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교수님의 노예입니다.
이번 학기에 전자공학과 실습조교를 맡게 됐습니다.
C언어를 가르치는데 아직 포인터를 모르는 신입생 분들입니다.
그래서 실습내용은 되게 간단합니다.
그래서 쉽게 가르칠 수 있을 줄 알았고 크게 준비하지 않았는데...
1. 가르쳐주고 싶은게 많지만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printf에 float형을 인자로 넘기면 자동으로 double로 승격되는 이유가 c99 메뉴얼을 보면 가변인자에서 float형은 자동으로 double로 승격된다던지... 아직 함수도 배우지 않은 분들인데 가변인자가 어떻고 갑자기 C99 manual 내용이 나오면 알아듣기 어렵지요.
2. 중요한 내용을 강조해도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처음에 자주 실수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학생들이 리액션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몸소 체험해봐야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구나 하고 깨달은 계기가 됐습니다.
3.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하고싶은 얘기가 많지만 너무 어려운 내용은 배제하면서 수업을 하다보니 넘어가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고 말도 빨라졌습니다. 한번은 너무 빨리 나간 것 같아서 중간에 질문 있냐고 물어봤는데 매우 조용했습니다. 너무 뜬금없이 물어봤나 싶기도 하고 학생들이 별로 수업내용에 관심없는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제가 수업들을 때 교수님들이 질문 있냐고 묻는 심정이 이제서야 이해가 됐습니다.
4.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갑자기 IDE가 뻗는다던지 scanf는 위험하다고 아예 컴파일을 막아버린다던지... 분명 제가 처음 프로그래밍을 배울 땐 경고만 띄웠는데 말이죠.
5. 오류가 났다 하면 조교만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결방법을 다 알려줬는데 몇몇 학생들은 저를 불러놓고는 아무 말 없이 에러메세지만 가리키면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저는 "오류가 나서 이러이러한 것을 시도해봤는데 그래도 안된다."를 원했는데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본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만 제시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 알려줘야 하는지 고민됩니다.
저는 호의(?)로 처음엔 이런 실수를 많이 한다고 미리 알려줬지만 결국 오지랖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질문을 했을 때만 성실하게 답하고, 수업 내용은 기본에만 충실하는게 좋다고 느꼈습니다.
실습조교를 맡게 된 걸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인생경험(?) 측면에서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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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쭉 읽어보니 하나 생각나는게 있습니다. 저도 학부생 시절엔 교수님께 거의 질문을 안하거나 하더라도 수업이 끝나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쉬운걸 물어보면 공개 쪽팔림 당할까봐, 그리고 넌씨눈(...) 취급을 받을까봐 였죠. 이번 일로 참 많은걸 배우고 갑니다.
배우는 사람 입장으로서 이야기해 보자면,
어려운 내용을 처음 접하면 머리만 아프고 "뭔 소리하는거야?"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조하신다는 중요한 내용도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반응이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번 크게 데여 봐야 "아... 그게 그말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죠.
컴퓨터 조립으로 예를 들자면, DDR4가 어쩌고, 듀얼 채널이 어쩌고 "뭔 소리하는거야? 난 게임만 하고 싶은데."라는 반응이 나오겠죠.
원하는 게임하고 싶으면 메모리 용량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조립하는 놈이 느끼지 못하면 16기가 달 메모리를 4기가로 줄이고 남은 돈으로 모니터 크기를 키우겠죠.
메모리 부족 창이 뜨면서 게임창이 내려오고 캐릭이 누워봐야 깨닫게 됩니다.ㅋ
가르치는 일이나 배우는 일이나 둘 다 어려운 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