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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11과 아이폰11프로가 어제 나왔습니다. 디자인으로 유명한 애플인 만큼 파격적인(?) 이번 디자인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인 거 같고, 많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도 생각이 여럿 들어서, 미숙하지만 정리해서 써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플이 점점 변하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잡스 사후 2~3년이 지났을 때부터 그게 뚜렷하게 가시화됐을 겁니다. 누군가는 그 때문에 애플 디자인이 망해간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런 변화를 견디지 못해 조나단 아이브가 애플을 나온 것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이 오히려 조나단 아이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굉장히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제품 디자이너이며 여러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었지만, 그 자리를 홀로 너무 오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의 디자인 독재가, 잘 알려진 대로 수익과 마진에 집중하는 팀 쿡의 성향과 겹치면서 애플을 바꾸어 놓았다고 봐요.
무슨 말인가 하면, 조나단 아이브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조형,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재료와 공정에 대한 집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재료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쁜 제품 디자인이 시작된다'고 언급했고, 또 최근 회사들이 여러 대륙에 걸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실물을 보지 않고 디자인을 진행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디자인이 갈수록 매력을 잃고 있다고 했습니다. Objectified 라는 디자인 다큐멘터리에선 알루미늄 덩어리가 어떤 드라마틱한 공정을 통해 키보드나 iMac의 프레임이 되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아이폰6와 6+를 개발하며 새로운 아이폰의 화면 사이즈를 정할 때는, 4.0인치부터 6.0인치까지 모든 사이즈를 0.1인치 단위로 만들어 계속 사용해 보며 가장 좋은 사이즈 두 개를 골라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분명 제품 디자이너로 너무나 훌륭한 자질입니다.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애플의 전설적인 제품들이 이를 증명하죠.
그러나 잡스 사후, 그는 옆에서 그에게 피드백을 줄 가장 큰 동료를 잃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잡스는 성격이 좋진 않았지만, 조나단 아이브와 비슷한 완벽주의자이면서도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 디자인을 바라봤습니다. 아이브가 정도를 걷는 데에 잡스라는 사람이 꽤 도움을 줬을 겁니다. 그렇다면 잡스가 죽은 후에, 20년이 넘게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지킨 그에게 감히 누가 피드백을 줄 수 있었을까요? 아, 한 명 있었죠. 스콧 포스탈이라고, iOS와 OSX 소프트웨어 전반을 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Siri의 부진과 조악한 퀄리티의 애플 지도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2년에 회사에서 쫓겨나 버렸죠.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아이브와의 불화설은 반쯤 오피셜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가 나간 직후에 아이브는 제품에서 영역을 넓혀 iOS와 OSX 전체 디자인 전반의 직무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1년 뒤에 전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의 iOS 7이 나왔습니다. 1년 더 지나서는 OSX에도 그 디자인이 적용됐구요. 말하자면 잡스 사후 그를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진 겁니다.
이 시점부터 아이브는 애플 제품 디자인에서, 전자제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치품, 에르메스 같은 명품 브랜드에서 나온 악세서리를 디자인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게 됩니다.
2013년의 맥 프로를 기억하시나요? 쓰레기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2013 맥 프로는, 소형화와 간결한 디자인을 위해 쿨링과 확장성을 포기했고 결국 프로 유저들에게서 외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쿨링 구조 자체는 정말로 아름답죠. 원기둥 형태의 금속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내서 만든 외장은 또 어떻구요. 생산 과정 동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제품 디자인학도들의 꿈이 현실에 이뤄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짝거리는 외장의 폴리싱 균일도는 십수 나노미터 단위라고 하죠. 아이폰7에서는 제트 블랙이라는 마감을 무기로 들고 나옵니다. 이제껏 없었던 방식의 알루미늄 마감으로, 수십 차례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너무나 아름다운 유광의 깊은 블랙을 완성했죠. 결과는? 정말 예쁩니다만 과장이 아니라 바람만 스쳐도 스크래치가 납니다. 그 다음은 애플워치였던가요. 애플 워치의 하단부, 센서가 위치한 부분 유리도 엄청난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지지요. 최종 광택 단계에서 유리 표면의 균일도는 4나노미터 수준입니다. 근데 혹시 애플 워치 쓰면서 후면 유리 자주 보신 분?
이런 사례야 최근 애플 제품들에서 끝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 아이폰XS에서는 후면 유리와 측면 스테인리스 스틸 밴드의 색상을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스테인리스 스틸 합금에 PVD 컬러 프로세스를 사용했습니다. WWDC에서 리뉴얼된 맥 프로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형태의 알루미늄 외장을 제공하구요. 이번에 나온 아이폰11프로에서는 한 덩어리의 유리를 정밀하게 깎아, 무광 면이 부드럽게 올라와 컷팅된 듯한 유광 면으로 이어지는 신기한 마감을 보여주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언제부터인가 감흥을 주지 않는 겁니다. 아이폰4를 발표할 때, 스테인리스 스틸 밴드를 정교하게 CNC 컷팅하여 그 자체로 안테나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저는 감탄했습니다. 근데 요즘의 이런 공정들은 그냥 우와, 신기하네.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그 집착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패드2를 발표하며 인문학과 공학이 교차하는 곳에 애플이가는 길이 있다던, 그런 애플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렇다고 주장했던 애플’은요. 위에 언급한 대로 애플이 그냥 기가 막히는 마감의, 명품 악세서리 제조 회사가 되어버린 거예요. 더 문제인 것은, 애플 스스로도 자신들의 제품을 그렇게 다루게 됐다는 겁니다. 일종의 자아도취 같은 거죠. 그들이 만드는 제품의 외장, 소재, 컬러, 마감, 재질 수준이 실제로 너무나도 우수하기 때문에 그들이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미적인 측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어요.
최근의 애플 제품을 보면, 비례감이 이상한 제품이 하나 둘 나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애플 하면 황금과도 같은 비례와 정석적 비율을 고수하는, 완벽주의의 대명사 같은 회사 아니던가요? 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린 맥 프로와 Pro XDR처럼, 이해하기 힘든 조형의 제품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조나단 아이브와 애플의 디자이너들이 드디어 비례감과 조형 능력을 잃고 미쳐버린 것일까요? 아니요. 그럴 리 없죠. 그들은 아마 전 세계 전자 회사 디자이너들 중 그런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일 겁니다. 저는 그들의 능력이 아닌, 성향이 바뀐 것이라 봅니다.
하이 패션계를 보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범주의 디자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정말 무슨 조형인지, 그 옷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죠. 하지만 그게 우리가 입는 옷에 직접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하이 패션에서 형성된 트렌드는 수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 그리고 시간을 거쳐 정제되고 완화되고 변형되며, 우리가 입는 옷 속에 천천히 스며듭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는 우리도 모르게 그런 디자인이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플은 지금 스스로를 패션이 차지하는 그런 위치로 끌어올리려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에 없던 이상한 조형들, 어딘지 어색한 비례들, 새로운 형태들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석을 떠나, 새로운 형태와 조형을 시도하는 거죠. 아이브는 자신의 재료와 형태, 공정에 대한 집착을 이런 일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마진을 좋아하는 팀 쿡의 성격은 이를 강화해 주죠. 마치 명품과도 같은 마감의 제품은 비싸게 팔기 딱 좋으니까요. 가격을 정말 많이 올리기도 했구요. 그리고 두렵게도 이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갔지만 애플은 버버리 출신 마케팅 부사장을 영입했었죠. 그리고 얼마나 많은 회사들이 노치를, 알루미늄 측면 디자인을, 안테나 밴드를 따라하는지 보세요.
제가 이 트렌드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은, 그 과정에서 애플이 예전에 추구하던, 최소한 추구한다고 말했던 가치를 점점 잃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소재와 공정, 마감에 집착하는 거요? 좋죠. 하나의 곡면 유리로 된 아름다운 후면 마감? 좋습니다. 컬러를 위한 수십 단계의 공정? 다 좋아요.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이 사용자를 향하지 않습니다. 마치 깐깐하고 자존심 센 장인이 공방에서 만드는 제품처럼, 자아도취와 자기만족을 향해 있는 거죠.
장인 제작의 악세서리들은, 패션 업계들은 그래도 됩니다. 자신만의 멋과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니까요. 하지만 애플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멋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들이 더 나은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도와야죠. 그 일상은 개발자들에겐 더 편한 코딩이어야 하고, 디자이너들에겐 더 수월한 창작이어야 하며, 학생들에겐 더 좋은 배움의 기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애플은 그런 것보다는, "애플 제품을 쓰면 이만큼 쿨해 보이고 멋지다. 우리는 최고거든"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보입니다. 위에 언급한 맥 프로를 예로 들어보죠. 외장에 쓰인 알루미늄의 절삭 수준은 솔직히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검은색으로 통일된 내부 부품들의 배치는 완벽하죠. 컬러나 마감은, 실제로 보면 당연히 너무 좋을 겁니다.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은 말 그대로 빛이 나구요. 우와, 싶겠죠. 근데, 그래야 하나요? 맥 프로라는 건, 책상에 올려진 보석이 아니라 언제든 힘차게 시동을 걸 수 있는 워크호스여야 하지 않나요?
이게 애플이 하고 있는 가장 큰 실수이자 착각입니다. 그리고 이 착각을 촉발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조나단 아이브라고 봐요. 그들이 빨리 방향을 바로잡길 바랍니다. 애플은 패션 회사가 아닙니다. 패션 회사여서도 안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