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반도체 코어/아키텍처 설계 공급 업체인 ARM은 아주 유명합니다. 핸드폰(스마트폰과 피처폰), 태블릿 프로세서를 ARM의 제품이 거의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ARM이 새로운 CPU 코어를 개발할 때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새 제품을 앞다투어 도입, 세대 교체를 반복하고 있지요.
그러나 ARM의 사업 규모 자체는 크지 않습니다. 2015년 12월의 연 매출은 9억 6830만 파운드로 한화 1조 7917억원 정도, 수익은 1480만 파운드로 825억원 정도입니다. 반도체 업체의 매출 순위로 따지자면 상위 20위에도 들지 못합니다. 20위가 45억 달러(5조 1428억원)이었으니 그 1/3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ARM의 수입이 반도체 칩 출하 가격의 2~3%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ARM 코어를 사용해 CPU 프로세서를 만드는 제조사는, 프로세서 출하량에 따라 라이센스 사용료를 ARM에 지불합니다. 이건 CPU 코어 종류에 따라 다르나, 듀얼코어 프로세서의 경우 첫 코어가 2%, 두번째 코어가 1%로 총 3% 정도를 ARM에 지불합니다.
이 밖에 반도체 업체가 CPU 코어를 새로 도입하면 그 라이센스를 또 ARM이 받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수입원이죠. ARM 전체 소득의 절반 가까이가 라이센스 매출, 나머지 절반 정도가 로열티, 그리고 남은 10%가 개발 툴 등에서 나온 수익입니다.
이처럼 ARM은 반도체 제조업체가 아닌 반도체 회로 설계 회사입니다. 제조사와 다르게 양산 설비에 투자할 필요가 없으며, 운영 경비의 대부분은 연구 개발에 필요한 인건비입니다. 그래서 타당한 수준의 주문만 확보하면 높은 수익을 내는 사업 구조를 구축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ARM은 매우 높은 수익율(2015년 세전 수익/매출은 43%)을 달성해 왔습니다.
ARM의 매출은 적어도 장기적으로 높은 영업 이익율을 확보했습니다. 게다가 모바일 시장에서 지위도 독점적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IoT (Internet of Things) 시장에서 꾸준히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투자 펀드나 전자 기업 입장에선 매우 매력적인 인수 대상입니다.
그러나 ARM을 덜컥 인수하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시가 총액이 매우 비싸다는 겁니다. 2016년 6월에 ARM 시가 총액은 23조 5700억원에 달했습니다. 2015년 매출액의 12.3배지요. 또 ARM의 발행 주식 전부를 매입해 완전 자회사로 만드려면 주가에 어느 정도 프리미엄을 주고 사야 합니다. 따라서 ARM 인수에 필요한 금액은 30조원이 넘는다고 봐야 합니다. 이건 쉽게 인수가 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기업 인수의 방어 수단 중 하나인 시가 총액을 높이는 작업을 ARM이 실천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ARM을 인수한 기업이 바로 일본 소프트뱅크입니다. 손정의의 소프트뱅크는 PC 잡지 출판으로 시작해 대형 통신사를 인수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스프린트를 인수했고, 로봇 사업이나 에너지 사업까지 손을 뻗는 등 다양한 업계에서 활약해 왔습니다.
소프트뱅크의 2016년 3월기(2015년) 연간 매출은 9조 1535억엔(한화 98조 722억원), 영업 이익은 9995억엔(한화 1조 7088억원)입니다. 일본의 다른 전자회사와 비교해 볼까요? 히타치의 2016년 3월기 매출이 10조 343억엔, 영업 이익은 6348억엔이며 파나소닉은 매출 7조 5537억엔, 영업 이익 4157억엔입니다. 소프트뱅크의 매출액은 파나소닉을 넘으며 영업 이익은 히타치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소프트 뱅크는 이미 일본을 대표하는 거대 기업에 올라샀으면서도 하드웨어 제작을 주요 사업으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리고 ARM은 반도체 칩을 만들지 않지만, 반도체 칩의 주요 기능을 구현한 회로 블럭 (코어, 매크로, IP 등으로 불린다)을 설계하는 하드웨어 개발 기업입니다. ARM의 비즈니스 모델은 라이센스와 로열티지만 기업 문화는 반도체 기술 개발 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프트뱅크가 7월 18일에 배포한 보도 자료에 따르면, 전체 주식을 매입한다고 ARM과 합의하고, ARM의 이사회는 ARM의 주주에게 본건 인수에 응하도록 권장했습니다. 인수 총액은 3조 3,000억엔, 한화 35억 3568억원에 달합니다. 인수는 9월 30일까지 끝낼 전망이라네요.
소프트뱅크가, 더 극단적으로는 손정의가 ARM을 인수하려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런던에서 7월 18일에 열린 기자 설명회에서 손정의는 5년, 10년 후에야 인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ARM이 소프트뱅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는 간략한 설명에 그쳤으며, 구체적인 설명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ARM이 인수 제안에 답한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게 설명돼 있습니다. 매출 9조엔이 넘는 거대한 기업이 ARM을 뒷받침하면, 장기적인 전망을 염두에 둔 연구 개발 투자가 쉬워지며, ARM이 목표를 보다 신속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비상장 기업은 상장 기업과는 다르게, 단기 이익 감소를 무릎쓰고 장기적인 개발을 수행할 수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인수가 완료되도 ARM의 독립성과 중립성은 보장됩니다. 그래서 ARM이 인수 제안을 받아들이기 쉬웠지요. "소프트뱅크와 ARM은 사업 영역이 중복되지 않아, 인수 후에도 ARM의 전략에는 변함이 없다"고 ARM의 CEO인 Simon Segers가 ARM의 공식 사이트에서 밝혔습니다. 인수 후에도 경영진은 그대로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ARM이 지금까지 했던대로 사업을 진행한다고 보면 됩니다.
소프트뱅크는 ARM의 영국 본사에서 고용을 앞으로 5년 동안 2배로 늘릴 것이라 강조합니다. 그러 이렇게 고용을 늘려 나가는 속도 자첸느 지금까지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ARM는 지난 10년 동안, 5년마다 2배 꼴로 직원 수를 늘려 왔거든요. 이것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직원을 늘려 나갈 거라고 소프트뱅크가 약속한 거라 봐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ARM을 인수한 3조 3000억엔을 ARM의 수익으로 벌어내려면 얼마나 필요할까요? 여기에선 ARM의 지난 15년 동안 실적을 가지고 간단히 계산해 봤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정한 것이니 참고만 해 주세요.
ARM은 2000~2015년 동안 연 평균 매출이 15% 늘었습니다. 이 성장률이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 가정해 보죠. 그리고 매출과 영업이익은 35%로 잡았습니다. 2014년의 영업 이익은 39%, 2015년엔 42%였지만 지난 15년 평균은 15%입니다. 사실 15%만 해도 대단한 거지만. 그래서 평균보다 높으나 최근 실적보다는 좀 낮게, 35%로 잡아 봅시다.
이 조건으로 2016년 이후 영업 이익을 더해서 3조 3000억엔을 채우는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계산해 봅시다. 영업 이익을 모회사에 전부 배당하는 건 아니나, ARM은 영업 외 수지가 양호하기에 가능하다고 쳐 보죠.
이 경우 2025년에는 누적 영업 이익 규모가 1조 870억엔이고, 2030년에는 2조 8000억엔이 됩니다. 2026~2030년의 5년 동안 1조 6000억엔의 수익을 내는 셈입니다. 그리고 2031년의 누적 이익은 3조 2573억엔으로 인수 금액을 거의 도달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소프트뱅크는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투자 금액을 회수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허나 15년이 되면 회수할 전망이 매우 커집니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20년 후인 2036년에 IoT가 널리 보급되고, 여기에 ARM 코어가 내장된다면 소프트뱅크와 ARM은 IoT 인프라의 표준 기업이 될 것입니다.
ARM의 시가 총액이 그리 높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인수가 끝났을 겁니다. 가장 우려할만한 사태라면 자사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이나 투자 펀드가 ARM을 인수하는 것이죠. 이 경우 ARM의 독점적인 지위를 악용해 라이센스와 로열티 금액을 부풀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인수 제안에 ARM 이사회가 응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요.
마지막 문단에선 소프트뱅크란 "일본" 기업이 인수해서 '악의 거대 기업 집단에 ARM이 인수될 위험이 없다'라고 자뻑을 하는지라 갑자기 글 옮길 맥이 확 풀리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