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io DATA BANK 시리즈 손목시계가 예전에 꽤 많은 인기를 끌었엇죠. 지금도 카시오 계산기 시계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 모델은, 일정 및 연락처 저장 기능을 메인 기능으로 내세우는 일종의 전자수첩입니다. 계산기가 없거나 음성 녹음 기능이 포함된 바리에이션도 있었으며, 이메일을 저장 가능하고 Duplex LCD를 장착한 e 데이터 뱅크 모델 역시 후속기로 출시되었습니다.
근데 이거 구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DBC-610, 1985?년 출시. 오리지널 모델)
이 모델을 베이스로 하여 수많은 파생 모델들이 출시되었습니다. 30초 녹음 및 전파 수신기능을 탑재한 모델, 키보드를 제외한 모델 등.
원가절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쩌면 비슷한 포지션의 타사 시계뿐만 아니라 동일 시기의 핸드헬드 전자수첩에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150개의 연락처 저장
- 암호를 설정하여 사생활 보호
- 일반적인 쌀집계산기에서 지원하는 모든 기능 지원
- 뒷판 커버 체결 경고
- ROM에 자료가 저장되어 배터리를 교체해도 자료가 손실되지 않음
이 시계가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이 꽤 재미있습니다. 설명서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해 보자면,
- 뒷판 커버를 여십시오.
- 뒷판을 열었을 때 "CLOSE" 가 표시될 경우, 뒷판을 다시 닫으십시오. 몇 분을 기다린 뒤 다시 시도하십시오.
- 배터리 홀더를 제거하시오.
- 전부 사용한 배터리를 제거하고 새 배터리를 넣으십시오.
- 배터리 홀더를 교체하시오.
- AC 접점과 배터리의 +극을 쇼트시키시오.
- 역주) 마이크로프로세서 리셋을 위해서입니다. 카시오의 모든 시계는 전지 교환 후 리셋을 권장함.
- 뒷판을 다시 닫으십시오.
- 뒷판을 닫은 뒤 15초가 지나도록 액정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1번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시오.
- 시계의 내부 메모리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액정에 'WAIT' 가 들어옵니다. 이 체크 과정은 최대 약 12분 정도 지속됩니다. WAIT가 표시되는 동안 시간을 설정할 수는 있지만, 다른 기능의 사용은 제한됩니다.
- 경고!
- 'SORT' 가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동안 뒷판을 열지 마세요. 만약 열 경우 데이터가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잘 보신다면, 당시 휴대기기에 사용하던 일반적인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전지를 분리해도 데이터가 보존됨을 홍보하는 것으로 보아 램디스크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플래시 메모리처럼 바로바로 저장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어디까지나 뇌피셜이며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데이터뱅크 시계 콜렉터들도, 내부의 메모리 시스템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에 출시된 초소형 기기에 마땅히 적용될 만한 메모리는 EEPROM밖에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느려터진 EEPROM의 입출력 속도와 상대적으로 높은 전력 소모량을 보정하기 위해 연락처 모드에서 저장한 데이터를 램디스크에 잠시 저장했다가 시계 모드로 되돌아올 시 자료를 EEPROM으로 옮긴다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가설으로
뒷판 커버를 열 시 CLOSE가 표시되면 몇 분을 기다려야 한다, WAIT가 최대 12분 정도 표시될 수 있으며 이때 데이터 검증을 한다는 설명서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계의 뒷판 커버 체결 스위치는, EEPROM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뒷판이 열릴 경우 데이터의 전송을 멈추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만약 EEPROM으로 자료를 옮기는 도중 부득이하게 전지가 빠진다면 내부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설로는 경고 항목의 SORT 표시 중 뒷판을 열면 안 된다는 설명과 뒷판을 열 시 CLOSE라는 문구를 표시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모델이 80년대 중후반 물건이고 당시 전자수첩들도 저가형 모델에는 램디스크를 적용했다는 점과 이 모델보다 10년이나 늦게 출시된 PDA들도 같은 문제로 곶통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뛰어난 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80년대 버블 갬성이 그대로 농축된 물건이죠. 심지어 이 물건은 엄지손가락 1.5마디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E-DATA BANK. 개인정보 저장기능이 업그레이드되었음.
간이 녹음기 모델
(QW-761, 위로 젖혀올려 사용하는 모델.)
경쟁 모델로는 Timex의 Data Link가 있겠습니다. 얘는 밖에서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아닌 PC와의 연동을 위해 설계되어 입력장치는 위의 카메라가 전부입니다.
사용법은 전용 소프트웨어를 Windows 3.1 / 95 / 98에 설치한 뒤 현재 시간 및 스케쥴과 알람, 직접 제작한 알림 벨소리 및 간단한 시계용 프로그램을 입력한 뒤 모니터에 시계의 카메라를 비추면 끝.
이 카메라는 모뎀... 이라기보다는 뎀 (모듈레이터가 없으므로 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구사항은 CRT 모니터인데, LCD의 경우 카메라가 디스플레이 인식을 못 해 디모듈레이팅을 할 수 없다는 것 정도가 있겠네요.
동양권에서는 그닥 인기를 얻지 못한 물건이었습니다.
근데 요즘은 전부 다 단종되고 대충 껍데기 흉내만 낸 물건밖에 안 남았습니다.
(DBC-611)
남아 있는 것이 DBC-611에 들어가는 모듈을 기반으로 한 모델인데, 저도 저걸 갖고 있습니다. 한문제 차이로 과학경시 떨어진 뒤 화풀이의 대상이 된 뒤부터 액정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지만,
원래의 데이터뱅크 기능 일부가 남아있지만 기대할 수 없는게, 일단 연락처 저장이 25개밖에 안되고... 램디스크고 자시고를 떠나 키패드로 알파벳 입력이 불가능합니다;;; 파란색 버튼을 눌러서 A부터 Z까지를 왔다갔다해야 되므로 그냥 안쓰느니만 못한데다가 저 모델이 출시된 시점이면 모두가 휴대폰 하나씩 들고 다니던 시기라 필요가 없었겠지요.
이 시계를 차면 엄청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간지가 나며 Nerd한 느낌을 줄 수 있고, 주변인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Nerdity를 원한다면 차라리 이베이에서 DBC 610을 찾아댕기는게 어떨까요? 가격은 100달러 이상은 각오해야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