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독과 살균에 대한 글을 읽다가, 일전에 여기에도 올라왔던 “살균수”라는 것과 관련된 정보가 있길래 여기에 옮겨 봅니다.
한 1년 전, 이곳에 ‘살균수기’라는 것이 사기 아니냐며 그냥 락스를 쓰는 게 낫다는 글이 올라온 바 있습니다.
- 20190402 수정 [바로잡습니다]비싼 살균수기 사지 마세요 (골목식당 바우X) -그냥 락스를 쓰세요.
https://gigglehd.com/gg/lifetech/3889888
당시 저는 이 글을 보지 못했었고 나중에서야 봤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요. 그런데 현직 감염내과 교수(대한감염학회 회장)가 쓴 서적에서 살균 및 소독 관련 파트를 읽다가 관련 내용을 접하여 간략하게 소개해 봅니다. 참조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진홍, 『유진홍 교수의 이야기로 풀어보는 감염학』, 파주: 군자출판사, 2018.
여기서는 위에서 말한 살균수를 AEW(Acidic electrolyzed water)라고 부르고 있으며, 식품 산업에서 주로 쓰이고 있으며 병원에서도 원내 감염관리와 관련하여 이슈가 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네요. 심지어는 기성품으로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해당 상품명은 “메디록스”(Medilox).
이 책에서도 이 물질에 대해 서술 도입부에서는 기본적으로 락스과 같은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AEW란… 한마디로, 물에다 소금을 넣고 전기 분해해서 얻는 락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AEW나 락스나 결국 소독 효과를 내는 핵심 부분은 물 속에 녹아 있는 유리염소 성분이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이런 성분이 소독 효과를 내는 근본 원리에 대해 주기율표와 산화·환원 반응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던데, 너무 기니까 그 부분은 생략할게요. 핵심은 산화 반응입니다.
이렇게 물 속에 녹아 있는 유리염소 성분은 몇 가지가 있는데, pH에 따라서 주도권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pH가 7인 중성인 경우에는 차아염소산(HOCl)과 차아염소산이온(OCl-)이 평형을 이루고 있으며, pH가 6.5 이하로 낮은 경우(=산성)이면 차아염소산(HOCl)이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pH가 높으면(=알칼리성) 차아염소산이온(OCl-)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죠. 위에서 말하는 AEW는 물을 어느 정도 산성화해서 차아염소산이온(OCl-)이 아닌 차아염소산(HOCl)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태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실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락스(주성분 차아염소산나트륨)의 경우 pH가 높은 강알칼리성이다.
- 락스는 알칼리성이므로 차아염소산이온(OCl-)에 주도권이 있다.
- AEW는 산성이므로 차아염소산(HOCl)에 주도권이 있다.
- 차아염소산(HOCl)은 차아염소산이온(OCl-)보다 소독 능력이 훨씬 높다.
- 따라서, AEW는
기존 락스보다 더 강한 소독 능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더 강력한 소독 능력이란 높은 수준의 소독(일부 세균의 포자까지도 불활성화)을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소독과 멸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소독(disinfection)과 멸균(sterilization)은 모두 병원체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이 둘을 구분 짓는 핵심은 포자(endospore)이다. 병원체를 제거하되, 포자는 남긴다면 소독이고, 포자까지 완전히 다 절멸시킨다면 멸균이다. 따라서, 소독과 멸균을 어떤 경우에 적절하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알코올이나 락스는 일반적인 소독제에 속합니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죽일 수 있지만, 일부 세균이 거친 환경을 만났을 때 버티려고 만든 외피인 내포자(endospore)는 부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다만 락스가 고농도일 때는 일부 세균의 포자 또한 박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AEW의 경우 농도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도 일부 세균의 포자까지 박살내는 높은 수준의 소독 능력을 보인다고 되어 있네요.
특히 Clostridium difficile의 포자(spore, endospore)를 살상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작용 기전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일선 현장에서 많이 쓰이는 Medilox의 예를 들면, pH 4.5~7.0 범위라서 성분 중에 HOCl이 단연 주류를 이루고(60~80 ppm) 이의 oxidation reduction potential(ORP)가 +800~1,000 mV로 매우 높다(통상적으로 +650 mV를 넘어가면 웬만한 균들은 30초 내로 다 죽는다).
한편, 차아염소산수는 유효 살균 농도에서도 인체에 주는 자극이 아주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따르면 이 성분이 들어간 특정 제품이 2016년에 FDA로부터 인간과 동물의 상처 치료용으로 허가되었다는 내용이나, 고순도의 차아염소산을 보존제로 넣은 생리식염수를 눈꺼풀에 쓰니까 별 문제 없이 20분만에 세균이 많이 줄어서 좋더라는 연구 결과까지 있네요. 자극성이 강한 락스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 외에도 식품의 보존을 위해 차아염소산을 첨가물로 사용하는 사례가 있는 모양입니다. 즉, 강한 살균력과 높은 안전성을 겸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AEW(차아염소산수)는 락스와는 차별되는 장점을 가진 별도의 소독용액입니다. 즉, AEW는 무조건 락스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AEW는 소독계의 주류가 아닌 걸까요?
단점은 일단 싸게 만들기는 하지만, 하루를 못 버틴다. HOCl 자체가 하루 지나면 분해되어 물로 바뀐다. 그래서 만드는 즉시 하루 내로 다 써야 한다는 점.
빠르게 물로 분해되어 안전하다는 점이 보존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좋지 않게 작용하는군요. 그렇다면 기성품으로 나오는 건 어찌된 걸까요. 아무래도 별도의 산도보존제를 소량 첨가해서 pH를 낮춰 보존성을 늘린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번 구입하여 개봉하고 나면 그리 오래 쓰지는 못할 것 같네요.
다른 단점도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기성품인 메디록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하는 80ppm 차아염소산수 가격을 보면 1통 4리터에 무려 3만원이나 합니다. 차아염소산수는 이미 희석이 된 상태기 때문에 더 이상 희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척 비싼 가격이지요. 락스에 비교하자면, 유한크로락스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유한락스 레귤러 1리터의 가격은 2,450원에 불과합니다. 똑같이 4리터 분량을 산다고 해도 9,800원이니까 3배로 저렴하고, 3리터짜리 하나를 4,880원에 파는 것이 있으니 이걸 적용하면 불과 7,330원이네요. 락스의 경우 보통 최소 10배 이상 희석해서 사용하는 점을 생각하면 압도적으로 저렴하다고 봐야 하지요. 게다가 락스는 냉암소에서 보관할 경우 제법 오래 놔둬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건 다들 경험상 아실 겁니다.
또, 락스도 높은 농도로 오랫동안 사용하면 충분히 높은 수준의 소독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한크로락스 QnA 코너를 비롯한 인터넷의 각종 자료에서는 차아염소산(HOCl)의 살균 능력이 락스의 70~80배 정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락스도 충분한 시간과 농도로 사용하면 세균이나 노로바이러스나 곰팡이를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위의 책에서는 4% 농도의 락스(예를 들면 유한락스 레귤러 원액) 1 : 8 물의 비율로 섞으면 5,000ppm(0.5%)의 농도를 달성하므로 노로바이러스나 클로스트리듐 디피실레(Clostridium difficile)를 아포까지 불활성화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군요. 다만 질병관리본부의 소독 관련 지침에 따르면 이렇게 할 경우 적어도 10분 이상의 충분한 소독 시간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차아염소산수는 길어야 5분이면 충분하고, 웬만한 놈들은 2분만에 정리되는 모양이군요.
그래서 유한크로락스의 QnA 코너에는 락스와 차아염소산수의 차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한락스 희석액을 어떤 경우에도 생물의 피부에 직접 뿌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비싸지만 안전하고, 안전하지만 불안정한 차아염소산 용액의 용도와
저렴하지만 주의깊게 사용해야 하고, 오래 보관해도 되는 유한락스의 용도를
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걸 보면 유한크로락스의 입장도 제가 위에서 낸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 차아염소산수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분해되기가 쉬우므로 가능하면 사용하기 직전에 바로바로 만들어서 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메디록스와 같은 기성품은 다량으로 사용할 경우 비용도 비싼 데다가 생산시점에서 오래 지날 경우 소독능력을 보장하기가 힘들겠지요. 따라서 가정에서 차아염소산수를 사용하려는 수요가 있다면, 이걸 집에서 바로바로 만들어 쓰는 기계의 수요가 있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맨 위 링크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전해수기”는 바로 이 수요를 노린 제품으로 보입니다. 식염수를 전기 분해하면 차아염소산이 포함된 용액인 ‘초산화수’가 생성되니까요.
제가 직접 이 “전해수기” 홈페이지에서 매뉴얼을 보고 사용법을 확인해 봤는데, 이 제품이 정말로 동작하는 물건이라면 소금을 넣는 경우에 한해서는 차아염소산이 포함된 초산화수가 만들어질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 제품의 매뉴얼에는 소금을 넣는 경우와 넣지 않는 경우가 나눠져 있으며, 넣지 않는 경우에도 소독 능력이 있다고 하네요. 이 부분은 좀 갸우뚱하기는 합니다. 또, 이 제품의 매뉴얼에는 살균력과 탈취력이 7일간 유지
된다고 되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질병관리본부의 소독 관련 지침에서는 초산화수에 대해 생성 후 48시간 경과 제품은 높은 수준 소독제로 사용을 할 수 없다.
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틀만 지나면 소독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매뉴얼이 좀 부정확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만약에 제가 이 제품을 쓴다면 항상 소금을 넣어서 초산화수를 제조한 즉시 모두 쓰는 용법으로만 사용할 것 같습니다.
p.s.
제가 전문가가 아닌지라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관련 댓글은 적극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