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전자 기기를 평가할 때 크게 세 가지의 분류로 나누는 편입니다.
1. 인간과 디지털의 상호작용을 방해하는 기기
2. 인간과 디지털의 상호작용을 방해하지 않는 기기
3. 인간과 디지털의 상호작용을 돕는 기기
현대의 전자기기는 한편으로는 디지털 세계를 위한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경험을 위한 중간 통로, 이른바 "터미널"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모든 측면에 있어 하드웨어의 성능상의 발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시대가 온다면, 지금처럼 핸드폰 하나, 랩탑 하나에 경제가 뒤흔들리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각설하고, 아직 그런 시기는 오지 않은 만큼, 전자 기기의 1차적인 과업은 인간과 디지털 사이에서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디지털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져가고 기계는 더 이상 그 세계를 버텨내지 못하죠. 또는 애초에 잘못된 디자인으로 스펙에 상관 없이 방해를 하기도 합니다.
1번의 예시 - 넥서스 5X. 이 게시판에서 제가 누누히 욕하고 욕하고 또 욕했지만 스마트폰을 통한 저의 디지털 경험을 1년 넘게 끈질기게 괴롭혀온 원수입니다. 툭하면 리프레시와 저장공간 부족으로 디지털 경험을 중단시키고 기계와 씨름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아예 멈춘 다음 리붓까지 하고, 그러다가는 아예 무한부팅으로 모바일 디지털 경험을 못 하게 만들기도 하고. 전자 기기가 이런걸 하면 안되는구나 하는 걸 1년 간 정말 착실히 보여준 기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2번의 예시 - 샤오미 미맥스 2. 미맥스2는 개성은 없습니다. 뻔한 디자인, 뻔한 입력장치, 뻔한 성능, 모든 게 예상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작동할지가 확실하고, 기계를 잡고 조작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않은 채 그냥 편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1세대와는 달리 잘 휘지도 않고, 스피커나 통화도 의외로 쓸만하고, 충전 속도도 빠르고, 확 튀게 불편을 주는 부분이 없습니다.
예전같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넥서스 5X에서 넘어온 이상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큰 화면 덕분에 핸드폰의 작은 화면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튀지는 않지만 못하는 건 없는 이런 모바일 기기가 흔치 않더라고요. 앞으로도 저는 6.44인치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듯 하네요.
전자기기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 자주 언급되는 "감성"이라는 단어를 개인적으로 참 싫어합니다. 뭘 말하는 건지 굉장히 부정확한, 뭉뚱그리는 언어니까요. 하지만 감성이라는 단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2번에서 3번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게 그거거든요. 상호작용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전자기기의 1차적인 목표라면, 그 다음 목표는 경험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걸 잘 하는게 애플이고, 요즘은 MS가 치고 올라오고 있지요. 저는 맥북은 안 써봤지만 서피스는 열심히 써봤으니, 서피스로 설명하겠습니다.
그래서 3번의 예시 - 서피스 (프로) 3입니다. 3을 쓰면서 논문을 쓰고, 공군 기훈단 들어가기 전에 팔았고, 나와서 동생 쓰던 깨진 놈을 다시 리퍼받았죠.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서피스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키감이 좋습니다. 타입커버3까지도 그냥 봐줄만한 정도다 했지만, 서피스3용 커버에서 쫀득하단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타입커버4 이후로는 아시던 대로입니다. 키보드를 치면서 좋은 감각이 옵니다. 더 치고 싶어집니다.
- 상황에 따라 원하는 대로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앉아서는 타입커버와 킥스탠드를 펴고, 돌아다닐 때는 킥스탠드를 접고 타입커버를 뒤로 젖히면 알아서 키보드 입력이 죽습니다. 펜을 집어서 스크롤링과 포인트 앤 클릭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몸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 화면 가장자리의 암부가 매우 어둡고 짙어서 베젤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서피스 라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원래 16:10만 써도 아래와 위로 레터박스가 생기고 확 튑니다. 그런데 서피스는 영상을 볼 때면 3:2 화면 위아래의 검은 레터박스가 자연스럽게 바깥과 이어집니다. 화면 자체가 가변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쉽게 검은 영역 바깥으로 벗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 확장성이 좋습니다. 미니DP, USB 3.0, 마이크로SD, 서피스 독을 쓴다면 서피스 커넥트 단자를 통한 여러 입력까지, 쉽게 다른 기기와 연결되고 쉽게 뻗어나갑니다. 특유의 암부표현과 이 확장성이 이어지면서 서피스는 쓸 때마다 사용자에게 화면 바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쉽게 주고, 화면 위에 보이는 정보에 쉽게 몰입하게 만듭니다.
결론은, 똑같은 작업을 해도 미맥스2에서 할 때와 서피스 프로 3에서 할 때가 다르다는 겁니다. 미맥스2에서도 안되는 건 없다지만, 웬만하면 서피스로 하고 싶어진다는 거죠.
1번 범주에서 저지르는 실수들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2번 범주에서와 같이 방해요소를 최대한 없애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몰입도를 높이려면 선명한 방향성과 많은 실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장 큰 회사들만 3번의 범주에 들어가는 기기를 만들 수 있고, 그나마도 100% 보장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런 기기들을 보면 늘 경외감이 듭니다. 이건 정말 만드는 데에 많은 공이 들어간 훌륭한 기기라는 생각이 들고, 단순한 전자기기 이상으로 생각하게 되죠. "팬심"도 거기서 나올 겁니다. 이런 경험을 선사하는 브랜드 및 회사는 여기밖에 없다, 라는 생각에 계속 찾게 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상하게 은색 알루미늄 무광 표면 중앙에 베어문 사과가 흰색으로 박혀 있으면 feel이 샘솟고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