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가 날려먹은 글이긴 한데, 이 상태로 두면 영영 다시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서 대충 쓰고 치우렵니다.
테넷
마술사는 자신의 트릭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공연을 하지 않습니다. 마술사가 짠~하면 관객은 우와~ 할 뿐이고, 서프라이즈 사이 사이의 빌드업을 지루하지 않게 채워줄 뿐이죠. 사실 모든 창작물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배경과 설정을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테넷은 그 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얘는 누구고 테넷은 뭐며 왜 이 짓거리를 하는지, 수박 겉핥기가 좀 더 진해보인다 싶을 정도로 대충 넘기고요. 등장 인물 사이의 대화도 아주 무성의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치 B급 포르노에서 국어책을 읽는듯한 톤으로 오, 그렇다면 방에 가서 단 둘이 확인해 봐야 겠는걸? 딱 이 정도에요. 그렇게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감독이 놀란이라면 문제가 되겠죠.
물론, 사건과 사건 사이의 빌드업과 연결이 매끄럽게 되어 있다면 이런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숨도 못 쉬고 멸살잡혀 끌려가듯이 영화를 본다면 그런 걸 따질 시간은 없겠죠. 그 대표적인 영화가 매드 맥스고요. 광신도같던 워보이나 방랑자가 여자 하나 만나서 몇 시간을 보냈다고 일생을 그렇게도 간단하게 부정한다는게 말이나 되나요? 그런데 그 영화는 따질 시간을 안 주잖아요.
테넷은 분명 인상적인 장면과 사건으로 이어져 있지만, 사건과 사건 사이가 뚝뚝 끊어져 있어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을 정도로 따로 놀고 있어요. 분명 각각의 사건들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놀란 감독이 어떤 비전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알겠지만, 빌드업이 너무나도 부족하단 느낌이 드네요. 원래 TV 시리즈나 3시간 짜리 3부작 영화로 만들었어야 하는 걸 무리해서 일반 극장 개봉용으로 뽑은 느낌입니다.
이게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였다면 우와- 참신하네-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군요 이러고 말았을텐데, 문제는 감독이 놀란이라는 거죠. 인셉션의 마지막 작전에서 각각의 시퀸스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순차적으로 이어지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장면에서 아주 큰 뽕을 들이켰던게 아직도 소하가 덜 됐는지, 테넷에선 그걸 시간을 거꾸로 감아서 고져스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 부분을 빼면 다른 건 놀란의 위대한 비전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차기작인 오펜하이머는 그냥 덩케르크 스럽게만 만들어 줬음 싶네요.
남한산성
원작 소설을 5번 읽었고, 출연진에 비해 흥행은 크게 하지 못했고, 영화 제작자와 원작 소설가의 관계도 대충 알고 있고, 요새는 오징어 게임으로 주가가 높아졌다는 것도 알고 있는 상태로 봤습니다.
원작 소설은 등장 인물 사이의 관계가 아주 갑갑하고 답답하며 답이 없는 공허함만으로 가득차 있기로 유명한데요. 영화에서 그 느낌을 완벽하게 살릴 수 있을거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한 건 보입니다. 예판과 이판 사이의 대립을 그리면서도 그 둘이 절대로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위해 주장할 뿐이라는 건 확실하게 보여줬어요. 임금이나 영상이 노답이라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원작 그대로 옮긴 건 아니고 나름의 각색을 했는데, 김훈 작가가 원래 고증에 철저한 사람은 아니지만서도 영화는 그거보다 더 심합니다. 이 영화는 예판의 칼질로 사직해서 칼질로 자진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시작과 끝을 똑같이 맞추려는 메세지는 알겠지만 신체발부수지부모한 나라에서 몸에 흠집을 내어 죽는 선택을 한다고요? 그것도 상놈도 아니고 '예조'의 판서가요? 또, 청군이 진격하는데 그 앞으로 홍이포가 떨어지네요? 현대 포병도 저쯤이면 프렌들리 파이어일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철저하게 역사를 소개하는 영화는 아니니까 심각한 단점은 아닙니다. 사실 국뽕 루트를 안 탔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흥행은 나빴던 것 같지만 말입니다. 단점을 꼽자면 이판과 예판 사이의 논쟁은 분위기를 좀 더 고조시켜서 갈등 구도를 더욱 극대화하고, 속이 답답할 정도로 그려냈어도 됐을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너무 밋밋하단 말이죠. 저야 이런 드라마도 재밌게 보지만 대중적으로는 아니니..
남한산성은 저런 생각이 들까 봐 안 봤지만 봤다면 비슷한 생각을 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