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gigglehd.com/gg/bbs/5324813
사실 원래 그렇게 매운 걸 찾아다니면서 먹지는 않습니다. 예전에야 틈새라면 본점에라던가도 종종 가고 했지만요. 그렇지만 한국에 사는 한국인인 만큼 매운 걸 떼어놓을 수는 없고, 또 매운 걸 싫어하거나 못 먹는 것도 아닙니다. 길게 썼지만 결국에는 그냥 일반인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물론 그런 만큼 핫소스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될 만한 환경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다른 주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 경우이지요. 가령 예를 들자면 유튜브의 First We Feast 채널, 그 중에서도 Hot Ones가 있겠습니다.
퍼스트 위 피스트는 이름에 걸맞게 음식에 관련된 채널입니다. 그렇다고 음식에만 중점을 두는 것은 아니고, 음식을 통해 현대 (미국의) 팝 컬쳐를 탐방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중 대표격인 쇼인 핫 원즈에서는 호스트인 션 에반스가 게스트들에게 여러 단계의 핫 소스로 만든 핫 윙을 먹이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합니다. 토크쇼로서 호스트의 준비나 질문의 수준도 높고, 유튜브에 올라오는 웹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게스트의 섭외력이 뛰어나 할리 베리, 스칼렛 요한슨, 샤킬 오닐, 고든 램지 등의 월드 스타들이 참여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저는 테네이셔스 D의 잭 블랙과 카일 가스가 나오는 편으로 접한 경우입니다.
어쨌거나, 쇼를 한 편 두 편 보게 되면서 제 몸 안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가 끓습니다. 대체 얼마나 맵길래 저 정도인가. 호기심이 듭니다. 찾아보니 자체적으로 선별한 핫 소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https://heatonist.com/)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면세범위 내에서 꽉꽉 눌러담아 구매했습니다. 어쩌면 이게 쇼의 원래 목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주문 폭주로 인한 배송 지연에, 미국 동부 해안에서 배송대행사가 있는 서부 해안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어제 핫소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먹었습니다. 확실히 맵습니다. 한국인인 제가 먹어봐도 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맵기만 한, 이게 핫소스인가 캡사이신 정제물인가 구별하기 어려운 그런 핫소스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고추 자체의 맛을 잘 살리면서 맛있게 맵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맵냐고요? 그걸 한번 소개하면서 정리해볼까 합니다.
* 가격은 Heatonist의 가격을 참고하였습니다. 판매처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 스코빌 지수는 따로 출처를 기재하지 않은 경우 핫 원즈 중간중간에 나오는 값을 참고하였습니다.
핫 원즈 더 클래식 (148ml / $10)
익숙한 타바스코 계열의 새콤매콤한 소스입니다. 강황의 언더톤이 배경에 깔린 맛입니다. 어디에나 잘 어울릴듯한 맛. 크게 맵지는 않습니다. 피자에 뿌려 먹기 좋을 것 같은 느낌. 타바스코보다는 조금 더 걸쭉하고 건더기가 있지만 다른 소스들에 비해 묽은 편입니다.
- 재료 : 칠레 드 아르볼(Chile de árbol), 사과주 식초, 정제수, 마늘, 코셔 소금, 강황
- 스코빌 척도 : 1,800 (대략 풋고추 정도 될까요?)
소스 배 스키니 하바네로 핫 소스 (148ml / $10)
파인애플의 새콤달콤한 맛과 강한 강황의 맛이 먼저 치고 들어옵니다. 오○기 카레에서 느낄 수 있는 강황의 맛과 흡사합니다. 왜인지 메로나 대구 같은 흰살생선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걸쭉하면서 파인애플과 고추의 과육이 느껴집니다. 매운 맛은 살짝 얼얼한 편입니다.
- 재료 : 파인애플, 정제수, 백식초, 하바네로, 양파, 마늘, 할라페뇨, 강황, 소금, 큐민, 흑후추, 생강
- 스코빌 척도 : 2,500 (대강 팔도비빔면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맵지 않은 정도)
샤콴다즈 핫 페퍼 소스 (150ml / $10))
페이스트나 잼 정도의 걸쭉함을 보입니다. 양파 특유의 맛과 향이 깊게 느껴집니다. 스코치 보닛과 하바네로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카리브해 쪽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균형은 잘 맞고 맛은 있지만 왠지 잘 기억에 남지 않는 맛이었습니다.
- 재료 : 양파, 백식초, 사과주 식초, 고추가루, 토마토 페이스트, 데메라라 설탕, 레몬즙, 천일염, 생강즙, 호스래디시, 겨자가루, 강황
- 스코빌 척도 : 10,100 (대강 청양고추나 핵불닭 정도라는 것 같습니다)
럭키 독 타이 칠리 파인애플 핫 소스 (148ml / $12)
프릭끼누, 쥐똥고추 등으로 부르는 태국 고추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재료의 배합에도 동양적인 맛이 배어나옵니다. 약간 묽은 편. 왠지 새우 요리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 라임즙에서는 똠양꿍의 느낌도 약간 납니다. 파인애플의 새콤달콤한 맛.
- 재료 : 파인애플, 쌀식초, 양파, 구운 마늘, 꿀, 마른 적고추(프릭끼누), 구운 양파, 천일염, 아가베, 라임즙, 생강, 건마늘, 겨자가루, 볶은 참깨
- 스코빌 척도 : 29,800 (여기서부터 슬슬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매운맛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핫 원즈 로스 칼리엔테스 (148ml / $12)
묽은 편이지만 건더기가 있습니다. 향신료를 다양하게 때려부은 데다가 세 종류의 고추를 블렌딩한 호화 구성. 살구의 새콤한 맛으로 시작해서 토마티요와 쿨란트로 등 향신료에서 나오는, 중남미를 연상시키게 하는 맛으로 이어집니다. 강하게 느껴지는 큐민의 맛도 뺄 수 없음. 아가베 넥타가 들어가 있어 달달합니다. 맵지만 매운 맛을 다른 맛들이 잘 잡아줘서 크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 재료 : 고추(그린 세라노/사과목 훈연 그린 세라노/오렌지 하바네로), 사과주, 살구, 사과주 식초, 레몬즙, 토마티요, 아가베 넥타, 정제수, 마늘, 소금, 구운 양파, 큐민, 쿨란트로, 흑후추, 셀러리 씨앗
- 스코빌 척도 : 36,000
시크릿 아드박 하바네로 핫 소스 (236ml / $8)
토마토에서 나오는 가벼운 산미. 전분에서 나와주는 걸쭉한 바디감. 다양한 향신료가 잡아주는 복잡한 맛. 매콤하지만 맛있다. 피자 도우에 소스 대신 쓰면 끝내줄 듯. 텍스멕스-카리브해 쪽 스타일. 대용량에 가격도 싸다! 사탕수수 설탕 덕분인지 맛있습니다.
- 재료 : 토마토, 화이트 와인 식초, 정제수, 양파, 하바네로, 겨자 소스, 사탕수수 설탕, 소금, 전분, 해바라기씨유, 각종 허브 및 향신료
- 스코빌 척도 : 50,000-250,000 (출처 : hotsauce.com, 써 있기는 이렇게 써 있는데 5만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트비트 핫 소스 레드 하바네로 (177ml / $12)
달큰하다. 양파와 마늘이 주는 좋은 조화. 친숙한 핫소스 계열의 맛. 매콤하고 걸쭉. 뚜껑 일체형 노즐은 쓰기는 편하지만 깔끔하지 못함. 아드박이 피자 도우에 바르기 좋다면 이건 피자에 뿌려먹기 좋을 듯. 완성도 높은 핫소스.
- 재료 : 벨 페퍼, 양파, 백식초, 하바네로, 설탕, 마늘, 라임즙, 코셔 소금, 카놀라유
- 스코빌 척도 : ??? (찾지 못했습니다. 체감상으로는 헬파이어보다는 덜 맵고 아드박보다 더 매운 느낌.)
헬파이어 디트로이트 하바네로 (118ml / $12)
하바네로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맛. 건더기가 많은 걸쭉한 페이스트. 약간의 훈연향. 입에 넣자마자 몰려오는 고추의 매운 맛. 얼얼하다.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님. 이미 양념이 된 요리에 매운 맛을 더할 때 제격
- 재료 : 볶은 하바네로, 애플 사이더 식초, 천일염, 정제수, 올리브유
- 스코빌 척도 : 66,000 (병에 적힌 값은 10만에서 30만인데 핫원즈에서는 66,000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체감상으로는 10만에 조금 더 가까운 느낌)
윌트셔 칠리 팜 트리니다드 스콜피온 (140ml / $14)
묽다. 스콜피온 고추의 선명한 빨간색. 약간의 달큰한 맛. 고추 자체의 맛. 매운 맛이 먹고 나서 천천히 올라온다. 사과주의 새콤한 맛도. 영국에서 온 핫소스
- 재료 : 사과주 식초, 설탕, 스콜피온 칠리, 적고추, 소금
- 스코빌 척도 : 104,000
퍽커벗 초콜릿 플레이그 (148ml / $18)
건더기가 있는 걸쭉한 페이스트. 고추 자체의 맛을 극대화. 부트 졸로키아(고스트 페퍼)와 초콜릿 더글라의 교배종. 아주 천천히 입 안을 태우면서 올라오는 매운 맛. 초콜릿 더글라쪽의 특징인지 카카오의 earthy한 맛이 느껴짐.
- 재료 : 초콜릿 부틀라 고추, 정제식초, 고춧가루
- 스코빌 척도 : 690,000
핫 원즈 라스트 댑 리퍼 에디션 (148ml / $20)
걸쭉한 페이스트. 캐롤라이나 리퍼의 특징인지 아니면 맵다 못해 그런건지 살짝 씁쓰름. 그렇지만 매운맛에 비해 향신료들이 밸런스를 어느정도 잡아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맵기는 제일 맵다. 안주 없이는 먹기 힘들 정도.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 재료 : 캐롤라이나 리퍼 고추, 정제식초, 마늘 뿌리, 강황, 고수, 큐민, 건겨자
- 스코빌 척도 : 2,000,000+
총평
스코빌 척도만 놓고 보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운 소스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매운맛을 정제해내어 캡사이신의 맛 말고는 느낄 수 없는 핫소스와는 다릅니다. 정말 매운 소스들도 (라스트 댑을 제외하면) 고추 이외에 별다른 게 들어가지 않았지만, 고추 자체의 맛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추의 품종에 따라, 들어간 재료에 따라 각자 특색이 있는 소스들이었지만 어느 하나 떨어지지 않게 맛있었습니다. 과연 이 정도면 핫소스 전문가들이 큐레이팅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류를 한다면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 부담없는 정도의 알싸한 맛 : 더 클래식, 소스 배, 샤콴다즈, 럭키 독
- 매콤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 로스 칼리엔테스, 시크릿 아드박, 하트비트
- 나는 죽음을 택하겠다 : 헬파이어, 트리니다드 스콜피온, 초콜릿 플레이그, 라스트 댑
이라던가,
- 클래식하고 친숙한 핫 소스 : 더 클래식, 하트비트, 트리니다드 스콜피온
- 과일과 향신료가 담뿍 들어간 : 소스 배, 샤콴다즈, 럭키 독, 로스 칼리엔테스, 시크릿 아드박
- 매운맛 그 자체가 부족할 때 : 헬파이어, 초콜릿 플레이그, 라스트 댑
대강 느낌상 궁합이 맞을 것 같은 요리로는,
- 어디에 써도 좋다 : 샤콴다즈, 로스 칼리엔테스
- 다 좋지만 피자나 치킨이 잘 어울릴 것 같기도 : 더 클래식, 시크릿 아드박, 하트비트, 트리니다드 스콜피온
- 왠지 해산물이 땡긴다 : 소스 배, 럭키 독
- 불고기같이 이미 강한 양념이 되어있을 때 : 헬파이어, 초콜릿 플레이그
- ??? : 라스트 댑
뭐, 정확한 건 먹어봐야 알겠죠. 아직은 굽네치킨 고추바사삭 순살밖에 못 먹어봤습니다.
뒤로 갈수록 사진이 좀 대충 찍은 것 같죠? 먹으면서, 그리고 맛을 기록하면서 사진을 찍었거든요. 땀이 뻘뻘 나고 시야가 뿌옇게 되고 손을 덜덜 떨면서 찍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에 찍힌 만큼만 먹었기 때문에 (라스트 댑은 그나마도 남겼지만) 금방 가라앉네요.
두 개만 꼽자면 로스 칼리엔테스랑 시크릿 아드박을 뽑을 것 같습니다. 원래 탑 3을 뽑으려고 했는데, 같이 먹은 사람이랑 의논 끝에 내린 결론은 나머지를 모두 공동 3위로 뽑은 겁니다. 그만큼 다 맛있어요. 17만원 정도가 아깝지 않은 맛이었습니다.
아마 로스 칼리엔테스까지는 금방 먹어서 없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 위로는 두고두고 쟁여놓고 먹어야 할 듯.
그럼, 어제는 고추바사삭을 먹었다면 오늘은 피자를 먹어볼 생각입니다. 슬슬 주문을 넣어야겠네요. 매운 맛 맛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