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리얼포스 키보드의 방청 작업과 스테빌라이저 윤활을 하는 과정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위치와 스프링 윤활법은 건너뛰었죠.
키감과 소음에 관한 부분은 개인적인 취향이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습니다.
약간 덜컥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키감 자체는 순정 상태도 만족스러웠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구글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무접점 키보드의 검색 결과를 보게 되었는데,
제가 쓴 글이 떡하니 상단에 올라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네, 이렇게요.
제 글을 제가 읽고 나니 다시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작업을 도중에 끊은 느낌이랄까, 정보가 필요해서 들어왔는데 그 부분만 쏙 날라간 듯한...
그래서 키보드 청소를 다시 한 번 진행하는 김에, 아예 풀 윤활까지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안 그래도 스테빌라이저에 발랐던 슈퍼루브 구리스가 조금 신경쓰이던 참이었거든요.
자잘한 해체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키보드 하우징을 분해하는 방법은 이전 글을 참고해 주세요.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사용할 구리스는 크라이톡스 105.
스테빌라이저는 러버돔에 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슈퍼루브를 사용할 예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스프링에 크라이톡스 105, 스위치 및 슬라이더 윤활제는 105와 205를 혼합해서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제 글을 보고 윤활에 도전하실 생각이라면 이 혼합법을 따르는 걸 추천드립니다.
기판과 보강판을 연결하는 나사를 모두 풀어주고 러버돔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뒤집습니다.
슈퍼루브 윤활제는 러버돔을 변형시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하게, 덕지덕지 묻히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제 키보드의 러버돔 상태는 매우 깨끗합니다.
살짝 걱정했지만 역시 소량만 작업한 덕분에 스테빌라이저와 러버돔이 전혀 닿지 않았네요. 다행입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스위치와 슬라이더를 분해하는 일입니다. 보강판에 스위치가 장착된 채로 슬라이더를 빼셔도 되지만, 저는 불편해서 전부 탈거한 뒤 해체했습니다.
슬라이더를 유심히 보시면 잘 빠지지 않도록 걸쇠 형태의 플라스틱이 튀어나와 있습니다.
힘으로 빼면 부러질 수도 있으니 걸쇠를 들어낸다는 느낌으로 밀어야 잘 빠집니다.
분해한 스위치는 사진처럼 나중에 다시 끼워주면 됩니다.
분해한 슬라이더는 따로 모아 둡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30만 원을 잃는다고 생각합시다.
슬라이더에서 고무 링도 따로 분리가 됩니다. 있는 모델도 있고 없는 모델도 있을 겁니다.
분리 완료.
2년동안 사용하면서 한번도 세척을 한 적이 없으니 이참에 전부 씻어줍니다.
미지근한 물에 중성 세제 몇 방울이면 충분합니다.
깔끔하네요.
키캡이랑 슬라이더가 마르는 동안 스프링 윤활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구형 리얼포스의 경우 러버돔이 전부 개별로 조각나 있어서 작업이 매우 매우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신형은 보시다시피 대부분의 러버돔이 일체형으로 붙어 있고 몇 개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업하기 매우 편리합니다. 고마워요 토프레!
러버돔을 들어내면 금색의 스프링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슬라이더보다도 구하기 힘든 게 이 스프링이에요.
스프링을 윤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세밀한 붓으로 하나 하나 윤활제를 바르는 것입니다. 필요한 만큼만 정밀하게 윤활제를 바를 수 있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경우에 따라 세밀한 붓 터치가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린다는 게 단점입니다.
두번째는 비닐 봉투에 스프링을 전부 넣고, 윤활제를 두 세 방울 정도 넣은 뒤 마구 흔드는 방법입니다. 라면을 스프만 넣어서 부숴 먹는 걸 생각하시면 빨라요. 시간 절약은 말 할 것도 없고 의외로 균일하게 윤활제를 바를 수 있습니다.
단점은 스프링이 자기들끼리 엉켜서 전부 손으로 풀어줘야 합니다. 너무 막 흔들게 되면 스프링 푸는 작업에 시간을 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번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스위치와 슬라이더가 맞닿는 부분에 윤활제를 발라줍니다.
토프레 스위치는 우측 상단과 좌측 하단에 닿게 되므로 그 부분만 작업해 주시면 됩니다.
슬라이더 표면에도 살짝 발라주면 좋습니다.
잘 되었다면 아까 빼 놓았던 고무 링도 다시 끼워주고 장착.
이제 이걸 전부 다 하면 됩니다.
다 했습니다. 스테빌라이저 윤활은 이전에 작업했던 게 잘 남아 있어서 생략했습니다.
러버돔을 뒤집어서 잘 얹어 줍니다.
러버돔과 스프링은 키감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집중해서 작업해야 합니다. 실수로 틀어지게 된다면 키보드에서 찌걱이는 소리가 나거나 인식 불량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러버돔을 자세히 보면 상/하 부분과 좌/우 부분이 다르게 생겼죠? 각자 스위치와 맞물리게 설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철 부분에 러버돔을 끼워 넣는다는 느낌으로 틀리지 않도록 맞춰 줍니다.
이제 윤활제 바른 스프링을 올려놓을 차례입니다. 이건 아까보다 더 중요한 작업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스프링들이 고르게 있지 못하고 제각각 각도가 틀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막 놔서 그런 게 아니에요. 러버돔이 스프링에 비해 미묘하게 넓기 때문에 제 위치에 자리를 못 잡는 겁니다.
즉, 이걸 손으로 얼마나 잘 잡아 주느냐가 키캄의 베이스를 결정하는 중요한 첫 걸음이 되는 겁니다. 동시에 러버돔도 틀어지지 않게 주의해야겠죠.
글로는 엄청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집중해서 살짝씩만 건드려 주면 의외로 금방 합니다. 프라모델 조립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쉽게 해내실 겁니다.
모든 정렬을 끝낸 모습입니다. 작업 도중에 스프링 갯수가 맞지 않아서 식은 땀을 좀 흘렸는데 알고보니 두어개가 겹친 채로 숨어 있었습니다.
기껏 해놓은 정렬이 틀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기판을 올려놓고 나사를 조여 줍니다.
가운데부터 원을 그리듯이 가장자리로 향하는 게 가장 안정적입니다.
하우징을 닫기 전 누드 테스트. 키감은 어색하지 않은지, 혹시 눌리지 않는 키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잘 되는군요. 이제 하우징을 덮으면 끝입니다.
마치며
처음 해 보는 윤활 작업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네 시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네요. 원래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은 시간을 단축한다고 해서 좋을 것 없는 일이니까요.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임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키감은 역시나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다시피 훌륭합니다. '살짝 녹은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감각'이 바로 이걸 말하는 것이었군요. 이제 깨달았습니다. 순정 상태의 것도 훌륭했지만, 철심 따위의 잡음이 전부 사라지면서 오직 누르는 압력과 반발력만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활유를 너무 많이 바르면 찌걱이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이 글을 전부 작성하면서도 그런 느낌은 전혀 없네요.
그러나 '지금 당장 해라!' 라고 선뜻 추천을 드리기엔 조금 애매합니다. 오로지 수작업으로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작업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지 알 수 없고, 지나친 윤활제 사용으로 키감이 오히려 퇴보하거나 잘못하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에 30만 원 대를 호가하는 키보드임을 감안하면 그 리스크가 상당히 크게 다가오겠죠. 몇 시간동안 앉아서 쪼맨한 부품들을 붙들고 있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겐 큰 스트레스일 겁니다.
그럼에도 만약 리얼포스 키보드를 가지고 계신다면 한 번쯤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작업임은 확실합니다. 무접점 키보드를, 하물며 리얼포스 키보드를 구매했다는 것은 확고한 취향과 만족스러운 키감을 찾아 여기까지 오신 분들일 텐데, 더 나은 '타이핑 해피'를 눈 앞에 두고 망설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생이 바쁜 탓에 글을 많이 못 올리네요. 쓸 소재는 많은데... 언젠간 다 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