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반도체 코어 설계 회사인 ARM이 소프트뱅크 그룹에 편입되는 건 거의 정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빠르면 10월에 ARM은 소프트뱅크 그룹의 자회사가 되면서 비상장 기업으로 바뀌게 됩니다.
ARM이 비상장 기업이 된다는 건 반도체 업계에서 적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도체 업계에서 ARM은 "가장 정확한 조사 기업'의 역할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ARM은 실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입장이라 정보의 정확성이 높습니다. 시장 조사 회사의 조사원이 기업 담당자에게 자료를 구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반도체 칩 설계 정보가 ARM에 모이다
좀 더 자세히 보죠. ARM이 개발한 반도체 코어(CPU 코어, 그래픽 코어, 물리 IP 코어 등)를 자사 프로세서와 SoC에 통합하려는 반도체 업체와 전자 제품 제조 업체는 먼저 ARM에서 코어를 사용할 권리(라이센스)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라이센스를 구입한 코어를 사용해 반도체 칩을 설계합니다. 이때 다양한 옵션을 골라 코어의 스펙을 정합니다. 반도체 칩에 들어는 코어의 종류와 수, 주요 스펙에 따라 로열티(반도체 칩 가격의 비율에 따라 정하는 사용 요금)이 결정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도체 칩의 설계 정보와 코어의 설계 정보가 ARM에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ARM은 앞으로 시장에 출시할 반도체 칩의 설계 정보를 갖고 어떤 스펙의 코어가 얼마나 쓰일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사 코어를 라이센스한 제품에 한정되긴 해도, 반도체 칩의 개발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물론 반도체 제조사에게 있어 설계 정보를 다른 회사에 유출하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허나 어느 정도의 정보는 ARM에 제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앞서 말한대로 로열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로열티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는 반도체 칩에 내장된 코어 수입니다. ARM의 자료에 따르면 CPU 코어 1개의 로열티가 2%일 경우, 처음 1개는 2%지만 두번째는 절반인 1%로 줄어듭니다. 즉 듀얼 코어는 4%가 아니라 3%가 되지요.
싱글 코어와 듀얼 코어의 로열티 차이. 왼쪽은 싱글 코어일 경우로 5달러의 싱글 코어 프로세서와 2.5달러의 싱글 코어 프로세서에 대해 각각 2%의 로열티, 즉 10센트와 5센트를 지불해 총 15센트가 됩니다. 이 2개의 프로세서를 합쳐 한개의 듀얼코어 프로세서로 통합, 가격을 6달러로 하면 칩의 로열티는 4%가 아닌 3%로 내려갑니다. 2개째의 코어에 대한 로열티가 절반인 1%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열티 금액은 24센트가 아닌 18센트로 떨어져 칩 제조사에게도 유리하다는 게 ARM의 주장입니다.
또한 코어의 종류에 따라 로열티는 변합니다. 이전 세대의 CPU 코어인 ARM7 / 9 / 11 시리즈의 로열티는 저렴하고, Cortex-A 시리즈의 로열티는 조금 비쌉니다. 또 ARMv7 아키텍처 코어보다 ARMv8 아키텍처 코어가 로열티가 높습니다. ARM의 자료를 가지고 계산하면 ARMv8의 Cortex-A 시리즈 로열티는 ARM7 / 9 / 11 시리즈의 약 2배가 됩니다.
그리고 ARMv8의 Cortex-A CPU를 코어에 내장하고, 그래픽 코어 Mali의 물리 IP를 탑재한 칩의 로열티는 ARM7 / 9 / 11 시리즈의 4배가 됩니다. 이러한 정보도 반도체 제조사에서 ARM에게 전달되지요.
ARM CPU 코어에 따른 로열티의 차이. 최첨단 코어일수록 로열티가 비쌉니다.
반도체 칩의 판매 정보가 ARM에 모이다
반도체 제조사가 완제품 칩을 출하하기 시작하면, 출하 수량에 따른 로열티(수량 × 가격 × 요금 비율)를 반도체 업체들이 ARM에 지불합니다. 지불 간격이 분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출하 수량이나 칩 단가를 ARM이 파악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도 반도체 제조사 입장에서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허나 로열티 비율은 정해져 있어 이를 토대로 수량으로 환산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라이센스한 코어를 내장한 제품에 한정되지만, 반도체 칩의 출하 수량은 ARM에 그대로 보여집니다. 반도체 칩의 판매 수량이 품종이나 업체별로 ARM에게 전달됩니다. ARM 코어를 탑재한 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장에서, ARM은 시장 동향이나 반도체 제조사의 점유율을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ARM 칩이 강한 분야와 약한 분야
그러나 ARM이 정확하게 수량과 금액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분야는, ARM이 개발한 코어를 탑재한 반도체 칩이 다수를 차지하는 시장으로 제한됩니다. ARM의 자료에 따르면 ARM 코어를 내장한 칩의 점유율이 높은 곳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분야에 한정됩니다.
모바일 (스마트폰 / 태블릿 / 노트북) 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점유율 85% 이상)
오디오 전용 핸드폰과 피쳐폰을 위한 반도체 칩 (점유율 95%)
컴퓨터 주변기기 용 반도체 칩 (점유율 75%)
HDD와 SSD 컨트롤러 칩 (점유율 93%)
자동차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점유율 95%)
반대로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 ARM 코어 내장 칩의 점유율은 낮습니다.
엔터프라이즈 서버용 반도체 칩 (점유율 1% 미만)
엔터프라이즈 네트워크 인프라를 위한 반도체 칩 (점유율 15%)
자동차용 컨트롤러 칩 (점유율 7%)
ARM은 원래 휴대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에서 발전을 거듭해 다른 분야에도 진출한 곳입니다. 서버에 진출한 근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잘 하는 분야가 정해진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ARM 코어의 시장 분야별 라이센스 상태와 수량을 기준으로 집계한 점유율.
정보의 유출과 로열티의 인상이 우려되다
ARM과 라이센스 계약을 맺은 반도체 제조사가 두려워하는 건, ARM에 전달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입니다. 기밀 정보니 긴장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ARM은 기업의 중립성을 지키고 기밀을 유지하며 반도체 제조사의 우려를 줄여 왔습니다.
반도체 제조사가 두려워하는 사태는 또 하나 있습니다. ARM이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로열티를 인상하는 것입니다. ARM 프로세서가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한 분야에선 가격 인상에 맞서기가 어렵습니다
다행히 ARM은 코어의 로열티 인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나온 고성능 코어는 높은 로열티를 제시하지만, 오래된 코어는 낮은 로열티를 제시해 왔습니다.
반도체 칩의 로열티 변화(평균, 단위는 미국 센트). 2010~2014년 동안 로열티는 4.5~4.8센트였습니다. 오른쪽에 나와있는 고성능 Cortex-A(ARM v8) 아키텍처처럼 고성능 마이크로 컨트롤러 칩의 경우 로열티가 꽤 비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도체 업체가 우려하는 5가지
무서운 건 소프트뱅크가 ARM의 모회사가 되면서 ARM이 중장기적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현재 반도체 업체가 ARM을 보며 우려하는 건 크게 5개를 꼽을 수 있습니다.
라이센스 요금 및 로열티 요금 인상
ARM이 소프트뱅크에 정보 유출
ARM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재무 정보의 은폐
ARM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기술 정보의 은폐
ARM의 기술 개발 속도 저하 (또는 원천 기술의 유출)
첫번째의 요금 인상은 소프트뱅크가 ARM 인수에 투자한 자금 회수를 서두를 경우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정보 유출은 소프트뱅크의 임원이 ARM의 임원을 겸할 경우 일어나게 됩니다. ARM의 경영진은 당분간 변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어떻게 될지 불투명합니다.
세번째 재무 정보의 은폐는 ARM이 비상장화하면서 동시에 일어나게 됩니다. 비상장 회사니까 매 분기마다 실적을 공개할 의무가 없거든요. 그간 ARM이 발표한 분기 실적은 상당히 자세했던지라 반도체 업계에 도움이 되는 정보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어려운 부분이 있겠죠.
네번째 기술 정보의 은폐는 ARM이 정기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개최한 개발자 이벤트(ARM Tech Forum 및 ARM TechCon)와, ARM의 기술들이 국제 학회 및 업계 행사에서 적극적으로 기술 동향/시장 동향을 발표하던 게 지금까지대로 실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장기적으로는 불안할 수밖에 없죠. 소프트뱅크의 기술자가 ARM 이벤트에서 다른 정보를 공개할지도 모르겠지만요.
다섯번째 기술 개발 속도 저하는 ARM의 적극적인 연구 개발 투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투자 규모를 유지한다니 당분간은 걱장하지 않아도 되나 중장기적으로 본다면 충분히 걱정할만한 일입니다. 좋게 보자면 소프트뱅크가 가진 정보가 연구 개발 확대 등으로 좋은 자극을 줄 가능성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악영향이 있을 거라 우려하는 반도체 설계자가 적지 않음
실제로 반도체 설계 분야에선 소프트뱅크가 ARM를 인수한 것에 대해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ASIC 설계 및 설계 도구의 고문인 미국의 John Cooley는 반도체 설계에 대한 개인 사이트 DeepChip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선 7월 20일에 긴급 앙케이트를 이메일로 보내 그 결과를 사이트에 공개했습니다.
반도체 설계 기술자 및 검증 기술자(설계가 적절한지를 확인하는 기술자)에 대한 설문은 186명의 답변을 얻었습니다. 질문은 ARM 인수가 단기적으로 미치는 영향과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좋음, 변화 없음, 나쁨 중에서 고르게 했고 의견도 따로 받았습니다. 그 결과 단기적으론 변화 없음이 74%로 가장 많았으나 장기적으론 나빠진다가 68%가 나왔습니다.
또 같은 질문을 EDA(전자 설계 도구) 벤더 및 IP 벤더에 이메일로 보내 47개 회사에서 답변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는 반도체 설계자와는 상당히 달랐는데요. 단기적으로는 변화 없음이 57%로 절반 이상이었으며 좋아진다가 36%를 차지했습니다. 더 낙관적으로 보는 거죠. 장기적인 전망은 더욱 대조적입니다. 좋아진다가 64%로 2/3 가까이를 차지했고 변화 없음은 21%였습니다.
의견을 보면 반도체 설계자는 소프트뱅크의 발표를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결단이 늦다는 일본 기업의 이미지를 소프트뱅크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지요. 5년 동안 직원을 2배 늘린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었으며, 기업 문화의 차이로 갈등을 빚고, 인수 비용 회수를 위해 라이센스와 로열티를 인상할 수도 있을 거란 의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반면 EDA 벤더 및 IP 벤더의 의견은 사업 기회가 넓어질 거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ARM이 시장 점유율을 잃어버리면서 그 부분을 자기들이 가져갈 거란 이야기지요. ARM 코어 이외의 IP 코어 (특히 CPU 코어), ARM의 설계 환경 이외의 EDA 툴에게는 사업 기회가 늘어날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ARM은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해 그 일부를 추상적인 형태로 공개함으로서 반도체 업계에 공헌해 왔습니다. 그래서 학회나 업계 이벤트에서 ARM의 강연 평가는 상당히 높습니다. 이것이 ARM의 장점이기도 하지요. 이게 사라진다면 ARM이나 반도체 업계 모두 장기적으로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특정 회사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절한 경쟁상대가 있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ARM의 힘이 많이 세져서 ARM의 주 시장에서는 그것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