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로운 기술력으로 무장한 신제품이 출시되면서 구형 제품들은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류를 잘 따라잡는 사람들, 얼리어댑터, 그리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일이지요. 베르메르가 인텔을 후드려패고, 암페어와 빅 나비가 줄 서있는 구매자들 사이에서 물량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와중에도 어디선가 오래된 시스템들은 묵묵히 제 할일을 하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단순히 컴퓨터에 큰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사용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서 고장나기 전까지 계속 사용하는 경우도 많죠. -참고로 저는 CPU가 고장나는 경우를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본 적이 드뭅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구태여 제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일부러 구형 시스템을 찾고, 깨끗이 닦고 수리하여 새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은 하드웨어에 많은 관심을 줄 수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론이 길었군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 조명할 부분은 제목에서 볼 수 있다시피
"구형 시스템으로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입니다. 발단은 우연히 입수하게 된 지인의 컴퓨터, 그것도 창고에 틀어박힌 채 몇 년이고 먼지만 쌓여가던 컴퓨터를 제가 대신 받아가게 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전면 패널에 있는 USB 2.0 포트와 상단의 3.0 포트, 팬 컨트롤, 그리고 특유의 서버실 분위기를 풍기는 쿨링팬 자리까지.
00년대와 1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보편적 케이스 디자인입니다.
이 시절에는 네이티브 USB 3.0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드물었기 때문에,
별도의 꼼수를 써서 작동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렇게 케이스 패널에서 보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죠.
개인적으로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번 무언가를 거쳐가는 방식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런 류의 케이스는 아예 쓰질 않았거든요.
보드 IO에 집중해 봅시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여러가지 포트들이 보입니다. 요즘엔 고급형 사운드카드에서도 빠지는 추세인 S/PDIF 광출력 단자가 보드에 들어가 있고, IEEE 단자도 많이 있습니다.
2.0보다 속도가 빨랐다고 하지만, 저는 이 단자를 써본 적이 없네요. 예나 지금이나 USB의 편의성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얼핏 봤을 때 지금과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하나만 빼고요. 그것은 IDE 케이블입니다. 아마 요즘 학생들 -라고 하니 제가 엄청 나이들어보이네요. 어... 어린 친구들?- 아무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꽤나 있을 겁니다. SATA 케이블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하드 디스크 케이블은 저렇게 두껍고 비효율적인 선을 사용했습니다.
읽기 쓰기도 느리고, 무겁고, 뜨겁고, 컴퓨팅 능력이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동안 실질적인 체감 속도는 IDE 하드가 다 잡아먹고 있었죠. 컴퓨터를 켜고 윈도우가 나오기까지 4분 이상 걸린다고 하면, 2020년의 채-신 기술 이용자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 없었을 겁니다. 뭐, 그 시절이라고 해서 느린걸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요. 다른 대안이 없었을 뿐.
메모리는 DDR2 2GB 메모리가 4개 장착되어 총 8GB를 사용 가능합니다. 이 당시엔 꽤나 고사양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4GB 정도가 평균적이었니까요. 또한, 800MHz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작동합니다.
기본 쿨러를 떼 봤습니다. 구리심은 없지만, 놀랍게도 써멀이 아직도 굳지 않고 남아있네요.
팬 상태도 매우 깨끗합니다.
컴퓨터도 세월 때문에 전체적으로 녹이 슬었을지언정 보존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관리를 열심히 했었거나, 창고의 습기 관리가 잘 되었었나 봅니다.
PC방에서도 매우 자주 볼 수 있었던 GTS 250입니다. '국민 글카'의 연장선인 750 Ti 정도의 위치였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부품은 괜찮겠지만 이 친구가 잘 작동할지 의문입니다.
메인보드를 적출했으니 자세하게 살펴 보도록 합니다. 이것저것 많이 달려 있네요. 노출된 히트 파이프가 인상적입니다. 요즘에는 방열사지 9층철탑을 쌓아 올리는게 트렌드이기 때문에 쉬이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파랗게 도색된 기가바이트 방열판과 대비되는 노랑-빨강의 메모리 슬롯. 역시 검정 일색인 요즘에는 드문 색상이죠.
파워 서플라이도 뜯어냈습니다.
FSP의 500W 파워. 싱글 레일. 상태만 멀쩡하다면 지금 써도 손색 없겠군요.
보드를 깔끔하게 청소한 뒤, 조심스럽게 CPU를 꺼냈습니다.
구형 시스템을 건들 때는 가장 조심하셔야 되는 순간입니다. 멀쩡하게 잘 동작하던 CPU도 분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이를테면 급사- 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Intel 코어 2 쿼드 Q9550. 동작 클럭 2.83GHz. 12MB 캐시, 45nm 공정, TDP 95W.
이제 GTS 250을 분해해봅시다. 나사 4개만 풀면 손쉽게 분리 가능합니다.
히트파이프가 코어에 맞닿는 구조일 줄 알았는데 베이스플레이트까지 있네요. 마음에 들었습니다. 각 소자들의 크기에서 상당한 세월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HDMI 포트는 지원하네요. 써멀 재도포 후 다시 장착해 줍니다.
단순히 부팅 여부만 알아볼 것이 아니라 거실에 두는 공공 컴퓨터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케이스도 새로 주문했습니다. 섀시가 얇아서 군데군데 움푹 들어가 있긴 하지만, 2만 원짜리 치고는 디자인이 나쁘지 않네요.
과정을 스킵하고 조립을 끝냈다는 결과만을 남겼습니다. 선정리는 간단하게.
나름 이쁘군요. 그래픽 카드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바람에 패널에서 뜯은 철조각으로 지탱해 줬습니다. 이것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공간이 여의치 않아 책상 밑에서 간단하게 부팅해 봤습니다. 잘 되는군요.
보조 모니터로 활용중인 전자액자의 모습입니다.
기가바이트 울-트라 듀-라블 쓰리 메인보드.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이오스입니다. 사실 CMOS라고 부르는게 정확하겠네요.
직관적이다 못해 네모 투성이인 UI, 고향집에 온 것 같은 파란색 배경이 일품입니다. 살짝 오버클럭이 되어 있었는데, 지인분이 그렇게 세팅해놨다고 들었습니다. 세팅값이 남아있다는건 수은 전지도 멀쩡하다는 뜻이네요.
그건 또 그거대로 놀랍습니다. 앞으로 더 오래 작동해줘야 하기 때문에 모두 디폴트 세팅으로 두겠습니다.
모든 장치가 이상없이 동작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Q9550의 특이점이라면 L2 캐시가 무려 12MB나 탑재되어 있다는 점인데, 웬만한 코어 i7 시리즈의 L3 캐시 사이즈보다 큽니다. 물론 요즘 CPU들의 IPC값에는 당연히 못 미치지만, 출시 12년이 지난 오늘날의 윈도우 10에서도 사용감에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본체인 3700X와 비교해봐도 3배의 차이가 나는군요. 물론 단순 수치 비교일 뿐이니 재미로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실사용은 어떤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테스트용 게임 하나와 3DMark를 설치하는데 이용률 86%를 찍는 모습.
초당 25MB의 데이터를 처리하기엔 살짝 버거운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인터넷 서핑과 다운로드, 프로그램 설치에 있어서 요즈음의 컴퓨터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CPU-Z로 보는 상세 정보.
컴퓨터 업계에서 11년의 세월은 과학에서 마법이 되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Q9550 vs 3700X.
3700X가 언더클럭 되어있긴 하지만 싱글 점수도, 멀티 점수도 당연히 압승입니다.
그래도 요크필드가 6년 뒤에 출시된 카베리 7850K는 이깁니다. 그때는 AMD의 암흑기였으니...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3DMark를 돌려보려 했지만, FAIL.
GTS 250이 발목을 잡습니다.
좀 전에 설치했던 크라이시스 2 (2011년 출시)는, 메인 화면에서도 11프레임이 나와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했습니다.
번외편 : 그래도 그래픽 카드가 좋으면 쓸만하지 않을까?
지원투수 GTX 970 등장.
하스웰 시스템을 쓰던 시절에 저와 함께하던 친구입니다.
요크필드 할아버지와도 잘 어울리는 윈드포스 손주.
이제 파이어 스트라이크를 돌려봅시다.
파스 일반판 완료. 그래픽 점수는 970의 것이니 무시하고, 콤바인 스코어는 2,851이 나왔습니다.
CPU와 함께 일을 해야하는 구간에서 점수 하락폭이 상당합니다.
그래도 크라이시스 2는 최하옵 60~100 정도로 나오더군요. 역시 최적화 하나는 끝내주는 게임입니다.
결론
Q9550으로 여러가지 사용해보면서 사실 좀 놀랐습니다. SSD 하나 교체한 것 외에는 12년 된 부품들을 그대로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인터넷, 유투브, 디스코드, 오피스 프로그램, 포토샵이나 라이트룸까지도 적당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물론 3700X로 진행해야 하는 실무 작업들은 무리였지만요.-
게임도 그때 당시에 나왔던 것들은 당연히 잘 되고, GTX 970을 장착한 뒤로도 약간의 병목이 있긴 했지만, 적당한 사양 타협으로 대부분의 게임을 편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20년이 저물고 21년이 도래하는 이 시점에 '요크필드는 현역이고 가성비가 쩐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지인의 컴퓨터를 넘겨받았을 뿐, 일절의 지출이 없었기 때문이니까요. -다들 집에 남아도는 SSD나 쿨러 한 두개는 있잖아요?-
어쨌거나 곧 폐기처분 될 예정이었던 요크필드 고조할아버지는 이렇게 인터넷 뱅킹용 컴퓨터로 새 일자리를 얻어 다시금 재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품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그는 오늘도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요크필드는 08년에 발매된 코어 2 쿼드 시리즈의 마지막 제품입니다. 이 제품을 끝으로 코어 i 시리즈로 넘어가면서 인텔은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1위로 올라서게 되었고, AMD 불세출의 역작인 라이젠 시리즈 출시 전까지는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요 근래의 인텔은 꽤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인텔 CPU도 10년은 가는 듯 합니다. 도입부에서 말했듯 당장에 샌디브릿지~하스웰 시스템은 여전히 현역으로 굴러가는 입장이고 엄청나게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이번 테스트를 통해서 Q9550 역시 그 범주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애슬론과 펜티엄간 지방싸움을 끝내고, 인텔 제국이 건국되는 첫 단추의 의미에서요.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