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일까요, 달걀이 먼저일까요?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죠. 제가 헬겔러도 아닌데 달걀 노른자만 먹고 살순 없잖아요. 당연히 치킨이죠. 하지만 이 질문은 음식의 기호를 묻는 게 아니라서 풀이가 복잡해집니다. 닭이 번식을 위해 달걀을 낳는 것일까요? 아니면 달걀이 닭으로 자라나는 게 먼저일까요? 닭이 달걀을 품지 않는다면 성체로 자라날 수 있을까요? 달걀이 없다면 과연 닭이라는 개체가 생겨날 수 있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쩌면 명확한 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컴퓨터도 비슷한 질문이 있습니다. 보급이 먼저일까요, 활용이 먼저일까요? 하드웨어의 스펙이나 기능이 먼저 보급되야만 그걸 활용할 여건이 마련됩니다. 반대로 어떤 스펙과 기능이 꼭 필요한 상황이 생겨나니 거기에 맞춰서 보급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명확한 답은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보급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64비트를 지원하는 윈도우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이지요. AMD는 x64를 통해 x86 데스크탑 프로세서에서 64비트를 처음으로 지원했습니다. 그게 2003년의 일입니다. 이후 AMD의 방식이 표준으로 자리잡고 지금은 윈도우 10에서 64비트 버전이 널리 쓰이게 됐지요.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CPU의 코어 수입니다. 많은 작업을 함께 처리할 때 멀티코어가 유리하다는 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의 작업이 하나의 코어만 쓰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사무 작업부터 영상 편집에 게임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여러 코어를 함께 운용합니다. 또 그렇게 쓰는 코어의 숫자도 갈수록 늘어나는 중입니다. 여기에서도 AMD의 공이 큽니다. 네이티브 멀티코어를 데스크탑 프로세서에 처음 도입한 것도 AMD고, 한 동안 4코어 8스레드에 머물러 있던 메인스트림 PC 시장을 단번에 6코어, 8코어로 끌어올린 것 역시 AMD니까요. 지금은 라이젠 9 3950X를 통해 16코어 32스레드까지 확장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선입견이 있습니다. 라이젠 9 3950X의 16코어 32스레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보며 원컴 방송, 동영상 인코딩, 렌더링 팜 등의 용도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분야에서 라이젠 9 3950X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지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덜 복잡한 작업, 이를테면 단순한 게임이라면 어떨까요. 거기에서는 라이젠 9 3950X 씩이나 필요하진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니죠. 아직까지 16코어 프로세서는 메인스트림의 범주를 까마득히 벗어난 경지이며, 게임을 위해 백만원짜리 CPU를 쓴다면 그건 게임 최적화가 부족하다는 소리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게임에 필요한 스펙이 지금 상태에 머무르지 않을 겁니다. 라이젠이 막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게임에서 필요한 CPU는 4코어 8스레드면 충분하다는 의견이 대세였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6코어 이상에 초점을 두고 최적화한 게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지요. 4코어 8스레드로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게임에서 8코어 16스레드는 기본이고, 그 이상을 요구하는 날이 분명 올 겁니다. 싱글 스레드 성능을 향상시키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게 분명한 상황에서, 코어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을 꾀하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연 그 날이 언제냐는 거겠지만, AMD는 앞날을 대비해서 더 많은 코어를 지닌 프로세서 보급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앞날이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먼 미래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지금만 하더라도 8코어 16스레드를 요구하는 게임은 상당히 많으며, 그 이상을 차지하는 게임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거든요. 심지어는 16코어 32스레드의 상당 부분을 활용하는 게임까지 있습니다. 출시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신작 게임인 둠 이터널과,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배너로드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걸 보고 놀라실 분도 계시겠지요. 게임을 하면서 작업 관리자를 열어 CPU 점유율을 일일이 확인하는 분들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현재 나온 게임들이 멀티 코어를 얼마나 확용하는지 간단히 확인해 보았습니다.
우선 테스트 환경입니다. CPU는 당연히 라이젠 9 3950X입니다. 16코어 32스레드를 제공하는 최초의 CPU는 아니지만, 메인스트림 플랫폼에서 16코어 32스레드로 확장했다는 역사적인 제품이지요. CPU에 맞춰 메인보드는 X570, 메모리는 DDR4-3200 16GB 듀얼채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픽카드는 지포스 RTX 2080 Ti를 썼습니다. 16코어 32스레드를 쓰는 시스템이 그래픽카드에 대한 투자가 인색할 리가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게임 설정은 무조건 최고, 해상도도 3840x2160으로 정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에서 옵션 타협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배너로드. 평균 프레임 84.1fps. 1% Low 73.2fps
게임을 시작하면 32개의 스레드 전부를 고루 사용합니다. 각각의 스레드에 걸린 부하가 아주 높진 않지만, 스레드가 있으면 있는대로 다 쓰는군요. 본 게임에서도 32개 스레드를 전부 사용하나, 점유율로 따지면 월드 맵에서 사용하는 양이 더 높습니다. 전체적으로 CPU 점유율은 20대 중후반대를 기록합니다.
둠 이터널. 평균 프레임 121.4fps, 1% Low 86.5fps
둠 이터널은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이상으로 많은 CPU를 사용합니다. 32개의 스레드 중 노는 게 전혀 없습니다. 전체 CPU 점유율은 높을 때 30%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높은 해상도에서 고성능 그래픽카드의 성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임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톰 클랜시의 디비전 2. 평균 프레임 54fps
잘못된 운영 때문에 입지가 줄긴 했지만, 한때는 갓겜이 되지 않을까 많은 기대를 모았던 디비전 2입니다. 여기선 게임성 말고 게임 성능만 보시죠. 이쪽도 벤치마크를 일단 실행하면 32개의 스레드를 전부 활용합니다. 각각의 스레드마다 점유율의 차이는 있으나, 분명 CPU에서 끌어올 수 있는 스레드는 다 켜진 상태입니다. CPU 전체 점유율은 30% 초반입니다.
애쉬즈 오브 더 싱귤러래티: 에스컬레이션. 평균 프레임 68.5fps
CPU를 갈구는 벤치마크로 더욱 유명한 게임이지요. 출시된지 꽤 됐지만 빡빡한 프레임은 여전합니다. 여기에선 15~16개의 스레드에서 점유율이 높지만, 나머지 스레드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딱 8코어 16스레드의 CPU에 맞춰서 프로그래밍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출시 시기를 감안하면 당연한 선택이겠지요.
어쌔신 크리드: 오딧세이. 평균 프레임 78fps, 최소 프레임 50fps
은근히 CPU 성능을 많이 쓴다고 소문난 게임입니다. 여기서도 32스레드 전부를 다 쓰진 않으나 16스레드보다는 더 많은 스레드를 분명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 각 스레드의 CPU 점유유로 비교적 높은 편인데요. 스크린샷을 찍었을 때 CPU 점유율은 61%였습니다. 16코어 32스레드 프로세서에서 16코어는 다 쓴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파 크라이 5. 평균 프레임 76fps, 최소 프레임 69fps
똑같은 유비소프트 게임이라 그런가 파 크라이 5와 어쌔신 크리드: 오딧세이의 결과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CPU 사용률 자체는 이쪽이 더 낮습니다. 가장 높았을 때는 40% 초반 정도. 하지만 보통의 메인스트림 CPU보다는 더 많은 코어/스레드를 끌어다 쓴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배틀필드 V. 평균 프레임 93.6fps, 1% Low 73.8fps
배틀필드도 딱 16스레드에 맞춰서 최적화됐다고 봐야 할 게임입니다. 물론 16코어 32스레드 프로세서에서 16스레드를 쓰는 것과, 8코어 16스레드 프로세서에서 16스레드를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요. 16스레드 정도만 되도 분명 16코어 프로세서의 의미는 있습니다.
콜 오브 듀티: 워존. 평균 91.4fps, 1% Low 74.6fps
워존은 태생적으로 많은 수의 CPU를 쓰는 게임은 아닙니다. 멀티플레이와 이스포츠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게임이니, 상대적으로 낮은 CPU 자원에 맞춰서 만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임 중에선 전체 CPU 점유율이 15% 정도 나왔는데, 게임 시작 전 쉐이더를 미리 불러올 때는 점유율이 5% 정도 더 높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레드 데드 리뎀션 2. 평균 20.6fps, 1% Low 18.5fps
멀티코어 성능이 많이 필요한 게임은 아니지만 비교용으로 넣었습니다. 그래픽카드 성능은 무서울 정도로 활용하는데 비해 CPU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이건 레드 데드 리뎀션 2가 원래 콘솔 게임이었던 걸 PC 버전으로 컨버팅한거라 그렇다고 봐야 될 겁니다. 콘솔은 아직 저전력 고효율 8코어 수준이니까요.
월드 워 Z. 평균 86fps
월드 워 Z도 스레드가 많으면 많을수록 갖다 쓰는 게임입니다. 게임의 진행 상황에 따라 각각의 스레드마다 걸린 부하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16스레드 이상은 지속적으로 사용한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게임에선 그래픽카드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나, 그래픽카드 하나로 게임 성능이 결정되진 않습니다. CPU는 그래픽카드 못지 않게 게임 성능과 플레이에 큰 영향을 미치며, 게임에서 필요로 하는 CPU의 스펙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게임 그래픽의 수준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더 넓은 장소를, 그리고 한 번에 더 많은 오브젝트를 보여주는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지요. 이제 CPU의 싱글 스레드 성능은 기본이고, 더 많은 멀티 스레드를 확보할 필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게임에서 4코어 8스레드로도 충분하다는 건 이제 옛말이고, 지금 나오는 대작 게임들은 기본이 6코어에 심지어는 8코어 16스레드나 그 이상의 환경에 맞춰 최적화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16코어 32스레드를 활용하는 게임까지 하나 둘씩 나오고 있지요. 물론 지금 16코어 32스레드 같은 괴물같은 스펙을 100% 다 활용한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앞으로 멀티코어에 최적화된 게임들이 계속해서 나올수록 라이젠 9 3950X 같은 프로세서가 갖는 의미나 그 입지는 더욱 넓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