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아시지만, Fisher-Price는 유명한 장난감 브랜드이죠.
여기서 제작되는 장난감들은 대부분 유아를 위한 제품입니다.
이 브랜드로 이런 제품이 나왔다는게 잘 믿기지가 않기는 한데....
(솔직히 ODM 냄새가 살짝살짝 올라옵니다만)
바로, PXL-2000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 캠코더입니다. 실제 타깃층은 비디오 촬영을 좋아하는 Tech-Savvy한 10대라고 하네요. 그저 영상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비싼 VHS 캠코더를 쥐어주기란 쉽지가 않죠. 이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비구면 렌즈, 적외선 필터, CCD 센서, 커스텀 ASIC (산요 LA7360M), 오디오 카세트 매커니즘으로 구성된 간단한 캠코더 였습니다.
당시 PXL 2000 제품 광고는
https://www.youtube.com/watch?v=pvmK0y3H4-A
이 제품을 심도있게 분석하는 글을 기글에 써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생각이 딱 들었습니다.
작년에는 나무위키에 PXL-2000 문서를 제가 처음으로 생성하기도 했네요.
포장재가 굉장히 간지납니다.
PXL-2000은 2가지의 바리에이션으로 출시가 되었습니다.
우선, 모델 #3300은 $100의 가격으로 출시되었으며
- 캠코더 본체
- 스탠드
- 비디오 스위치 박스
- 비디오 케이블
- 전용 미디어 1개
- 사용설명서
- AA 듀라셀 건전지 6개
모델 #3305는 #3300에 4.5" 흑백 텔레비전이 추가되었으며 $150의 가격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참고로, 당시 실제 사용하였던 캠코더는 약 $1000 정도였습니다.
현재의 환율로 환산하면 약 $2000 정도가 되겠고요, PXL-2000의 경우 약 $300-400 정도겠네요.
이후 약 $210 정도로 가격이 떨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제품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총 400,000대 생산.
이유는 다름아닌 가성비.
일단 애들용 물건 치고는 꽤나 비쌌습니다. 어린이 영상 아티스트를 위한 대용품 정도로써 팔리긴 했지만...
그래도 성능이 Affordable했다면 그나마 많이 팔렸을 텐데, 이 정도 성능을 가진 기기를 $400에 살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없을 것 같네요.
그런데, 이 제품이 재미있는 점은 다름아닌 그 작동 원리에 있습니다.
80년대에 사용하던 일반적인 아날로그 비디오 레코더는
요로코롬 생겨먹은 VHS-C를 사용하였습니다.
1984년에 출시된 최신 영상매체인 Video 8도 꽤나 많이 사용되었죠.
그런데, 이 제품은
무려 컴팩트 오디오 테이프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이 주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테이프 종류의 저장매체가 어떻게 아날로그 자료를 저장하는지를 알아봅시다.
- 쓰기 헤드에는 변동하는 자기장이 형성됩니다.
- 테이프에는 자성을 띈 입자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 쓰기 헤드의 강력한 자기장을 받아, 테이프에 일정한 자기장 패턴이 그려집니다.
뭐 여기까지는 다들 흔히 알고 계실겁니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도 배우니까요.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 테이프가 천천히 이동할 경우, 기록 가능한 최대 주파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
- 테이프에 있는 입자 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 테이프의 이동 속도가 주파수를 감당하지 못할 경우 고주파 신호에 해당하는 입자는 그 신호를 나타내는 위치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애매한 위치에 남게 되어 신호를 기록할 수 없습니다.
- 테이프를 한번에 많이 움직일 경우, 짧은 주기의 고주파 신호를 기록할 수 있게 됩니다.
- 테이프를 한번에 많이 움직이려면 테이프를 빠르게 돌려야 되며 이는 테이프의 시간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날로그 오디오 카세트는 초당 4.76cm을 이동하며, 일반적인 헤드갭의 카세트는 약 12kHz까지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테이프가 이동하는 속력을 올린다면, 20kHz까지의 대역폭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게 되지만 테이프의 사용시간은 더 짧아지게 됩니다.
- 몇몇 카세트 플레이어의 경우 LP모드를 지원하는데, 이는 테이프를 천천히 움직여서 기록시간을 늘리는 대신 음질을 희생합니다.
- 영상은 음성과 비교하여 더 높은 대역폭을 필요로 합니다.
- 당연히 테이프가 빠르게 움직이면 고화질의 영상을 저장하는데 좋지 않을까요?
VHS 플레이어를 호기심에 뜯어 보고 장렬히 전사하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원통형 헤드가 비스듬하게 서 있습니다.
이 원통형 헤드가 끊임없이 회전합니다.
바로 앞에, 3가지의 중요한 팩트를 언급하였습니다.
- 영상은 음성보다 훨-씬 더 높은 대역폭을 필요로 한다.
- 대역폭을 확보하는 방법은 테이프를 빠르게 돌리는 방법밖에 없다.
- 테이프를 빠르게 돌리면 기록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식이 바로 Helical Scan, 나선형 스캔 방식입니다.
Helix가 나선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DNA 이중나선도 double helix.
비스듬하게 위치한 헤드가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회전을 하여 나선형으로 신호를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테이프 표면을 입체적으로 활용하므로 용량 낭비가 적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메커니즘이 복잡하여 신뢰도가 미약하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같은 대역폭의 정보를 저장한다고 하였을 때,
- 나선형 스캔 = 35mm/s
- 직선형 스캔 = 5800mm/s
무려 130배가 넘는 속도차이가 납니다. 아니 그전에 테이프를 1초에 580cm씩 씐나게 뽑아댈 수 있나?
백문이 불여일견.
헤드가 회전하는 속도가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텐데,
이는 그때그때 달라요 입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활용된 VHS는 NTSC기준 1800RPM의 속도로 회전합니다.
여기서 요 파란색 선 한개가 하나의 트랙이 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아날로그 비디오테이프는, 한 개의 트랙이 정확히 한 개의 필드가 됩니다.
NTSC 기준 1/60초. PAL은 묻지 마세요. 이 규격을 채용한 국가들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싫어합니다.
'필드' 와 '프레임' 은 서로 다른 개념이며 위를 참고하시면 이해가 빠르겠네요.
아, 여기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갈게요.
동영상을 일시정지하거나 되감을 때
영상이 위와 같이 깔끔하지 않게 나오는 이유는,
헤드의 각도는 일정하면서 테이프의 이동속도가 달라져서, 헤드가 정확히 1개의 필드를 읽지 못하고 두개 이상의 필드를 동시에 읽어 버리거나, 필드가 있는 부분과 아예 어긋나 버려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하나의 프레임에 다른 필드가 보이거나, 아니면 위 그림처럼 아예 노이즈가 생겨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꼬마 공주 유시>를 감상하면서 가장 이해가 안 가던 부분이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상, 천계의 기술은 뛰어나며 정확성을 위해 모든 일을 로봇이 처리합니다. 이 정도 기술수준을 가진 로봇이, 영상 기록에 테이프 기반의 아날로그 시스템을 쓴다는건 애초에 말 자체가 안되죠. 아마도 VHS를 많이 사용하던 2003년 당시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론으로 돌아가서,
컴팩트 오디오 테이프에는 원통형 헤드도 없고 필드와 프레임도 트랙도 없습니다.
그저 멈춰있는 헤드와 얇디얇은 테이프만이 존재할 뿐이죠.
3가지 팩트, 다시 체크하고 갑시다.
- 영상은 음성보다 훨-씬 더 높은 대역폭을 필요로 한다.
- 대역폭을 확보하는 방법은 테이프를 빠르게 돌리는 방법밖에 없다.
- 테이프를 빠르게 돌리면 기록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여기다가 한가지 팩트를 더 추가해 줍시다.
- 컴팩트 오디오 테이프는 직선형 스캔 방식을 사용한다.
따라서 PXL-2000이 담을 수 있는 대역폭은 굉장히 한정적이었습니다.
1초당 580cm씩 씐나게 뽑아대야 간신히 VHS급 화질이 나오는데,
PXL-2000은 429 mm/s의 속도로 테이프를 이동했습니다.
아 이거, 결코 느린게 아닙니다.
일반적인 카세트 테이프의 표준 재생속도가 47.6mm/s임을 고려하면,
약 10배 차이입니다.
여전히 이해가 안가신다고요?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서 3초에 1미터씩 한번 뽑아보세요.
그게 PXL 2000용 테이프가 움직이는 속도입니다.
굳이 그러기 전에 데크에 테이프를 넣고 FF 버튼만 눌러봐도 알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하여, PXL 2000은
- 120*90 해상도
- 흑백 영상
- 초당 15프레임
- 60분의 테이프에 3.5분 영상 기록 가능.
- 모노 오디오 녹음. 한쪽 채널이 영상 저장에 사용
의 영상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RF단자로 출력되며 출력 영상물은 LPF를 거쳐서 적어도 눈이 버틸만한 화질이 나옵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테이프의 특성상, 제조사는 크롬/메탈테이프를 권장하였으며 실제로도 이것들이 아니면 잘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크롬테이프는 일반 테이프에 비해서 가격이 꽤나 비쌌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모전력도 높아서 건전지 6개도 순식간에 엔꼬났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L5Hp9IUMKk
눈이 버틸 수 있나요?
그 외에도, <Strange Weather > 라는 영화는 PXL-2000만으로 촬영되었으며 그 외에도 영화 등에 자주 출연했다고 하네요.
2019년 현재로서는 크롬 테이프와 RF단자를 사용하는 제품군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다가 다른 아날로그 출력포트를 추가하여 영상을 촬영하지 않고도 재생 가능한 개조품은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어서 거래되고 있으며, 구형 테이프 매커니즘의 고질병인 벨트 문제와 카메라 센서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이후, Fisher-Price는 Mattel의 브랜드가 되었고, Mattel에서는 VideoNow 등과 같은 어린이용 전자완구를 출시합니다.
이 -NOW시리즈 중에는 카메라 제품도 있으며 PXL 2000의 정신적 후속작 취급해도 좋을 것 같네요.4
만약 제가 70년대에 태어났더라면, 저 물건이 아주 가지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저걸 사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는제 수집 목록에 별로 넣고싶지는 않네요.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