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년 넘게 술을 사지 않았어요. 겨울철이라 운동량이 획기적으로 줄어서 (추위를 느끼며 달리기도 싫고, 추위를 참고 헬스장 가는 것도 싫고...) 체중 관리를 위해서는 식사량과 군것질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시 주류를 멀리했거든요.
이제 완연한 봄여름?기운이 느껴지는 때가 왔으니,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저도 제 즐거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병을 일단 아무 생각 없이 가져왔어요.
왼쪽 - 샤토 뒤 브로이, 칼바도스입니다. 이 지역의 사과로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만이 칼바도스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고 하죠. 꼬냑의 사과 버전입니다. 늘 손을 대고 싶었지만 술가게만 가면 보수적으로 변해서 늘 사던 위스키를 가져오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은 큰맘 먹고 질러봤습니다. 예전엔 저 병 안에 작은 사과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제 눈이 나쁜 건지 아니면 병입 정책이 바뀐 건지, 사과가 보이진 않네요.
마개를 열고 향을 맡아보면 과일 특유의 단내가 올라옵니다. 거기에...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과를 갖고 하다 보면 특유의 화학약품 향이 나는데, 그 냄새도 같이 올라오구요. 첫맛은 달짝지근하지만 뒷맛은 놀라우리만치 깔끔합니다. "좋아, 이만큼 마셨으니 이번엔 여기까지."라고 잘라내는 듯 딱 떨어지는 것이, Daily Dram으로 즐기기에 아주 좋습니다. 다만 증류주 중에선 단맛이 강조된 부류에 속하는 만큼, 함께 즐길 안주는 다소 제한되긴 합니다. 적당한 산미와 사과와는 다른 풍미를 가진 과일류.... 아니면 식전주로 괜찮을 것 같네요.
농도가 옅고 투명한 호박색이라 언뜻 황금빛으로도 느껴지는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병도 일반적인 싸구려 위스키 병과는 다른 디자인이라, 장식만 해둬도 약간의 만족감이 충족되구요.
오른쪽 - 파크모어 셀렉션. 병에 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싱글몰트이며, 구매처 설명에 따르면 와인 캐스크라고 하네요. 칼바도스 한 병만 사긴 좀 그런데... 하던 찰나에 와인 캐스크라는 설명에 낚여 함께 지르긴 했는데, 글쎄요, 그 유명한 카발란 등 유명 브랜드의 쉐리 캐스크도 한 번 맛보지 못한 비천한 혓바닥인지라 이렇네 저렇네 할 정도로 맛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옅은 호박색의 액체가 매력적인데, 풍미 자체는 일반적인 이 - 동네 저 동네에 다 있는 와인앤모X 할인가 기준 6만원 하는 - 가격대 기준으로 평이합니다.
싱글몰트, 스코틀랜드 위스키에서 흔히 기대하게 되는 피트향은 적당합니다. 제가 느끼기엔 블랙보틀의 두어 배는 되는 듯하며 라프로익의 약 절반~60% 정도인 것 같습니다. 첫맛은 초콜릿처럼 달달한데, 뒷맛은 바닐라처럼 부드러운 향이 올라오는 것이 오히려 버번 위스키 중에서도 나름 손꼽히는 이글 레어 같은 느낌입니다. 약간의 피트향만 더한다면요. (다만, 제가 싱글몰트를 탈리스커로 입문해 라프로익으로 정착했다는 다소의 편향성이 있긴 합니다.) 이것 역시 곁들일 안주로는 적당히 단것이 좋겠네요.
아무튼 생각 외로 괜찮은 만찬이었습니다.
앞으로 점심저녁은 긴축재정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