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에 있는 작업실에서 적당히 키보드를 두드리다 2층 집으로 내려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모기장을 열고 신발을 신고 몸을 돌려 모기장을 닫는 순간, 눈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가 보였습니다. 하얀색 벽지로 도배된 천장, 형광등 바로 옆이라서 더욱 하얀색으로 보이는 천장에 검은색 물체가 있더군요.
모기장을 다시 열고 그 곳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주마등도 아닌데 참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검은 비닐 쪼가리가 붙었거나 벽지가 찢어져서 검은색으로 보였을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으나 바로 폐기됐고, 저 존재는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기 싫은 그 곤충, 바퀴벌레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뒷통수 위에 저런 흉칙한 게 자리잡고 나를 관음하고 있다는 소름돋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진 궁을 저기서 저따위 각도로 펼치다니 그 판단력과 손가락 모두 아이언에 틀림없는 존재라며 한탄하고 있었던 스스로가 무서워졌습니다. 한참 컴퓨터를 하고 있을 때 책상 위, 재수 없으면 머리 위, 더 재수 없으면 목과 옷 사이의 빈 틈으로 파고 드는 공간 창출 능력을 보였을거라 생각하니 이보다 더 끔찍한 존재는 중국산 미세먼지밖에 없지 않을까 싶더군요.
어쨌건 잡아야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두면 지가 증발이라도 하나요. 동거 기간만 길어질 뿐이지. 그것도 제가 잡아야 합니다. 집에 다른 사람도 있지만 한 사람은 바퀴벌레가 몹시 신기하다며 후다다다닥 기어가서 쳐다볼거고, 다른 사람은 히이이이이이이익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을테니 둘 다 도움은 안 되네요. 사실 잡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휴지로 싸서 잡아야 하는데 휴지와 제 사이에 바퀴벌레가 붙어있는 천장이 있다는 게 문제일 뿐.
옆으로 사알짝 돌아가며 바퀴벌레가 아니라 곱등이나 이세카이로 가는 차원문 아닐까? 뭐 이런 헛된 망상을 품어봤는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은근히 슬림한 것이 곱등이의 볼륨은 아니고 영낙없는 바퀴벌레였고요. 이세카이로 가는 게이트라 해도 바퀴벌레를 신기하게 쫓아갈 애기와 히이이익하는 마누라를 두고 갈 리가 있겠나요. 아니 그 이전에 님들 같으면 바퀴벌레의 몸체 위에 이세카이 게이트가 펼쳐져서 이종족 여캐들이 낙원에서 손짓하는게 보여도 바퀴벌레를 손으로 잡고 싶겠어요?
휴지를 확보하는 동안 바퀴벌레가 팔목 위에 떨어지는 불상사라던가 날개를 호다닥 펼치며 얼굴에 달라드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그 자리에 한결같이 조신하게 앉아 있었으나, 집에서 뛰거나 날지 않는다니 녀석 거 참 예의바른 존재로구나, 집안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걸?이라며 칭찬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군요. 바퀴벌레가 정말 예의를 차릴 줄 안다면 다른 거 다 필요없고 지금 당장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원 절약과 쓰레기 배출 감소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으나 바퀴벌레를 잡는 데 쓰는 휴지를 아낄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넉넉하게 인심을 써서 휴지를 길게 뜯어 몇 겹으로 접었습니다. 그리고 잘 조준해 아직도 천장에 붙어있는 그것을 와락 덮쳤지요.
그런데 저는 예나 지금이나 운동은 꽝이고, 날아오는 공을 차거나 치거나 받는 그런 건 더더욱 못합니다. 살짝 빗나갓다는 소리죠. 이게 아예 빗나가면 바로 재시도하면 될텐데 반쯤 빗나가서 배와 몸통은 휴지 밑에 깔렸지만 머리는 그 밖으로 새어나와 바둥바둥 꼼지락거리는 유쾌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지네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기지를 발휘해 휴지를 한번 더 덮어서 간신히 포획은 했습니다. 지금쯤은 산산조각난 채로 하수구를 타고 흘러내려가고 있겠네요.
하지만 천장에 붙어있던 바퀴벌레가 심어준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시 작업실에 들어올 때도 모기장을 열기 전에 방을 두리번거리며 아까 그 녀석의 친구나 가족이 복수하겠다고 찾아오진 않았을까 피해망상에 시달려야 했거든요. 하다못해 그 놈의 원수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등장하더라도 사절입니다. 같은 바퀴벌레라면 말이죠. 방 안에 들어서도 괜히 구석진 곳이나 벽의 주름이 바퀴벌레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무슨 소리 하나만 들려도 바퀴벌레처럼 느껴집니다.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만한 맥스포스 갤을 지저분하다 싶을 정도로 계단 곳곳에 발라놓고 이제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거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보지만, 그들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 평온한 삶을 깨트리고야 말 것입니다. 부디 그 날이 일찍 찾아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