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도 한창 피고 지고, 개나리와 진달래, 배꽃을 지나 이제는 철쭉이 흐드러진 시절. 밖에서 꽃이 피건 선거운동을 하건 저는 그게 나랑 뭔상관이냐 이러면서 방에 박혀 왜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인가에 대한 형의상학적인 고찰, 간단하게 말해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누라가 퇴근해서 대뜸 5월 4일은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 사이에 끼어있어서 그날을 자체 휴무한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럼 5월 3일 수요일부터 5월 7일 일요일까지 의도치 않게 휴일이 쭈욱 이어지는 셈.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지만 없는 돈을 쥐어 짜서라도 이런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일단 가장 만만한 제주도를 보니 7일에 올라오는 비행기는 전멸했고 6일로 타협한다 해도 2인 왕복 40만원대. 시선을 돌려 부산-대마도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니 이 역시 좋은 타이밍은 멸종했고 애매한 시점이 드문드문 보이긴 하나 그 역시 40만원 대. 이쯤 되니 간이 갈수록 부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그 돈주고 제주도나 대마도로 타협할 바엔 일본을 공격한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뭐 근데 일본이라 해서 별게 있는 건 아니고. 도쿄 비싸고 오사카 비싸고 홋카이도 비싸고 오키나와 비싸고 타카마쓰 비싸고 후쿠오카 좀 비싸고.. 어딜 가던 2인 왕복이 80만원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되더군요. 지쳐서 포기할때쯤 발견한 기타큐슈 왕복 2인 70만원. 엎어치기 메치기 들배치기 후려갈기기를 다 쳐맞다가 딱밤을 한대 맞으면 별거 아닌 것처럼 70만원이 되게 싸보입디다.
마치 다단계에 홀린 것처럼 여권 정보를 입력하고 70만원을 ㅂㄷㅂㄷ 떨면서 5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재한 후. 이제 남은건 기타큐슈에 가서 뭘 보고 뭘 먹지!라고 뒤적거리는 철없는 마누라를 보며 혀를 쯧쯧 찬 후, 거점으로 삼을 숙소를 찾아보기 위해 우리의 친구, 취소하면 수수료를 과도하게 꼬박꼬박 받아가다 공정위 시정명령 받은 에어비엔비를 열었는데.. 숙소가 없어요.
아까 전멸이니 멸종이니 같은 표현을 썼는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라 화석도 안 남아있을 정도에요. 과연 기타큐슈에서 에어비엔비 호스트를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건가 저 동네는 인터넷이 끊긴건가 싶을 정도로 없어요. 기타큐슈만 특별한 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봐도 마찬가지에요.
그나마 후쿠오카에 23만원짜리 방이 한국어 가능이라 써놨는데 에라이 그 돈이면 호텔 가서 자겠다 싶어서 허구한날 티비에서 광고하는 온갖 해외 호텔 결재 사이트부터 시작해서 개인정보 취급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들어서 내가 여기 두번다시 가입해서 쓰면 강낄낄에서 김낄낄로 성을 갈겠다 하고 버럭했던 인터파크까지 가봤지만 하나도 없어요.
이제서야 이 황금같은 연휴를 맞이하여 한국의 관광객들이 만만한 일본에 많이 갈 것이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초등학교 교과서 읽듯 무미건조하게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갔고, 좀 더 대뇌를 쥐어짜 보니 일본도 그 시즌에는 뭔 연휴가 있어서 어딜 가던 헬은 어니고 지옥쯤 된다는 상식이 스물스물 기어오르는데 아 이거 비속어를 쓰자면 성기됐구나...
에어비엔비에서 집 전체가 아니면 쳐다도 보지않는 부르주아지의 삶을 자부해 왔으나 이제는 개인실이면 감지덕지해야할 판국이고, 그나마도 남아있는 방 자체가 없어요. 우베도 아니고 야마구치 쯤 가면 숙소가 몇개 있는데 이건 딱 봐 모니터에 올라온 사진을 2백만 화소 폰카로 다시 찍었다는 모아레가 역력하게 드러난지라 도저히 지를만한 호연지기가 피어오르지 않아요.
그럼 냉철하게 판단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1.위약금을 내고 비행기를 취소한다. 1인 편도 6만원 x2명 x왕복이니 24만원을 진에어에 헌납해서 진에어 그링윙스 선수들이 이번 롤챌스 강등전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기부했다고 생각한다. 2. 1박에 23만원짜리 방을 지르고 기타큐슈에서 후쿠오카로 점프한다. 3. 정체불명의 숙소를 지르는 도박을 감행한다인데.
처음에 예상했던 가격이 비행기 70만원 숙소 30만원 식비/교통비 30만원 해서 130~150만원이면 호화롭진 않아도 궁상맞진 않게 돌겠구나 했으나, 이대로라면 200만원을 들여도 후쿠오카 인스턴트 라면에 밥말아먹으면서 다녀도 한끼 잘 먹었다고 자부해야 할 상황이라, 아무리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경제 관념이 부재했다지만 이건 아닌듯 싶어서 결국 취소.
...는 다행이도 마누라가 '당일 결재한 항공권은 11시 58분인가 전에 취소하면 수수료 없음'이라길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래 우리가 돈있음 양념치킨 사서 양념만 핥아먹고 나머지는 길고양이 밥으로 줄 순 있어도 해외여행은 안어울리지 이러면서, 쓰린 속을 달리기 위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일본 맥주와, 안주로 샀던 쥐포를 전자렌지에 2분 30초 동안 돌렸더니 아소산 분화구에서 튀어나온듯한 현무암같은 꼬라지가 되길래 그냥 그 쥐포 탄 냄새를 안주삼아 궁시렁거리고 있네요.
오밤중에 좋게 기글에 뉴스나 올리지 뭔 부귀영화와 호사를 누리고 원앙금침에 잠을 자고 진수성찬을 탐닉하겠다고 이게 뭔 상황인지... 뭐 그래도 두시간 동안 몇십 몇백만원이 오가는 심장 쫄깃한 경험을 했던지라 마누라한테 사다준 편의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별로 비싸지 않는 심각한 착시효과가 생기네요. 내일쯤 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올듯요. 원래 상태도 썩 좋진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