘 하이브리드 뷰파인더는 X100을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인데, RF 특유의 오차라던가 영 부족한 EVF 성능은 이해한다 칩시다. 애시당초 EVF는 기대 안했으니 OVF만 잘되면 되니까요. 근데 그게 아니더군요.
EVF를 안 쓰면 장땡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X100은 평소 최소 촬영 거리가 무려 80cm입니다. 아니 50mm 표준 렌즈도 45cm인 마당에 80cm에요. X100을 스냅용이라 부르기가 힘들다고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최소 촬영거리이기도 합니다. 뭐 하나 찍을라 치면 1m 정도 거리를 두고 찍어야 한다는 소리죠.
다행인 건 매크로 모드에서 최소 촬영 거리가 10cm까지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럼 매크로 모드 놓고 쓰면 되겠구만 뭐가 문제냐구요? 매크로 모드에선 AF 속도가 느려지고, 그보다 더 큰 건 매크로 모드에서 하이브리드 뷰파인더가 EVF로 고정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OVF로 매크로를 찍을려고 샀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매크로에선 그 구린 EVF를 강제로 써야 하는데다 AF도 별로더라.
하는 김에 LCD도 지적해 봅시다. 2.8인치 스크린이니 크기는 합격. 그런데 화소 수가 46만 밖에 안되요. 이것 역시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3인치 급의 화면에선 92만 화소는 되야 선명하다고 할 수 있거든요. 이게 또 엄청 구형이면 그런갑다 하겠는데, 같은 시기에 나온 DSLR 카메라가 90만 화소 급이 당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한 단점이 됩니다.
전체 카메라를 보면 다 그런 좋은 기운이 온다.
조리개/감도별로 화질을 비교한 테스트 컷. 화질이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나 APS-C 센서 덕분에 평균 이상은 가는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X100은 꽤나 인기가 좋은 카메라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요. 사람마다 보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저는 X100이 화질, 색감, 디자인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보고 있습니다. 화질이나 색감, 디자인이 좋은 카메라는 흔하지만, 이 3가지를 전부 갖고 있는 카메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X100의 인기가 좋은 이유이지요.
1230만 화소의 APS-C 센서나 23mm f/2 렌즈의 성능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건 아닙니다. 작은 크기에 대형 센서를 넣었다고 말하기엔 무리죠. 소니는 APS-C도 이보다 더 작게 만들고 풀프레임까지 내놓았으니까. 23mm f/2 렌즈도 성능을 절대적으로 추구했다기보다는, 일정 수준의 휴대성을 보장하기 위해 적당한 크기로 타협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겉으로 드러난 성능이나 기대하게 되는 성능의 급이 결코 낮지는 않습니다. 폰카나 1인치 센서의 하이엔드 카메라보다 더 높거나 안정적인 성능을 원하는 분들이라면 도달하게 되는 카메라가 뻔하지요. 결국은 X100이나 그 동급의 센서를 쓴 카메라 중에서 대안을 찾아보게 됩니다. 자동차로 비교하자면 1세대 전의 중형과 최신 경차의 비교라고 해야 할까요?
후지필름은 니콘 DSLR의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삼고, 자체 센서와 이미지 프로세서를 넣은 DSLR 라인업을 구축했던 적도 있습니다. S5Pro 같은 기종은 지금까지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그 다음은 색입니다. 후지필름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죠. 회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후지필름은 필름으로 사진 분야에 처음 발을 디뎠고, 예쁘고 독착적인 색상을 지닌 여러 종류의 필름을 내놓으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선 자사의 필름 특징을 그대로 재현한 필름 시뮬레이션 모드로 매니아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지요.
니콘이나 소니, 펜탁스는 물론이고 캐논조차도 색에 대한 취향이나 호불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유독 후지필름은 색감 논란에서 자유롭고 또 좋은 평가를 받는 곳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의 S5Pro만큼 '필름 느낌이 나면서 예쁜' 사진은 아닌 것 같지만, 벨비아, 프로비아, 아스티아 같은 필름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분들이라면 그래도 신형 카메라인 X100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겠죠.
X100으로 찍은 사진이 별로 없네요. 카메라가 있으면 뭐합니까. 사진을 찍어야 카메라지. 그나마 몇 장 있는 건 사람 사진이라 못 올리겠고, 원래 목적인 음식 사진이나 한장 올려봅니다.
마지막은 디자인입니다. 구형 필름 카메라의 디자인이 딱히 인체공학적인 것도 아니고, 필름과 렌즈를 우선한 공간 배치를 굳이 지금 따라할 필요는 없겠지만, 왠지 그때 그 디자인은 뭔가 예뻐보인단 말이죠.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사진을 찍기 위한 도구이지만, 그렇다고 액세서리나 소품 비슷한 용도로 쓰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도 말은 못 할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쁜 건 중요하죠.
셔터 버튼에 릴리즈를 꽂을 수 있는데 요새 리모콘이면 되지 누가 저걸 쓰나요. 별로 작지도 않은 카메라인데 바디에 그립이 없어 잡기에도 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은색 상판은 어찌나 그리 상처가 잘 나던지요. 범용 커맨드 다이얼 2개면 해결인데 굳이 조리개링과 셔터스피드 다이얼을 굳이 나눠야 할까요? 그래도 보고 있으면 예쁩니다. 디자인 때문에라도 살만한 사람이 분명 있을 정도로.
조리개 링과 셔터스피드 다이얼은 모두 A에 두고, 노출 보정 다이얼과 커맨드 다이얼만 써서 사진을 찍었지만, 그래도 다이얼이 많이 달려 있으니 뭔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후지필름이 맨든 X100... 이건 굉장히 귀하네요.
후지필름 X100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갖고 나온 카메라입니다. 후지필름이 본격적으로 하이엔드 카메라 시장에 복귀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고, 이를 토대로 X 시리즈 미러리스 카메라 시장까지 영역을 넓혔으며, 후지필름 특유의 X-Trans 센서와 필름 시뮬레이션, EVF와 OVF를 합한 하이브리드 뷰파인더,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처음 나왔을 때부터 상당히 많은 관심을 모았던 제품입니다.
그래서인가 높은 인기는 여전하네요. X100S나 X100T 같은 후속작 덕분에 중고 시세도 아주 높지 않고, 30만원 중반이면 구할 수 있는데, 그나마도 매물이 많진 않습니다. 다만 30만원 중반이란 가격이 싸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갑갑함 없이 X100 같은 카메라를 쓰고 싶다면 비싸더라도 X100S 정도는 가야 할 겁니다. 중고 시세만큼 카메라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디자인이 예전 생각나고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