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V 설비라고 하면 ASML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ASML이 모든 걸 다 하진 않습니다. EUV 노광기 하나만 있어서 EUV 생산이 가능한 건 아니고요. 거기에 딸려오는 부대 설비들이 필요한데 이 분야에서 일본의 저력을 얕볼 순 없습니다.
ASML은 2015년에 6대, 2017년에 10대, 2018년에 18대, 2019년에 26대, 2020년에 아마도 36대의 EUV 장비를 출하했을 겁니다. 구매 주문의 경우 2020년 2분기에 이미 56대에 도달했으며, 2020년에 ASML은 36대의 설비 중 대부분을 TSMC에 줬습니다. 삼성이 구매한 EUV 장비는 1~2대밖에 안됩니다.
2020년에 각 회사들이 보유한 EUV 장비의 숫자를 따지면 TSMC가 61대, 삼성이 10대 정도입니다. ASML이 생산했거나 주문을 받은 EUV 장비의 수는 70대 수준이며 TSMC가 그 절반을, 삼성은 10대 정도만 받았습니다. 삼성이 최신 공정 웨이퍼 생산에서 TSMC보다 불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EUV 부대 설비 쪽을 봅시다. 노광기가 EUV의 핵심 설비지만, EUV의 관련 장비에는 포토 마스크의 결함 검출 장비, 코팅 장비도 포함됩니다. 여기에서 일본 업체의 점유유은 상당히 큽니다. EUV 마스크 검사 장비의 경우 일본 Lasertec Corp.가 독점합니다. 2017년에 비어있는 EUV 마스크의 내부 결함을 검사하는 기계를 만들었고, 2019년 9월에는 이미 칩 디자인이 인쇄된 탬플릿에서 결함을 찾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2020년 7월부터 9월까지 Lasertec Corp.의 반도체 관련 장비 주문은 전년 대비 2.6배로 늘었습니다. EUV 포토 마스크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광원에 DUV를 쬐는데, EUV는 DUV보다 파장이 짧고 제품 결함 감지 빈도가 높습니다. 5nm 공정에서도 DUV를 쓸 순 있지만 앞으로 2nm 공정에 도달하면 DUV를 부족하기에 앞으로 EUV 광원을 이용한 탐지 장비의 수요가 더 늘어나리라 보고 있습니다.
이 장비는 비싸기도 하지만 공급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43억엔 이상의 값비싼 장비를 구매하려면 최대 2년이 걸립니다. 칩 제조사는 스텐실이 제대로 인쇄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스크 공정에 하나 이상의 기계가 둬야 하고, 반복 투영되는 빛 때문에 생기는 미세한 마모를 관찰하기 위한 테스트 장비가 필요합니다.
일본이 독점한 또 다른 영역은 도쿄 전자의 EUV 코팅 투영 장비입니다. 실리콘 웨이퍼에 특수 화학 액체를 코팅해 반도체 재료로 만드는 데 씁니다. 1993년에 도코 전자는 FPD 코팅 장비와 현상제를 판매했고, 2000년에는 클린트랙 액트8 1000개를 납품했습니다. 막 형성과 에칭 장비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이 회사는 최소 12억 5천만 달러를 올해 3월까지 투자할 계획입니다.
또 포토 레지스트가 있습니다. 이건 작년에도 이슈가 됐던 건데, 일본은 EUV 포토 레지스트에서 시장 점유율이 90%입니다. 후지필름 홀딩스와 스미토모 케미칼이 2021년부터 차세대 칩 제조를 위한 재료를 조달합니다. 후지필름은 45억엔을 투자한 시즈오카현 공장의 양산을 올해부터 시작하는데, 잔여물을 줄여 칩 결함을 낮추리라 기대합니다. 스미토모는 2022회계연도까지 오사카 공장의 생산 능력을 높입니다.
일본 기가포톤은 리소그래피 장비에 레이저 광원을 공급하는 두 회사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한 곳은 2012년에 ASML이 인수한 Cymer입니다. 기가포톤은 EUV가 등장하기 전까지 리소그래피 광원에서 2위를 차지했으나 지금은 ASML에게 밀렸습니다. 기가포톤은 2000년에 설립된 젊은 기업으로 ArF 시대를 넘어 EUV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Sn 타겟에 펄스 레이저를 쬐어 고온 플라즈마에서 EUV 광을 생성하는 레이저 플라즈마 LPP 방식으로 EUV 광원을 개발했습니다.
전자 빔 마스크 리소그래피 장비에선 도시바의 자회인 NUflare가 도쿄의 전자 현미경 제조사인 JEOL, 오스트리아 IMS Nanofabrication의 제휴를 통해 26만개의 레이저 빔을 방출하는 멀티 빔 장비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도시바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포토마스크 제조사인 호야(여기도 일본 회사)가 NuFlare를 인수하는 걸 막기 위해 25명의 엔지니어와 관리자를 추가했습니다.
리소그래피 장비 분야에서 니콘과 캐논은 한때 전세계 시장을 휩쓸었으나 ASML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EUV 개발에 뒤쳐졌습니다. 하지만 주변 기기와 소재 분야에서 일본은 아직 많은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기술이 복잡해지고 개발에 필요한 비용이 늘어나면서 EUV 관련 분야에 참여하는 회사의 수는 줄어들 겁니다. 또 개발 원가가 비싸지면서 첨단 공정을 사용해 제조하는 반도체의 가격 역시 오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