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술을 1년에 한번 마실까 말까 하는 사람인데,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냉장고에서 오래 숙성중인 맥주를 방금 하나 꺼냈습니다.
오늘은 일진이 영 사납군요 https://gigglehd.com/gg/12313925 바로 아래 글에서 사라진 길고 검은 것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1시간 넘게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며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날카롭다 못해 까칠하던 처음의 경계 태세는 온데간데 없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과연 그것이 나타났던 것일까?' '사실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 나는 아닐까?' 등등의 현실 부정 단계에까지 도달하며 마음가짐이 점점 헤이해져가고 있었는데요.
이제 다 때려치고 그냥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밖으로 끄집어낸 서랍장 옆의 전기 청소기 코드 사이로 그것이 배를 위로 까고 뒤집어진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게 다행이죠. 못 잡고 나왔다면 오늘의 공포는 길이길이 이어져 작업실에서 함부로 눕지도 못하고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려도 그것의 양식이 되지 않을가 두려워하며 공포에 떠는 삶이 계속됐을 텐데요.
휴지로 집어서 꽉 누르는 그 순간까지도 과연 이 안에 그것이 들어있는게 맞을까? 내가 집는 순간 옆으로 바사삭 하고 도망가서 다른 은밀한 곳에 숨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야망과 복수를 획책하고 있지 않을까? 등의 혐오스러운 공포가 소뇌 한구석에서 밀려왔으나, 그렇다고 해서 휴지를 펼쳐 그것의 더듬이와 다리 떨어져 나가고 내장이 짓이겨진게 확실한지 확인할 정도로 용감하진 않아서 그냥 버렸어요.
잘 훈련된 개도 아니고 그것이 누워서 배를 위로 보일 일이 없을텐데, 아마도 온 복도에 가득 퍼진 바퀴약 냄새가 그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거라도 한사발 하고 정신이 몽롱한 채로 기어 들어와서 숨어 있다가 결국 그 힘을 다하고 하필이면 여기에서 숨져 쓰러진 것을 멍청한 인간에게 발견되어 수습된 것이 아닌가... 맥스포스겔 유통기한이 한 5년 지났던 것 같았는데 효과가 아직도 괜찮다고 생각해도 될것 같네요.
어쨌건 뭔가가 하나 수습이 됐으니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물 대신 맥주를 마실 수가 있어서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