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일본은 옛부터 앙숙이었습니다. 일본은 무려 박혁거세 시절부터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도 이와이의 난(이 일로 큐슈 전체가 난리났습니다. 특히 큐슈는 한반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요.)을 사주하고 일본 왕자를 암살하려 하는 는 등 당하고 살지 않았죠. 삼국통일 과정에서 일본은 신라를 방해하려고 백강에 1000척이나 되는 함대까지 보내고, 이후로도 자신은 황제국이며 신라는 신하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이는 더 나빠집니다.
문제는 이때 일본은 불경, 인삼, 몰약, 향료, 사치품 등을 대부분 수입하고 있었는데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아라비아나 중국, 발해에서 직수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한반도에서 수입했는데 한반도는 신라가 평정했죠. 일본은 여러가지로 곤란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752년, 큐슈 다자이후에 김태렴이라는 신라 왕자가 70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합니다. 일본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묘의 방문이였고, 김태렴은 천황 앞에서 코가 땅에 닿을 듯 큰 절을 하고서는 신라 왕(시기상 경덕왕)께서 이제부터 일본을 섬기고 조공하겠다고 전하라 하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조공품으로 일본이 그토록 원하던 인삼, 불경, 향료, 사치품 등을 바칩니다. 거기에 조공을 바치고 남는 물건들은 일본 귀족들에게 팔기도 합니다.
조공책봉 관계상 조공을 받는 국가는 보통 책봉국에게 조공받은 물품의 몇 배 이상의 답례를 하고 후하게 대접할 의무가 있습니다. (조선도 그걸 이용해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뜯어냈었죠.) 일본도 마찬가지로, 워낙 감격해서 그런지 김태렴이 돌아갈 때 막대한 답례품을 줘서 보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신라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사신을 보내는데, 신라는 일본 사신이 전과 달리 오만하고 무례하게 군다고 쫒아냈고, 그때야 진실이 밝혀집니다. 사실 당시 신라 왕인 경덕왕은 아들, 즉 왕자 자체가 없었습니다. 김태렴은 사기꾼인 거죠. 일본의 욕망을 살살 긁으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겁니다.
이후 일본은 분풀이로 신라를 침공하려 했지만 당시 신라는 최전성기로 성덕왕때 일본이 300척의 배를 보내자 모조리 박살냈을만큼 힘이 넘쳤고, 발해 등 주변국도 돕지 않아서 흐지부지 됩니다. 단 이로 인해 신라와 일본간 공무역은 끊겨버렸고 장보고 등이 이끄는 상인 중심의 사무역이 번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