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럭스 세척
방송으로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난 주에 화이트폭스 키보드를 조립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납땜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플럭스를 듬뿍 사용해서 납땜을 합니다.
그래서 납땜을 다 하면 기판이 아주 엉망진창이 되는데, 그래서 플럭스 제거제로 기판을 깨끗히 닦아줍니다.
문제는 여기서 간과하지 못했던 것이...
(출처: https://mykeyboard.eu/catalogue/kailh-white-box-switch_288/)
사용했던 카일 박스축 계열 스위치에는 밑에 배수용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원래는 방수방진을 위해 배수용으로 뚫어놓은 구멍인데, 여기로 플럭스 녹은 물이 그렇게 잘 들어갑니다.
그걸 눈치챈 건 방송 끄고 나서 몇시간정도 사용하고 나서야입니다.
키를 누르는데 몇개는 플럭스에 찌들어서 누르면 제대로 복원이 안 되기까지 합니다.
아... 어쩔 수 없이 68개의 스위치를 다시 다 디솔더합니다. 그리고 다 뜯습니다.
정신적 충격이 워낙에 커서 사진은 찍지 못했습니다. 사진들도 그래서 퍼 온 겁니다.
기존 체리 MX 및 클론 스위치들과는 다르게 작은 부품들이 복잡하게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스위치 예순여덟개를 다 뜯어 부품별로 하나하나 모읍니다. 그리고 세척합니다. 그리고 조립합니다.
물론 그냥 조립하면 안 되고, 저 녹색 작은 부품이 있는 부분은 씻겨나간 윤활제를 재도포해줘야 합니다.
지난주 토요일에 시작된 일인데, 이걸 끝마친 게 고작 어제 일입니다.
대신 화이트폭스 키보드에는 원래 다른 키보드에 사용할 예정이었던 카일 스피드 카퍼 스위치를 심어줬습니다.
확실히 급이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은 드는 스위치이지만, 나름 느낌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체리 갈축보다 나은 느낌.
세척한 스위치는 하나 죽긴 했지만 다음 키보드에 심어줄 예정입니다. 어쨌거나 이 정도면 해피엔딩.
2. 납땜에서 전자공학까지
사실 이 모든 것은 기판을 싸게 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계식 키보드용 기판이 기본 소자를 포함해서 9천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납땜이 된 기판은 3만 4천원입니다.
공임비 2만 5천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두 장 사서 한 장만 건져도 이득 아니냐고.
물론 이건 당연하게도 기본 납땜 자재들을 비롯해서 들어갈 비용을 무시한 계산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인생 두번째로 납땜을 시도해보게 되었습니다.
남들도 그렇지만 저 역시 첫번째 납땜은 중학생 시절 라디오 키트를 조립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만들었지만 동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전자공학은 거들떠도 안 보고 지금까지 살아왔었긴 합니다.
그래도 예비품도 한 세트 있겠다, 납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번엔 돈을 들여 장비도 전부 갖춥니다.
ATmega32a도 붙이면서 SMD IC 납땜의 맛을 알아가고, 핀셋으로 잡고 1N4148W 칩 다이오드도 61개 달아줍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다 만들고 꼽아보니 신기하게도 동작합니다.
두 장 중 한 장만 건져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장 다 건져 버립니다.
이렇게 된 이상 키보드를 두 대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지금 돌아보면 이 취미에 들인 돈이 엄청납니다.
돈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젠 욕심까지 생깁니다. 직접 기판을 설계해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일단 공개된 설계물들도 찾아보고, ATMEL 데이터시트도 찾아보고 하면서 스키마를 짜 봅니다.
꽤나 그럴싸합니다. 5*5 배열 키패드입니다.
사실 키보드는 어떻게 되었든 완제품을 사는 게 싸게 먹힌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지만, 이미 늦은지 오래입니다.
다행히 기판을 주문하는 걸 막고 있는 것은 제 기판 설계 능력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다 9천원짜리 기판 두 장에서 시작된 거라는 게 더 무섭습니다.
3. 하드웨어에서 펌웨어로
요즘은 별별게 다 오픈소스로 나옵니다. 심지어 커스텀 키보드들을 위한 오픈소스 펌웨어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61키 키보드에서는 굳이 많은 것이 필요 없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C언어로 쓰인 오픈소스 펌웨어는 C언어로 할 수 있는 건 다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키를 한번 누를때랑 두번 연속으로 누를 때 다른 입력을 한다던가, 32개까지 레이어를 만든다던가...
아쉽게도 제가 구매한 기판은 자체 펌웨어를 사용합니다. 기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약간 아쉽습니다.
하지만 오픈소스 프로젝트인 만큼, 누군가 다른 사람이 호환 펌웨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
냉큼 펌웨어를 올려보고, 이런저런 기능을 넣어 직접 컴파일도 해 봅니다.
그러다가 어디에 쇼트를 낸 건지, 아니면 납땜이 불량이었는지 키보드가 죽어버리고,
SMD IC 디솔더용 저온납을 구해 MCU도 교체해 보고, AVR ISP도 구해 부트로더도 새로 올려봅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면 이제 갈데까지 갔다는 느낌입니다.
문제는 이게 공식 지원이 아닌 호환 펌웨어기 때문에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기능이 어떤 건 제대로 동작하지 않던가, 가끔씩 키보드 연결이 잘 안 될 때도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릴없이 코드를 만지고 펌웨어를 깔고, 가끔 MCU도 밀고 다시 올려보고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퍽 소리가 나고 매캐한 냄새가 납니다. 엄지손가락에 따끔한 고통이 느껴집니다.
잘 보니 누드기판인 AVR ISP의 접점이 엄지손가락에 닿아 쇼트가 났습니다. 일단 대체품을 주문을 넣고 자세히 봅니다.
그리고 교체합니다. 왼쪽에 검은 점이 찍힌 소자가 죽은 소자입니다. 기판의 왼쪽 위에 있는 다이오드입니다.
정말 다행히도 키보드에 사용하는 1N4148W 다이오드랑 동등 규격입니다. 아마도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스킹 테이프로 칭칭 감아줍니다.
물론 혹시 모르니 여분으로 주문한 교체품은 취소하지 않고 놔둡니다.
정말, 이 쯤 되면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칩니다. 이 글도 그러한 자아성찰의 일환으로 쓰여졌습니다.
아직도 왼손 엄지는 아픕니다. 타는 냄새도 손에 짙게 배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당연히 이번 주 토요일에도 키보드를 조립할 예정입니다. 사서 고생을 한다는 느낌도 문득 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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