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집에는 MAGIC에서 만든 전자레인지를 겸한 오븐이 있습니다. 2011년 여름에 컨벡션 오븐을 판매한 뒤 구매하였으며, 오븐 기능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능은 Non-Smart한 중고급형 제품군에 흔히 들어가 있는 요리 프리셋 기능이 내장되어 있죠. 이 레시피들을 선택하려면 8세그먼트 디스플레이에 번호로 표기한 뒤, 따로 제공하는 요리책과 간단 설명서에 각각의 번호가 무슨 레시피에 할당되어 있는지 적어줍니다. 거의 모든 전자레인지가 이렇게 만들고자 하는 레시피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대부분 IoT와 스마트 뭐시기라는 이름이 달려나와서 아주 약간 살짝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인터넷 접속기능와 휴대폰에 연결하여 원격조종기능을 갖추었다고 홍보합니다. 하지만 그거 빼면 기존의 제품들과 사실상 다른 점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꼴에 가격은 ZOLLA비싸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물론 쉽게 살 수 있도록 크게 가격이 비싸지 않은 제품에 스마트 기능이 들어간 제품들도 있긴 하지만, 가성비가 크게 떨어진다는 점은 다르지 않네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미국의 전형적인 전자레인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시계를 겸한 8세그먼트 디스플레이 하단에 각종 빠른 요리기능 버튼들, 그리고 문열림 버튼이 있습니다. 일부 모델은 숫자를 빠르게 입력할 수 있도록 전화기에 들어가는 키패드를 장착한 모델도 있죠. 디스플레이는 과거에는 VFD가 주력으로 쓰였고 지금은 LCD나 OLED를 씁니다.
그리고, 스마트 전자레인지라고 불리우는 물건은, 위 제품과 사실상 다르지 않은 제품에 알렉사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근데 알렉사 기능이 있어서 좋은점이 뭐냐고요? 사용자의 정보를 아마존 서버에 실시간으로 갖다바쳐 소비자의 관심사와 입맛을 빅데이터로 분석하여 가장 높은 구매율을 이끌어낼 만한 서비스를 만드는데 쓸 수 있습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요. 버튼 몇번 누르는거조차 귀찮은 소비자를 위해 바코드를 찍으면 인터넷에 연결하여 그 냉동식품의 조리법을 불러와서 자동으로 조리해주는것. 그리고 음성명령 통합과 고급제품 부심 그리고 타인을 집에 초대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쓸모없는 '간지'. 그정도가 있겠네요. 미국은 홈파티 문화가 발달했으니 간지나는 가전제품을 가지는것도 나쁘지는 않아보이긴 합니다만.
이미 버려져서 너덜너덜해진 냉동 오뚜기 치즈피자 포장지를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바코드 스캐너가 인식할때까지 여러번 갖다대거나 "Hey Alexa, Prepare to cook OTTOGI ready-to-eat pizza in microwave. I mean, ottogi. O-T-T-O-G-I." 라는 말을 알렉사가 알아먹을때까지 반복하거나. 고작 전자레인지를 조작하기 위해 침대에 두고온 스마트폰을 가지러 가서 앱을 실행시키고 전자렌지와 휴대폰을 연결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행하는 것이 고작 버튼 몇번 누르는거보다 얼마나 더 편할까요.
비싼 돈내고 호기심에 비싼 스마트 가전기기를 사서 몇번 갖고 놀아보다가, 이 기능들이 실제로 효율적이지도 않고 불편하다는 점을 깨닫거나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된 뒤에는, 그런 스마트 기능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될겁니다. 그저 기믹에 불과한 몇가지 기능들을 위해 소비자는 과소비를 하게 되는거죠.
근데 그거보다도... 이런 스마트 가전기기들이 진짜 '스마트' 하냐면, 글쎄요. 저는 일단 회의적입니다. 왜냐면 이런 물건들은 기계가 직접 스마트한게 아니거든요. 이런 바보같은 기계들을 스마트하게 만들어주는것은 '인터넷' 이죠. 사칙연산도 못하고 100.14가 100.2보다 크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바보가 IQ 200짜리 조수들을 언제나 전화기로 호출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바보가 똑똑해지는게 아니잖아요.
이들 기기들의 인터넷 의존성은 지나치게 높습니다. 제품에 내장된 데이터는 없고 거의 모든 데이터를 인터넷에서 '실시간' 으로 받아오다 보니, 만약 서버의 데이터가 변한다면 기존의 데이터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대규모 공사나 기상악화 등으로 네트워크가 잠깐이라도 끊어지면 "Check your internet connection" 이라는 에러코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그런 스마트 기능들은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게 아니죠.
"그저 이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Google Answers 스레드에는 이 문제가 이미 발생했다는 사례가 올라와 있습니다. 삼성 스마트 냉장고를 2012년에 구매한 사람들은 2014년이 되자 냉장고에서 구글 캘린더에 접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글이 캘린더에 접속하는 방식을 바꾸었으나, 삼성은 그에 대응하는 업데이트를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그 냉장고는 구형 제품으로 취급되어 더이상 지원하지 않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또한,
https://www.wired.com/story/older-sonos-speakers-will-stop-receiving-updates/
무선 스피커를 생산하는 Sonos는 구형 모델에 대한 업데이트를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완전히 멀쩡하고 소리도 잘나는 스피커이지만, 단지 구형 제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점점 기능들이 너프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몇년 정도 지나면 온라인 기반의 기능은 사실상 사용자체가 불가능해지겟죠.
사용자가 많은 제품들이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 사용자중에 능력자들이 존재하여 구형 제품이 가진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개조 펌웨어를 만들어줄수도 있을테고요. 아이팟이나 구형 워크맨 모델 중 일부가 실제로 그러하죠. 그렇지만 그 기기의 사용자가 많지 않다면? 직접 만들어야겠지요. 그럴 능력이 없다면 뭐 그냥 고물상에 팔아넘기거나 비싼돈주고 산 스마트 가전을 일반 백색가전마냥 쓰는수밖에 없죠.
IT 흑색가전 제품은 빠른 주기로 성능이 올라가고 기능이 다양해집니다. 이에 따라 최신 제품을 팔아먹기 위해 계획적 구식화가 발생하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죠. 이런 특성은 구매후 오랜기간 사용해야 할 백색가전의 성향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단언컨대 최악의 궁합입니다.
가격은 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요. 실제로 주요 기능들에 얼마나 많은 기술적 발전이 있었냐 하면 글쎄요? 20년 전의 전자렌지나 지금의 전자렌지나. 20년 전의 냉장고나 지금의 냉장고나... 냉동식품 데우거나 아이스크림 얼리는데 있어서 두 제품의 차이는 없잖아요. 아 물론, 전자렌지 같은 경우 마그네트론을 PWM으로 제어하지 않고 강도를 조절하는 기술이 개발된 것. 그리고 냉장고는 전력효율 정도가 있긴 하지만, 20년의 격차와 그동안 강산이 몇번 바뀌었는지를 생각하면 크게 눈에 띄일 만한 기술 발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명심하세요. IoT는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마케팅용 수단일 뿐이며, 네트워크 기반의 백색 가전제품은 절대로 사는게 아닙니다. 그런 물건들은 여러분의 삶을 더 스마트하게 만들어줄거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겁니다. 냉장고나 스피커, 전자레인지 뿐만이 아닙니다. 스마트 TV가 갖고싶다면 일반 OLED TV랑 미박스를 사시고, 스마트 냉장고가 갖고싶다면 중고 아이패드와 일반 냉장고 그리고 자석을 사세요.
한편, 이 글의 본론인 1997년 생산 샤프전자의 전자레인지는 많이 다릅니다.
90년대임을 감안할때 시대를 앞서나간 도트 매트릭스 그래픽 디스플레이가 보이네요. 물론 2020년 현재에도 8세그먼트보다 나은 화면이 들어있는 전자렌지는 많지 않습니다. 가격대가 꽤 나가는 알렉사 전자레인지 같은것들도 말이죠.
이 화면은 실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 조리하고자 하는 메뉴의 이름을 직접 표시하여 디스플레이에서 바로 선택할 수 있음
- 메뉴 책자를 따로 펼 필요 없이 전자레인지 화면에서 요리 재료와 과정을 바로 표시
- 현재 요리중인 메뉴를 그림으로 표시
- 남은 시간을 숫자 뿐만 아니라 모래시계 모양 그래픽으로도 표시
전자렌지 본체나 기타 인쇄물 부록에 각각의 번호가 지시하는 레시피를 기록해서 그걸 참조하여 화면에 번호를 입력하는 대부분 전자렌지의 입력방식이 전혀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는지, 아니면 그저 기술 R&D 부서에 넘쳐나는 예산이 투입되었는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전자렌지의 디스플레이에 텍스트와 그래픽이 표시되어 굳이 다른 문서를 참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사용자 친화적인 기능이 맞습니다. 당장 저희 집도 전자렌지 살때 딸려온 요리책 어딨는지 기억이 안나거든요.
거기다가 비프음도 단 하나의 톤이 아니라 멜로디가 납니다. 이건 크게 유용한 기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있어서 기분좋은 기능은 맞죠.
물론, 그저 화면 하나 좋은게 들어가서 좋다고 하는건 절대로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이 제품에는 무려 '수증기 센서' 가 내장되어 있거든요.
가령 미국에서 중요한 기능인 팝콘튀기기 기능을 예시로 들자면, 인스턴트 팝콘의 주의사항 란에는 항상 '전자레인지에 내장된 팝콘 튀기기 모드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전자레인지에는 이 센서가 없어 그냥 미리 설정된 값만을 이용하여 정해진 루틴을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자렌지 설명서에 얼마만큼의 팝콘이 들어갔을때 기준이다 등등 프리셋 값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를 해주고 여기에 맞추어서 조리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기억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이 전자레인지에는 수증기 센서가 달려 있어, 증기가 감지되면 팝콘이 데워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한번에 다량의 수증기가 나오면 팝콘이 완전히 튀겨진 것으로 인식한다던가 등 현재 식품이 조리되는 상태에 맞추어서 출력값을 능동적으로 조절합니다. 따라서 어떤 인스턴트 팝콘이라도 굳이 포장지 뒤의 설명을 읽을 필요 없이 그냥 전자렌지에 넣고 팝콘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이죠.
수증기 센서로 현재 식품의 상태를 인식하는 기술은 2020년 기준 엄청나게 단순하고 저렴한 기술이지만, 1997년의 시점에서도 엄청나게 저렴하고 단순한 것이 맞습니다. 그저 센서 쪼가리 하나와 ROM 칩, 그리고 룩업 테이블만 잘 갖추어져 있으면 되거든요. 물론 어디까지나 기술 자체가 저렴하다는 것이지 렌지의 출력과 조리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식품의 상태를 연구하여 최적의 조리법을 담은 룩업 테이블을 만드는 일은 많은 시간의 연구를 필요로 하여 원가 상승의 원인이 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건 쓸데없이 인터넷 연결기능만 넣어둔 다른 제품들과 달리, 실제로 사용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기능이잖아요? 진짜 사용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맞추어서 개발되었고, 네트워크 기능 없이 제품 내부에 센싱 기능이 직접 내장되어 있어 계획적 구식화에 구애받지 않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용할 수 있고, 굳이 냉동식품이 아니더라도 실제 요리에 실용적으로 써먹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사용자 친화적인, 진정한 '스마트' 전자레인지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값이 비싸더라도 살 가치가 있습니다.
바코드를 찍어서 조리하는 스마트 전자레인지는 센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저 냉동식품의 브랜드를 검색한 뒤 그 제품의 조리법을 가져와서 실행할 뿐, 거기에는 어떠한 기계의 능동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런건 굳이 바코드를 찍지 않아도, 눈과 손만 있으면 식품의 설명서를 읽은 뒤 직접 할 수도 있어요. 물론 기계가 자동으로 검색해주는 것보다 살짝 불편하긴 하겠지만. 만약 모회사에서 구식 전자렌지용 네트워크 서비스를 종료한다고 하면 그냥 핸드폰으로 제어가 될 뿐인 비싼 보급형 전자렌지와 다를바가 없어지는거고요. 네트워크는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위 영상의 주인공은 영상이 끝나고 스마트 전구를 위한 펌웨어 업데이트를 하러 갔습니다. 바쁜 아침에 냉동식품을 빨리먹고 가려는데 갑자기 화면에 긴급 펌웨어 업그레이드가 있다며 업그레이드를 마치기 전까지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띄우고 동작을 거부한다면 아마 그 전자렌지는 제 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을 겁니다.
사견이지만, 진짜로 사용자에게 편리한 전자렌지는, 네트워크 기능 따위는 넣지 않고 수많은 버튼들 대신 5달러짜리 터치패널과 얼마 안하는 내부 센서를 장착한 제품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지지는 않을 것이고요. 가끔씩 새로운 기능 추가를 위해 USB나 블루투스로 펌웨어 업데이트만 가능하게 해주면 됩니다.
터치니까 불편하다! 하실분들 계셔서 한마디 합니다. 요즘 미국에 팔리는 많은 전자렌지는 '터치버튼' 으로 되어있어요. 멤브레인 방식인지 아님 정전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보는 상태에서 누르기 힘든 그 터치버튼이 맞습니다. 세상에. 얘네들은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게 만들기 대회를 하는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