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서쪽으로 '라는 속설

그 옛날에, 반도체 업계에서는 "반도체 붐의 중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쪽으로 움직인다"는 속설이 퍼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반도체 붐이 일어나고 일본의 반도체 메모리 산업이 위협받았던 1990년 전후에 처음 나온 말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발전한 반도체가 태평양을 지나 미국의 서쪽에 위치한 일본에서 번성하고, 거기서 다시 서쪽에 있는 한국에서 융성하며, 그 다음에는 보다 서쪽에 있는 국가/지역으로 옮겨갈 거라는 소린데, 한국 다음의 유력한 후보는 중국입니다.

 

이 시나리오는 빗나갔습니다. 실제로 반도체 붐이 일어난 건 중국 대륙이 아니라 중화민국-대만이었거든요. 하지만 반도체 붐이 서쪽으로 향한다는 속설이 죽진 않았습니다. 대만은 한국의 서쪽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대만의 서쪽에 있는(?) 중국에서 반도체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도체 제조 장비의 대형 공급 업체인 KLA-Tencor의 CEO, Rick Wallace는 반도체 업계 이벤트 SEMICON CHINA 2018의 오프닝 강연에서 The Geographic Evolution of Semiconductor Industry : From 1970 to 2020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습니다. 여기에선 지난 50년 동안 반도체 산업이 크게 발전한 지역을 소개했습니다.

 

 

1970년대: 미국의 시대
　

 

반도체 산업이 시작된 곳은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입니다. 1970년대의 일이죠. 미국이 기술 개발과 사업 확대를 견인하고, 일본이 이를 뒤에서 따라가는 식으로 반도체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1970년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3/4가 미국 반도체 업체(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이 차지했습니다. 일본 기업은 1/4 미만이었지요. 1975년에 반도체 업계 매출 상위 10개 중 미국 기업이 8개를 차지했습니다.  

 

1980년대: 일본의 시대

 

 

반도체 제조 국가/지역별 시장 점유율. 하늘색이 미국. 녹색이 일본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DRAM에서 미국 반도체 업체를 빠르게 잡아나갔습니다. 전세계 반도체 시장은 미국과 일본으로 양분됐습니다. 1988년 반도체 업체 매출 순위 상위 10개 중 일본 기업이 6개를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때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기세는 아주 좋았습니다. NEC 1위, 도시바 2위, 히타치 3위, 후지쯔 6위, 미쓰비시 8위, 마쓰다 9위. 이들 6개 회사는 모두 DRAM 제조업체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한국의 시대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한국의 반도체 제조사가 일본 업체들을 빠르게 따라잡습니다. 시작은 역시 DRAM이지요. 1990년대에는 한국 DRAM 제조업체가 개발과 양산에서 일본 업체들을 모두 뛰어넘습니다. 그 중 가장 앞선 곳은 삼성전자. 반도체업체 매출 순위에서 삼성은 1991년에 12위, 1993년에 7위로 10위권에 진입하고. 1995년에 5위, 1997년 7위, 1999년 4위로 순위를 서서히 올렸습니다. 2002년에는 반도체 매출에서 인텔에 이어 2위, 이후 2016년까지 이 자리를 유지하다가 2017년에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합니다.

 

 

2000년대: 대만의 시대  

 

 

대만 파운드리가 큰 비중을 차지. 사진은 대만 TSMC 위주로 소개

 

 

1981년~2017년의 국가/지역별 반도체 제조사 매출. 단위는 10억 달러.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 반도체 업체와 거대한 팹 실리콘 파운더리가 주목을 끌게 됩니다. 이 중 반도체 팹 실리콘 파운더리, 즉 생산 업체를 대표하는 기업이 대만 TSMC와 UMC입니다. 특히 TSMC는 생산 규모에서 세계 최대의 반도체 제조 공장이 되면서, 첨단 기술 개발에서 반도체 산업을 견인합니다. 

 

 

2010년대: 일본의 몰락, 한국/대만의 발전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반도체 제조사 점유율. 하늘색이 미국, 회색이 유럽, 녹색이 일본, 노란색이 대만, 보라색이 한국.

 

그럼 2010년대는 중국의 시대인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아닙니다.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점유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대만과 한국 업체의 점유율이 늘어났습니다. 미국과 유럽 기업의 점유율은 1980년대 이후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40% 정도를 계속 유지합니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크게 변한 건 아시아 기업의 점유율입니다. 1980년대에는 일본이 미국을 넘어 50% 가까이까지 올랐으나, 1990년대 이후엔 점유율이 떨어져 2010년대에 한국과 대만 기업에 밀렸습니다. 중국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나름대로 점유율을 차지한 건 2000년대입니다. 2010년대 중국 점유율은 늘었으나 일본이나 유럽 수준은 아닙니다.

 

2020년대: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인가?

 

 

세계 각 지역의 반도체 제조 공장(Fab) 신규 착공 수. 5년간의 변화 누적입니다. 

 

 

중국 각 지역의 반도체 제조 공장 라인. 하늘색은 생산 중, 녹색은 공장을 건설하거나 장비를 반입 중.

중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큰 점유율을 차지한다면 그 시기는 2020년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2010년대, 즉 지금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많은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서입니다.

 

우선 새로운 생산 기지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건설하는 곳이 중국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 국가/지역별로 반도체 생산 기지 건설 착공 수를 보면 중국은 2000년~2004년에 25개를 넘어섰습니다. 2010년~2014년엔 50개. 2015년~2019년도 50개 가까이 될 전망입니다. 다른 나라/지역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숫자입니다. 

 

반도체 제조 라인의 구축은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신규 착공(공터에 공장 건설을 시작. 그린 필드)과 강화(이미 생산 라인이 있는 곳에 새로운 건물을 건설해서 생산 라인을 구축하거나, 증설을 위한 건물에 생산 설비를 반입해 생산 라인을 구축)입니다. 물론 전자가 돈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반도체 제조 장비 제조사는 물론, 반도체 재료 업체, 반도체 공장 인프라 구축 관련 기업은 중국 반도체 산업에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SEMICON CHINA 2018가 사상 최대의 참가 업체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신규 착공 외에 기존 생산 거점에서 생산 라인을 늘리는 작업도 중국 각지에서 계획됐습니다. 중국 해안 뿐만 아니라 내륙에서도 생산 라인 강화가 진행 중입니다.  

 

 

반도체 IC 설계 회사가 증가

 

 

중국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건 제조 공장만이 아닙니다. 반도체 설계 기업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설계 도구 공급업체인 Mentor의 CEO, Walden C. Rhines는 2016년 중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팹리스 반도체 업체)이 전년의 2배 가까운 1362개로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반도체 디자인 기업의 수가 2012년 518개, 2013년 583개, 2014년 681개, 2015년 715개로 상당한 기세로 증가 중입니다.

 

 

팹리스 반도체 회사가 늘어난 것 외에 규모도 급격히 커지고 있습니다. 2006년에는 직원 수가 50명이 채 안되는 기업이 67.7%를 차지했습니다. 2/3가 소규모 기업이었다는 소리죠. 직원 수가 100~500명인 회사는 9.8%, 500명을 넘는 회사는 0.4%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015년에는 직원 수 100~500명인 기업이 43.3%를 차지했고, 500명을 넘는 회사도 6.1%가 됐습니다. 반면 50명 이하는 17.4%로 떨어졌습니다.

 

온갖 반도체 제품을 중국에서 제조

 

중국에서 중요한 점은 또 있습니다. 개발하는 제품이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반도체 메모리 제조 업체가 주목을 받지만, 중국은 반도체 메모리 제조 업체가 원래 없었습니다. 최근 들어 외국계 반도체 메모리 공장이 겨우 가동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중국계 반도체 메모리 제조 업체는 거대한 설비 투자와 연구 개발 투자로 외국계 반도체 메모리 제조 업체를 조만간 따라잡을 기세입니다. 주로 공략하는 분야는 DRAM과 낸드 플래시 메모리입니다.

 

그리고 메모리 이외의 반도체, 즉 커스텀 로직 IC나 마이크로 컨트롤러(MCU), 혼합 신호, 광 반도체, MEMS 센서 등의 반도체 기업들이 팹리스 형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팹리스 반도체 업체의 증가는 반도체 파운드리의 수요 증가로 이어집니다. 중국의 반도체 파운드리는 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SMIC와 HLMC, 외국계는 TSMC와 글로벌 파운드리가 중국 내에서 생산 라인을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급격하게 성장시키는 힘은 투자입니다. 5년 둥안 중국 중앙 정부는 200억 달러, 지방 정부와 민간 자금은 970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대게는 메모리 제조사, 파운드리, 팹리스 기업, 연구 기관입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도 중앙 정부의 주도로 중국에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지요. 반도체 산업은 기술 산업이라 지속적인 자원(자금, 인력, 생태계)의 투입이 필수입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행방을 좌우하는 건 사실 반도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반도체의 고객인 중국의 전자 산업입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전자 제품 생산국가가 됐기에, 현지에서 반도체 산업의 존재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이 급속하게 확대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자본이 중국이냐, 외국이냐, 아니면 합작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더 두고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