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바접이 시작되는 늦가을, 혼다 모터사이클 인천점에서 주최하는 시승행사가 열렸습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연 1만대를 판매하는 유일한 브랜드 혼다답게 참가자가 무척 많을 것이라 생각, 행사 시작 시각인 오전 10시쯤에 맞춰 도착. 다행히 사람은 적었고 시승 중에 다른 차를 대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신청한 차는 총 4대였습니다. 신분증을 맡기고 수속을 마칠 즈음에 첫 바이크가 준비돼서 기분 좋게 시승할 수 있었습니다.
1. CL500
이름은 500이지만 실제로는 471cc 엔진을 사용하는 471 패밀리의 최신 라인업으로,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레트로 분위기의 레블 500을 기반으로 일부 설계와 디자인을 변경해 "레트로해 보이는 스크램블러처럼 보이는 무언가"로 재탄생한 모델입니다.
'모범생 혼다'라는 말처럼 모난 데 없는 성능으로 알려진 혼다 모터사이클 중에서도 유별나게 가운데에 위치한 471cc 2기통 엔진 바이크답게, 출력과 무게, 포지션, 서스펜션 그 모든 것이 "아주 좋지도 않지만 나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라는 기가 막힌 설정을 자랑합니다.
일단 낮은 시트고 덕분에 만만하게 양발이 닿고 무릎이 넉넉히 구부러지니 저속에서 차체 제어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습니다. 양쪽 풋페그도 원가절감의 냄새가 나지만 사용감은 괜찮습니다. 비록 기어 레버는 각도가 미묘하게 꺾여 있어서 발이 헤매기도 했지만, 이건 롱부츠(다이네즈 토크3 아웃)를 쓰는 저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출력 역시도 온몸이 굳을 만큼 토크가 강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한숨을 쉬어야 할 만큼 약하지도 않고, 아무데서나 과속을 하기엔 출력이 부족한데 또 은근슬쩍 오버페이스로 달리는 주변 교통흐름에 역류하지 않을 만큼의 출력은 당연히 나오는... 정말 여러 측면에서 주행 난이도를 가능한 낮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바이크였습니다. 사실, 이런 걸 잘 만들 수 있는 것도 제조사의 실력이긴 하죠.
2. CB750 호넷
소신발언) 아무리 그래도 호넷인데 2기통은 좀 아니지 않음?
호넷이 현역이던 시절 저는 바이크는커녕 자동차 운전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호넷의 위명은 알고 있었습니다. (최근엔 그 구형 호넷 오너 분도 만나봤고...) 미들급 4기통 네이키드 바이크, 높은 RPM에서 나오는 특유의 배기음 덕분에 말벌이라는 별칭을 가진 혼다의 전설적인 라인업. 그런데 부활한 호넷은 실린더 숫자도 반으로 줄었고, 헤드라이트는 다른 바이크에서 본 것 같고, 묘하게 원가절감의 냄새가 나니 실망스러웠죠.
실제로 타본 호넷도 그렇던가요? 아뇨.
솔직히 말해, 이날 탔던 바이크 4대 중 호넷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경량 차체에 짧은 휠베이스, 약간의 스로틀 조작만으로도 순식간에 RPM을 올려버리는 엔진 세팅. 젠틀한 혼다라는 선입견은 클러치 미트 후 가볍게 스로틀을 당기는 순간 날아갔습니다. 너 록주하려고 탔다 아니에요? 그럼 록주를 해야지 라는 느낌. 펀 바이크란 이런 거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작은 TFT 계기반을 통해 주행에 필요한 정보를 충실히 제공한다는 스마트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시승한 차량에는 퀵 시프트가 없었는데, 만약 순정 옵션이 있다면 도심이나 교외에서의 오랑캐 짓거리에는 이것만한 바이크가 없겠더라고요. 다만 기본 포지션이 약한 전경자세에 스텝 위치 때문에 무릎이 꽤 구부러지다 보니 장거리 주행은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토크로 천국 보내주기로 명성이 자자한 야마하의 MT-07과 좋은 비교가 될 것 같네요. 게다가 이거 가격이 1,070만원. ABS TCS TFT 계기반 다 들어간 혼다 미들급 바이크가 CB650 가격이랑 비슷한 수준. 미쳤다진짜
3. XL750 트랜스알프
호넷과 같은 엔진을 공유하는, 그러나 전혀 다른 성향의 바이크인 XL750 트랜스알프입니다.
이쪽도 과거 혼다가 생산하던 라인업인데, 한동안 명맥이 끊어졌다가 최근에야 부활하게 되었죠. 4기통의 정체성이 2기통으로 줄어든 호넷과 유사하게 트랜스알프는 본래 V트윈 엔진이었다가, 이번에 병렬 엔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역시나 오프로드 바이크답게 커다란 사이즈의 스포크 휠이 제일 눈에 띕니다. 다른 모델은 다 괜찮았는데 트랜스알프만은 양발 착지가 다소 불안정했네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이즈가 뚱뚱하지 않으니, 다리가 덜 벌어져 발 위치가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윈드실드는 제 역할을 다하긴 어려울 것 같지만 이런 것이 늘 그렇듯 없는 것보다는 다소 낫고, 페어링의 전체적인 형상은 유선형으로 부드럽게 라이더의 몸을 가려주기는 합니다.
호넷과 같은 엔진을 쓰기 때문에 호넷처럼 날카롭고 예민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다른 바이크보다 더 둔하다는 느낌으로, 생각한 것보다 몇 mm는 더 당겨야 바이크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혹시 모드 설정 차이인가 싶어 그래블 모드를 빼고 모든 모드를 시험해봤지만 대동소이하더라고요. 토크 역시 약해진 것인지 항속을 유지하다가 재가속을 할 때의 가속력도 그저 그렇기만 했습니다.
하나 확실하게 좋다고 할 수 있는 건 포지션입니다. 이런 류 바이크는 스탠딩 포지션, 즉 일어설 때를 고려해 핸들을 높게 설치하다 보니 평범한 주행 시에는 자연스레 허리를 세운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죠. 그런 한편으로 스텝의 위치가 미들에서 살짝 앞으로 빠져 있는데, (개인차는 있겠지만) 의자에 앉은 것처럼 무릎이 아주 구부러지지도 않고, 허리를 아주 곧추세우지도 않은 편안한 자세가 연출됩니다. 이대로라면 2-3시간은 너끈히 논스톱으로 주행하고도 남겠다 싶을 정도로요.
특정 브랜드나 특정 장르의 바이크를 선호하는 게 아니라, 육각형처럼 꽉 차고 편안한 바이크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이걸 추천하고 봐야 할 정도로 편안합니다.
4. CB1000R
그렇습니다. 사실 시승행사 참여 목적은 이놈이었습니다.
짧게 줄이겠습니다. 시속 60km로 달리는 감각으로 시속 100km를 달리게 합니다.
있어야 할 장비들은 다 갖고 있습니다. 차체 밸런스 훌륭합니다. 근데 전경자세에 스텝이 살짝 뒤로 빠져 있어서 '스포티'한 자세 아니면 탈 수가 없습니다. 노면에 따라 허리에 부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근데 얘가 호넷보다 타기 편합니다. 스로틀 무섭지 않습니다. 살짝 당겼다고 갑자기 발사가 되는 그런 종류의 바이크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선형적인 출력 곡선으로 당기는 만큼 정직하게 출력이 나오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100km/h
5. etc
그냥 찍은 사진들입니다.
CRF1100 아프리카 트윈 어쩌고 저쩌고 ES DCT.
앞트방의 디자인은 건담이나 구슬동자 같은 로봇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습니다.
최근 길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CT125 헌터 커브. 사진은 얇상한 자전거처럼 나왔던데, 실물은 시트쪽의 부피감이 꽤 있었습니다.
"그 불칼"
본격적인 스포츠 바이크는 멋지긴 한데 타고 싶진 않아서, 시승 목록에 있었지만 패스했습니다.
"한국인 나쁜놈들아 수입하면 산다면서"
혼다 코리아의 악몽이라 하던 CB1100EX(아마도?) 클래식한 거, 머플러 쌍발인 거, 낭낭하게 탈 수 있는 것으로 제 취향을 세 번이나 저격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연은 없는 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