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의 송나라 시절, 송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은 삼불제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낀 항구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당나라 때 스리위자야 왕국과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런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송이 멸망하고 또 원이 멸망하여 명이 성립된 시기, 명에서는 천자국으로서 삼불제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 조공을 보내도록 재촉했습니다. 그에 따라 삼불제의 조공 사절이 1370년 8월, 71년 9월, 73년 12월 74년 09월, 75년 9월, 77년 8월에 걸쳐 명에 계속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원나라 때 기록을 보면 삼불제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몰라유(沒刺由)라는 세력이 나옵니다. 현재의 말레이시아죠. 이 세력은 스스로 스리자위야 왕가의 후예가 세웠다고 주장하니, 원대 시점에서 삼불제는 이미 멸망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즉, 1) 명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나라에 조공을 요구했던 것이고 2) 홍무 연간에 수차례에 걸쳐 멸망한 왕국에서 사절이 명에 입공했던 겁니다.
비밀은 간단한데, 송대(삼불제가 있던 시절)의 기록을 원대의 여러 기록이 별 생각 없이 인용하고, 그걸 또 인용한 명은 별다른 검증 없이 삼불제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럼 망국 삼불제의 사절단은? 간단합니다. 삼불제의 후신에 해당하는 나라에서, 괜히 '삼불제는 망했고 우리는 그 자리에 세워진 다른 나라다'라고 설명했다가 공연히 이런저런 의심을 샀다간 귀찮아질 걸 우려한 사절단이 그냥 삼불제의 사절을 자칭했던 겁니다. 이전에 입공한 삼불제 역시 엄연한 중화 세계의 책봉국이었기 때문에, 삼불제가 사라지고 등장한 국가는 곧 천자의 신하를 천자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교체해버린 일종의 반란세력으로 비칠 수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옛날 간판을 그대로 쓰는 게 더 편했다 그거죠.
이 일화는, 결론적으로 예상 외로 대충대충 사는 사대부와 귀찮은 일은 질색인 관료가 합쳐져 멸망한 국가의 사절이 조공하러 오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민을 위한 역사학]에 소개된 내용을 대강 요약해 간추렸읍니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