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21년 7월 16일 밤. 중고차를 사겠다고 마음 먹고 엔카와 케이카를 하루에도 몇 번씩 둘러보며 배기가스 흠 잡을 때 없고 성능 점검 기록부에 양호로 도배됐으며 상식 선에서 보험 이력과 소유주 변경 이력이 남아 있는데 가격까지 저렴한 환상의 중고차는 없는건가 뒤적거리기도 슬슬 지쳐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모 중고차 사이트에서 키로수가 좀 많긴 하지만(15만) 배기가스 0/0을 지키고 사고 이력도 없고(자가로 처리했을 수도 있지만) 원하는 옵션이 적당히 달려 있는(6:4 폴딩이 없었지만) 12년식 레이가 무려 550만원에 올라와 있던 것을 발견하고야 만 것입니다. 이 오밤중에 전화해서 받는다면 그건 허위매물을 일삼는 사이트일테고, 나름 메이저 사이트에서 봤으니까 내일 아침에 전화하리라고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었죠.
토요일 아침 9시가 되자마자 의관정제하고 목욕재계할 틈도 없이 전화했더니 그 차가 있데요. 문제는 그 다음인데, 저는 김포공항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 소음에 시달리지만 지원금은 하나도 안 나오는 동네에서 살고 있고, 그 중고차는 강남구에 있다는 거. 말이 똑같은 서울이지 서울을 동서로 횡단해야 하는 몹시 귀찮은 여정이었으나, 수원이나 분당까진 무리여도 강남은 갈만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저나 마누라나 중고차를 잘 보는 건 아닌 수준을 넘어서, 중고차를 사본 적이 전혀 없는데요. 그래도 보는 사람이 늘어나면 놓치고 지나간 흠집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두 사람이 같이 가기로 하고, 애는 부모님 집에 맡겼습니다.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이건 안 중요하니 넘어가고..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습니다. 혹시나 고지했던 내용이랑 다른 게 나올지 몰라서요.
왕년에 강남구 살 적에 일원동, 수서동까지는 그럭저럭 알고 지냈으나, 세곡동, 네곡동 쯤 되니 하나도 모를 뿐더러 전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나오네요. 여기 왜 이렇게 경치가 좋죠? 요새 구름/하늘이 역대급이라고 하던데, 밖에 나와서 본 건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더위는 둘째치고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밖에 좀 나갔을텐데.
하여간, 매매단지 입구 가까이에 오니 벌써부터 호객하는 분들이 붙기 시작합니다. 차 보러 오셨어요? 그런데 예전하고는 다르게 '예약하고 왔다' 이 말 한마디면 끝납니다. 인터넷을 통해 파는 차의 물량이 늘어나고, 그렇게 예약된 차 사러 온 사람을 뺏어봤자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가봐요. 따라서 매매단지 방문 자체를 겁낼 필요는 전혀 없더라고요.
안에 들어서도 겁낼 건 없습니다. 비록 사무실 문 앞에 '관계자 외 출입 금지'도 아니고 '관계자 외 들어오면 쌍욕함'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그만큼 쓸데없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러겠구나 싶더라고요. '수출전단지 명함 기타등등'이라고 써둔 걸 보니, 전에 회사 다닐 때 보험 들어달라 적금 들어달라 요구르트/녹즙 주문해달라고 오던 사람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전화해서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다'라고 했더니 거기 말고 옆에 사무실로 오라고 하시길래, '설마 다른 명의인가? 했는데 그 옆 사무실도 간판은 똑같네요. '아 장사가 잘 되서 사무실을 늘렸나 보다' 이러고 넘어갔죠. 그 다음에도 별 건 없습니다. 아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구석에 박힌 차를 끌어내고 끝. 이 아저씨는 옆에서 설명을 하시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와서 그쪽에 갔거든요. 일 있으면 전화 하래요.
그래서 아주 편하게 봤습니다. 일단 외관은 깨끗합니다. 새차도 잘 해놨고 타이어도 번쩍번쩍 합니다. 하지만 뒷트렁크를 열어볼려고 손을 넣어 보니 버튼이 없습니다. 옆에서 마누라가 '레이는 안에서만 열어야 하나?' 이런 말을 하는데, 그런 차가 어딨나요. 알고보니 버튼 커버가 깨져서 스위치가 그대로 노출된 거더라고요. 그걸 눌리니 열리긴 합니다. 그리고 후미등이 짝짝이입니다. 한쪽이 나간 게 아니라 모양이 다르게 켜지네요. 등을 거꾸로 꼽았나 사제/순정을 섞어 썼나...
키로수와 연식이 많다 보니 시승과 하부 관찰은 필수겠죠. 중고차 아저씨한테 띄워볼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평일이라면 열번도 띄울 수 있는데, 토요일에는 공업사들이 출근을 안 해서 못 띄운다고 합니다. 납득이 되는 설명이군요. 그리고 하나 배웠습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최소한 강남구 세곡동 중고차 단지는 토요일에 가지 말 것.
하체를 볼 수가 없으니까 스마트폰 하나로 라이트를 비추고 다른 폰으로 영상을 찍어가며 봤는데 좀 아리까리 합니다. 분명 부식도 녹도 있어요. 하지만 10년 된 15만 키로짜리 차가 막 비닐 벗긴 새차처럼 깨끗할 거라고 기대했다간 그건 양심도 없고 지능도 떨어지는 사람이겠죠? 엔진룸을 봐도 거긴 깨끗하고, 엔진 오일은 더럽지만 그건 중고차가 다 그렇고, 슬라이드 도어가 빡빡하긴 한데 잘 모르겠고.. 하여간 띄워보질 못하니 결정을 못 내리겠더라고요.
그래서 시승을 요청했습니다. 매매단지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며 일부러 쎄게 밟고 쎄게 멈춰 봤는데 차는 잘 움직이네요. 마지막으로 운전한 게 몇 년 전인데다 운전 자체를 많이 해본 건 아니다보니 감이 잘 안와서 막 운전한 것도 있지만. 문제는 에어컨을 켜면 시동이 꺼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에어컨을 켠 상태에서 애가 한번씩 쿨럭~ 쿨럭~ 하다가 어느 순간 꺼집니다. 에어컨을 끄고 시동을 켜면 잘 굴러 갑니다.
같이 탄 다른 직원분이 '기름이 없어서 그렇다'며, 매매단지로 다시 와서 뒷바퀴에 좀 많이 흘려가며 말통에서 붓는 걸 보고, 이번에는 직원분이 운전하는 차를 타 봤는데.. 매매단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시동이 다시 꺼지네요. 더 볼게 없네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왔습니다. 나중에 사장님이 다시 전화하셔서 '기름을 더 넣으니 괜찮다' '우리도 시운전을 몇 시간을 하고 산거다' '설령 문제가 있어도 다 보증에 들어간다'고 하셨지만, 그냥 이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결국 코로나 시국에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세곡동 구경이나 하는 걸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얻은 교훈은
1. 주말에는 가지말자
2. 직원분들은 친절하시다. 대형 중계 사이트에서 보고 가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3. 할거 다 해보고 사자
4. 역시 싸고 좋은 건 없다
하늘에서 카메라가 떨어질 때 '기아 레이 중고라면 700만원 좀 하지 않나요?'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는 '그렇게 비싼 건 못 사고 500만원 대나 보고 있다'고 말했으나.. 정말 700으로 올리던가 해야 할 판입니다. 문제는 600만원 대에서 놀아도 배기가스 0/0을 채우는 물건 보기가 쉽지 않네요.
마치 노트북을 고르는 것 같습니다. 싸고 쓸만한 가성비 노트북이 60만원!으로 시작해서 -> a/s는 되야 하니 삼성엘지 -> 윈도우 설치해주기 싫으니 기본적으로 깔려 나오는 거 -> 야 셀러론은 아니지 -> 이러다보면 결국 돈 백 찍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