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다들 아실 내용이지만, 지금 보니 이 포럼에 올라와줘야 할 것 같은 내용인데 의외로 올라와 있지 않아서 올립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지난 2018년 6월 18일 새로운 국제질병사인분류 11판(ICD-11)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각종 질병들을 분류하여 진료기록 관리나 통계 작성, 보험금 청구 등에 사용하기 위한 국제 표준입니다. 그런데 이 개정판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될 만한 변경사항들이 많았습니다. 한의학에 ‘전통의학’이라는 코드를 부여한다던가, 성전환을 원하는 사람의 코드를 기존의 ‘정신건강’ 분류에서 ‘성 관련 질환’ 쪽으로 옮긴다던지 하는 것 말이죠. ‘정신건강질환’ 분류 아래에 소위 말하는 “게임중독”을 가리키는 ‘게임장애’(6C51)라는 코드를 새로 만든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게임에 몰입하여 일상 생활의 최우선 순위를 게임에 두는 현상이 1년간(증상이 심각해 보이면 더 줄일 수도 있음) 지속되는 경우를 ‘게임장애’로 보겠다는 것이지요. 이 개정안이 WHO 총회에서 통과되면 2022년부터 전세계 각국에서 이 코드를 적용하기 시작하는데, 한국의 경우 적어도 2025년 이후에나 사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당연하지만, 게임계에서는 이 결정에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행위가 의학적 의미에서 “중독”이 될 수 있다고 인정된 것은 오직 도박밖에 없습니다. 이는 도박이라는 행동에 의해 분비되는 뇌내마약이 마치 진짜 마약과 같은 변화를 뇌에 일으킨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인데, 적어도 현 시점에서 비디오 게임이 그와 같은 중독성 변화를 일으킨다는 증거는 미미하지요. 따라서 미국심리학회 등에서는 정신의학계의 ‘게임중독’ 논의에 대해 비교적 회의적인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질병으로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류학에서는 질병이란 인간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이름붙이고, 원인을 지목하고, 예방법과 치료법을 만들어내어 공유할 때라야 비로소 성립되는 존재라고 봅니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병이 존재한다고 믿고 공유하면 실체가 없는 질병도 사람들이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닷가의 습한 바람에 장독(瘴毒)이라는 나쁜 기운이 섞여 있어서 장병(瘴病)이라는 질병을 유발한다고 믿었는데, 사실 이건 중국 남부 지방의 열대성 풍토병에 대한 기록을 조선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합니다. 한번 이런 식으로 원인이 지목되고 나면, 실제 원인은 전혀 다른 현상일지라도 사람들은 “이것이 문제다!”라고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요. 게임 업계에서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런 지점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WHO에서는 자신들이 게임중독의 예방이나 치료에 대해서는 명시한 바가 없지만, 게임장애 코드 등재 이후 게임중독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들이 새롭게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5월 25일, ICD-11 개정안은 WHO 총회 산하 B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오는 28일에 최종 발표가 이루어지면, WHO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보고 회원국들에게 이를 치료하도록 권고하게 되지요. 이와 관련하여, 크리스토퍼 퍼거슨 미국 스텟슨대 심리학과 교수는 “WHO 고위 관계자들로부터 아시아 국가들(아마도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정신과 영역에서는 ICD 질병분류보다는 자체적인 질병분류 및 진단체계인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을 더욱 중시하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DSM 5판에서는 “게임 탐닉”을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태’로 분류하고 있지요. DSM의 차후 버전에서는 과연 ICD처럼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게 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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