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2023년에 신분증과 현금 채운 중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모든 전자 결제수단이 막힐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 만약 현금마저 통용되지 않는다면 그건 통조림이나 병뚜껑이 쓰이는 세상이겠지요.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지갑을 두고 어플 결제로 갈아타오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KT 통신국 건물에서 불도 나고, 신한카드 서버가 뻗기도 하고, 카카오 서버가 며칠씩 터진 일들도 있었지만, 그 중 가장 당황했던 일이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갑자기 폰이 꺼지더니 무한부팅에 들어가는 경험을 겪어보니, 스마트폰 위에서 작동하는 기능은 언제라도 쓰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현대인에게 스마트폰 하나만 사라져도 굉장히 무력해짐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돈이 있어도 카카오T 어플을 켜지 못하니까 맨손으로는 택시가 잡히지 않더군요. 한밤중에 굉장히 고마우신 선배께서 대신 택시 잡아주고 자동결제까지 해 주셨습니다... 다음날 가족들의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말들은 덤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걱정이 기우가 아니라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지금은 신분증과 최소 10만원의 현금을 채워 다닙니다.
왜 10만원이냐면 여러 가능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입니다. 한 테이블의 밥/술값을 넘지 않고, 비상시에 구급차를 부를 수 있고, 서울 어디든 심야 택시로도 다닐 수 있고, 하루의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금액으로써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정말 없었으면 하지만... 큰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전자 신분증 같은건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족에게 빠르게 연락이 가려면 실물 신분증이 필요합니다.
(여담으로 자동차 유리에 붙이는 등의 혈액형 정보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조차 혈액형을 다르게 알고 있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어서, 응급 출동한 구조사들은 다른 정보를 믿지 않고 빠르게 혈액형 검사를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한은행은 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올해 한번 전산 오류로 저녁 먹고 나오는데 카드 결제가 막혀서 현금을 꺼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같은 일이 또 생기는 것을 보면 전산망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물고 이어져서 이렇게 되었네요. 여하튼 저는 월세를 하루 미룰 핑계가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