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toyokeizai.net/articles/-/140240 기사원문은 여깁니다.
생활곤궁지원을 하는 사회사업가인 필자는 젊은이들에 대한 지원사업 중에 항상 듣고 있는 말이 있다.
' 왜 젊은이들은 일하지 않는가? '
' 게으름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
' 지원하는 것으로 지원받는 사람의 게으름을 조장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
등등이다. 요약하면, '젊은이들에 대한 지원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인 것이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놓여진 현실의 녕엄함이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젊은이니까 노력하면 돌아온다' 라는 주장 등이 넌센스라는 것을 증명해나가고자 한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노동만능설
젊은이는 일하면 자립할 수 있다. 일만 할 수 있다면 번듯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신화, 즉 노동만능설이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다. 일을 하면 그것에 합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고, 그 자금에 의해 번듯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금을 받기 위해 젊은이들은 어떤 직장에 들어갈 지, 어떻게 경력을 쌓아나아갈 지 등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력에도 고민한다. 그렇기에 취업준비생들에게 인기있는 직장은 역시 대기업이며, 공무원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대기업에 입사한다거나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다. 모든 사람이 번듯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확보하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 일하더라도 번듯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보증되지 못한 직종도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종신고용이 아니기에 불안정한 취직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여금이나 복리후생이 없는 직장도 많고 일하는 것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현상이 지금의 노동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워킹 푸어 문제' 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일하더라도 빈곤이 공존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본인이 저학력이라거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낮다거나 해서가 아니다. 대학을 졸업했더라도 평범하게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급속도로 곤란해지고 있는 것이다.
일은 가리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있다?
노동사회학자인 키노시타 다케오 씨는 이러한 젊은이의 고용에 대하여,
'경제계와 기업은 많은 사람을 일본형 시스템으로부터 배제하는 것, 즉, 젊은이를 희생하여 일본형 시스템을 보존하려 하는 것입니다(젊은이의 역습-워킹푸어로부터 유니온으로-(순보사).'
라고 밝히고 있다. 즉, 경제계나 기업은 의도적으로 젊은이의 고용을 붕괴시켜 왔던 경위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일해도 '힘드는' 상황은 노동사회학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는 것이다.
블랙 기업의 대두 역시 젊은이들의 곤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평범하게 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못하고 단기간 내에 쓰고는 버려지고, 그러한 것을 통해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일으켜 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는 것도 결코 낯설지 않다. 그렇기에 '일하면 어떻게든 된다' 는 ;노동만능설' 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마 거기가 블랙 기업이라도...
또한 이러한 노동만능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는 젊은이나 노동하기를 원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게으름뱅이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 빨리 일해야 하고, 때로는 '눈높이만 낮추면 일자리는 어디에든 있다' 고 젊은이를 노동시장에 서둘러 내놓는다. 설사 서둘러 내놓아진 젊은이들이 들어가는 곳이 블랙 기업이라 하더라도...
젊은이들의 일부는 원치 않는 비정규직이나 블랙 기업에 오랫동안 몸담은 끝에 '결국은 보람 없는 일이었다' 고 이미 체감해 버리거나, 이후에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눈높이' 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사치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
안심하고 일할 수 없는 고용이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노동에 대한 인센티브가 솟아나지 않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면 '뭐든 좋으니 빨리 일을 시작하라' 는 걸 절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열악한 노동환경 하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을 안다면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언제까지나 나빠진 채로 있게 된다. 안심하고 실직하고, 또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사회환경이라면 열악한 노동환경이 지금 같은 수준으로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실한 사회보장을 자랑하는 다른 선진국에서는 임금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살아갈 수 있기에 가혹한 노동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지불되고 있는 것이며, 사람을 혹사하는 기업은 도태된다. 사회보장이나 사회복지가 늦어진다면 실직 후의 빈곤으로 인해 조급하게 노동시장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블랙 기업을 간신히 그만뒀지만 바로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생활이 곤란해지기에 급하게 다시 취직한 기업조차 블랙 기업이었다는 이야기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일자리를 천천히 선택하고, 거기에 대한 준비를 여유를 갖고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이다.
노동시장의 열화는 젊은이들의 노동의욕을 빼앗아 간다. 어떻게 일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자격증 몇 개를 따 놓은 사람들, 자기계발에 관한 책을 열독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노동시장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그들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또한, 설령 일하지 않는다 해도 젊은이들에게는 부모나 조부모가 있어 다소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가족이 도와주지 않겠는가 하는 신화(가족부양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 온 것처럼, 가족은 이제 젊은이들을 구제할 수 없다. 가족의 세대원이 축소되고 상호부조의 기능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세대 연수입도 감소추세에 접어들고 있고, 젊은이들의 부모나 조부모세대는 자신들의 생활에도 이미 '제 코가 석자' 이기 때문이리라.
가족에의 의존도 이제는 곤란
필자는 생활고에 처한 젊은이들의 상담을 받고, 연간 수십 건의 생활보호신청에 동행한다. NPO법인 전체에서는 이런 예가 무려 300건을 넘고 있다. 신청을 하러 가면 복지과 직원은 늘 '도와 줄 다른 가족은 없으신가요?' 라고 묻는다. 그러나 가족의 부양이 가능했던 사례는 아쉽지만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젊은이가 생활고에 처했어도 가족에게 기댈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가족에게 기댈 수 있었다면 NPO나 관청에 상담하러 올 일도 없지 않겠는가.
장학금을 빌려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대부분도 학생 자신의 학비부담이나 집으로부터 보내오는 생활비 등을 충분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가족이 상호부조를 할 수 있는 집이 이 일본에는 도대체 얼마나 남아있는 것일까 하고 탄식해 보아도 어쩔 수 없다. 고용의 불안정화, 임금과 연금의 감소, 물가의 고공행진 등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근근하다고 하는 집들이 보통이라 생각된다.
또한 비통한 일 중 하나. 가족 자체가 자신의 아이를 착취의 대상으로 하는 사례도 있다.
오랫동안 아동학대를 받아 왔거나, 충분한 양육이나 교육을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젊은이들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가족의 존재 자체가 따스한 것이 아니라 젊은이 본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기능해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독친(毒親 도쿠오야 학대 등으로 자녀에게 안 좋은 짓을 일삼는 부모를 통칭하는 일본식 신조어. 옮긴이 주)' 등으로 평하는 논조도 있을 정도다. 가족이 있어도 기대되는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가족관계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 쉽고, 동거나 지원을 원하는 것에 의해 문제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정신질환을 앓는 젊은이가 본가에서 생활하는 경우, 질환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부모가 일하기를 강요하는 것에 의해 과대한 스트레스가 생겨나는 등의 상담사례는 끊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꼭 도와주니까 괜찮아' 같은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 할 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가족과 따로 살고 싶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에 자유로운 생활을 방해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에 어찌 하면 좋을까 하고 상담을 받고 있다. 즉, '집에서 나갈 수 없는 젊은이' 의 고민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젊은이들 주변의 환경을 바라볼 때마다 가족에의 의존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두는 편이 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더구나 스무살을 넘은 성인을 가족이 언제까지 돌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이미 당연한 일지이만, 성인이 되었을 때 피로 이어진 사람 사이라도 일본에서만큼 부양하는 경우는 없다. 주로 부부 간이라든가 미성년인 자녀에 대한 부양의무 정도로 국한되고 있을 뿐. 성인이 된 후에는 생활이나 취업에 있어서는 정부나 사회적인 시스템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곤란하면 가족에게 기댄다' 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곤란할 때는 가족이 도와주면 된다는 논조는 결국 사회복지나 사회보장의 기능을 가족에게 전가시킨다는 것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 상태라면 가족이 공멸의 길을 맞게 되는 것을 물론 사회복지나 사회보장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족부양설은 위험한 전근대적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 후지타 타카노리 NPO법인 '홋토플러스' 대표이사
앞으로 이 분의 연재기사를 자주 번역해 올릴 생각입니다. 이번 호에는 '노력해도 소용없는 일들이 젊은이의 빈곤을 부른다-어른들은 쌍팔년도(고도경제성장시기) 식으로 말하지 말라' 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왔었네요.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