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올라오는데 기차가 ITX밖에 없었고, ITX의 트레이는 블루투스 키보드 올려두고 두드릴만한 공간이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도시락이나 겨우 올라갈까. 그래서 원래는 일을 하려 했지만 본의 아니게 포기하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나 하나 보기로 했습니다.
유랑지구는 원작자가 휴고상을 받았다는데 혹해서 봐야겠다고 벼르다가 이제야 봤는데요. 각색이 들어가기 마련인 영화를 가지고 원작이나 원작자를 평가하진 않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여기서 다들 짐작 하시겠죠? 네. 형편없는 영화입니다.
모든 부분이 다 형편없는 건 아니고요. 우선 연출은 합격점 이상입니다. 더러는 중국 국뽕이 심하다는 평이 있던데, 아니 중국에서 만든 영화가 중국 이야기를 안 하고, 중국 위주로 안 돌아가면 도대체 뭔 말을 하나요. 이보다 더 심한 영화도 한국에서 천만 관객은 찍던데 이 정도면 됐지 뭘 바래요.
무엇보다 3D 그래픽이 아주 훌륭합니다. 케이블 TV에서 돌려막을 때 애용하는 중국 환상 무협영화 수준이 아니에요. 어느 나라의 무슨 팀에다가 작업을 맡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중국 명의로 나오는 영화가 이 정도 영상을 확보했다는게 놀랍습니다. 중국 영화라고 해서 얕잡아보면 큰코 다칠듯.
문제는 영화의 스토리와 개연성이 장점들을 다 까먹는다는 겁니다. SF 영화라서 비현실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구에 엔진을 달아서 우주로 간다고요? 그럴 수 있죠! 이건 SF 영화니까! '지구가 유랑한다'는 대전제를 까겠다는 게 아니에요. 진짜 문제는 등장 인물의 행동에서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고, 개연성을 하나도 볼 수 없다는 거에요.
영화 평을 찾아보면 이 부분을 지적한 게 참 많던데.. 제가 시간만 많으면 영화를 틀어놓고 몇분 몇초의 무슨 대사/행동은 이래서 말이 안 된다고 조근조근 까겠지만, 지금 진도가 안 나간 리뷰가 몇 개인데 그럴 여력은 없고요. 지금 대충 생각나는 거 좀 이야기해보면.
군인들이 지상에서 총을 들고 다닙니다. 총의 용도가 뭔가요? 적과 싸우는 물건이죠. 지표면이 얼어붙어서 특수복과 산소통 없이는 바로 죽고, 온 인류가 일치 단결해서 생존해나가는 그런 세계관인데 총을 들고 다녀요. 도대체 무슨 적이 있다고? 권총이나 소총이면 이해하겠는데 강화 외골격에 달린 개틀링 건이에요. 그럼 그 총으로 뭘 하느냐? 막힌 벽을 뚫어요.
그러니까 벽에 구멍 낼려고 총을 들고 다녀요. 총보다 더 효율적이고,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는 거 많잖아요? 왜 총이어야 해요? 한번 쓰면 끝장인 총알을 무겁게 들고다니면서 말이죠. 지구를 옮길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세계잖아요. 이쯤에서 드는 생각이, 감독이나 투자자, 혹은 높으신 분께서 '간지나게 기관총을 갈기는 장면이 있어야 하지 않나?'고 강하게 주장한거 아닌가.
총은 나중에도 한번 써요. 임무가 개판이 되자 등장 인물 중에서 여자 군인이 '몹시 중요한 물건'을 총으로 갈겨서 망가뜨리거든요. 이 영화의 감독은 여혐임에 틀림 없어요. 그럭저럭 군말 없이 임무를 잘 따르던 사람이, 상황이 나빠졌다고 해서 거기에다 총질하는 이유는 여혐 말고 찾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주장하기엔 묘사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고요.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그 '중요한 물건'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더 좋은 방법도 많았어요. 지진 때문에 난리가 났었으니까 그 와중에 망가졌다고 하면 되고, 망가진 후에 졀벽이나 이미 고장난 물건에 총질해도 상관은 없었을 거에요.
그 외에도 많은데 그걸 일일이 다 쓸만큼 한가하진 않으니까 패스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니 하도 열이 받아서 코피가 나더군요. 휴지를 항상 챙기고 다녀서 다행입니다. 물티슈는 다 썼으니 사야겠군요.
어쨌건 그래픽 수준은 괜찮으니 영화 줄거리 좀 다듬을 사람만 확보한다면 중국 시장에서도 충분히 대작은 나올 수 있겠군요. 하지만 그건 앞으로의 이야기고... 이 영화 평점에 만점을 준 사람은 알바거나, 영화를 보면서 개연성이나 줄거리는 전혀 따지지 않는 성격이거나, 혹은 그런 걸 따질 지능이 없거나, 한국말하는 중국인이거나 조선족일 겁니다.
유랑지구 이야기 하다보니 글이 엄청 길어졌네요. 집에 오니 마누라가 넷플릭스에서 클라우스를 보고 있길래 조금 봤는데 이거야말로 개연성과 줄거리를 모범적으로 다룬 영화이자, 깔 곳이 한 군데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우체부 집이 왜 마을 깊은 곳에 있나요? 항구에서 편지 받아서 바로 전달해야 하니 가장 외곽에 있어야지요. 이것만 빼면 지적할게 하나도 없어요.
이거라도 봐서 그나마 뇌 정화가 됐지, 아니었으면 한 일주일 동안은 사람 만날 때마다 혹시 유랑지구 봤냐고, 그게 얼마나 형편없는지 아냐고 열변을 토할 뻔....
우징이 나온 울프 워리어 같은 건 보는 제가 손이 오그라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