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것
1. 부목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늘 뻗고 있고, 한쪽 팔은 팔꿈치를 굽히고 있어야 합니다. 그나마 몸통에 붙어있는 부분은 자유로워서 이 글은 양손으로 쓰는 건 다행입니다.
2.
사고 다음날인 9월 9일은 제가 몇 달 전부터 기다리던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었습니다.
꼭 봐야 하는데... 당연히 개봉 당일에 못 봤습니다. 경우에 따라 영화관에서 못 볼 수도 있겠네요. 그나마 특전은 친구가 챙겨줬으니 다행이긴 합니다.
3.
중요한 서류 작업을 할 일이 있었습니다. 카테터 꽂힌 한 손만으로 터치패드와 키보드를 조작해서 평소 같았으면 데스크톱으로 10~15 분 걸릴 일을 1.5 시간 들여 겨우겨우 끝냈습니다. 트랙패드 핀치 줌 인 기능이 정말 고마웠던 순간이었습니다.
4.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이동하려면 휠체어를 타야 해요.
5. 어쩌면 평생 자전거를 못 탑니다. 그렇다고 전동 킥보드/PAS 방식이 아닌 전기자전거/모터바이크를 탈 수도 없고요. 이렇게 당하고도 타면 배운 게 없죠.
6. 치료에 최소 한 달이라는 시간과 갤럭시 폴드3 하나를 살 수 있는 비용이 들어갑니다. 보험공단에서 안 내주는 약도 쓰고 있네요. 사설 보험처리가 잘 되길 바라야죠...
얻은 것도 있습니다.
1. 보호대는 최대한 해야 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무릎 보호대만 했어도...
2. 헬멧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헬멧이 먼저 땅에 박혀서 얼굴과 머리는 멀쩡했으나 자갈이 안경 안에 들어왔음을 생각하면, 헬멧 없었으면 눈 망가지고 이마 깨지고... 법으로 강제하는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3. 부모님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장례식장 가신 부친께서 새벽에 전화를 받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예상대로 바로 조치 방법을 알려주셨고 먼 길임에도 새벽 빗길을 달려오셨고, 모친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간병해 주십니다. 화도 많이 내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분들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4. 결혼은 꼭 해야 되겠습니다. 인생의 동반자이자 법정대리인이 한 명 더 생기니까요. 힘들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저도 필요하다면 그를 위해 도울 준비가 먼저 돠어야겠지요.
5. 절대로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습니다. 월 25만 원이 아이를 키운다면 크게 다가온다는 말이 이제서야 느껴집니다. 돈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급작스러운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대처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 전 평생 동안 아이를 낳아 기를 자격이 없을 것 같습니다.
6. 일상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두 다리, 두 팔이 멀쩡한 것이 이렇게나 그리울 줄이야...
7. EDC가 제 역할을 해냈습니다. 습관처럼 챙기고 나갔는데 이렇게나 유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넘어졌을 때 '생수로 상처 닦고 피 많이 나오면 생리대 붙이면 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바지 걷어 상처를 보니 아니더군요. 바로 휴대폰으로 부친께 전화하고 119 신고하고, 구급차가 반대편에서 와서 돌리는 데 손전등 유용하게 사용했고, 손 소독제는 소독용으로 잘 쓰고 있고, 파워 뱅크는 입원 첫 날에 아주 잘 썼고, 모친께서 발 다치셔서 밴드 찾으시는데 마침 가방에 있었고.
모친께서 무겁다고 들고다니는 것 반대하셨는데, 이반 일 덕에 계속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건강이 최고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