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초에 취미로 키보드를 하겠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일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두 달 전의 일이네요.
다시 생각해 보면 고작 그 두 달 사이에 키보드의 댓수만 대체 몇 개가 늘어난 건지 두렵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왜인지 취미의 범주에 키보드는 잘 안 맞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키보드는 단순히 컴퓨터의 입력 장치에서 끝나고,
조금 관심 있다고 한다면 좀 더 좋은 키보드, 일반적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쓴다 정도이니까요.
즉 키보드는 '장비'인 것인데, 장비를 취미로 한다는 건 보통 돈을 쓰는 것을 취미삼겠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지요.
물론 돈은 준비를 하고 취미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성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문하고, 나만의 꿈의 키보드를, 소위 끝판왕을 그려 봅니다.
하지만 신나게 카드를 긁던 그 당시에는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키보드를 취미로 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만큼, 관련 용품도 그렇게 쉽게 찾아볼수만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공동 구매나 공동 제작을 거쳐서 고작 수십 개 찍어내기 마련이고,
그 과정은 정말 이례적으로 빠르면 보름, 보통은 못해도 두어 달, 길면 반 년이고 일 년이고 걸리기 마련입니다.
저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공동 제작이고 공동 구매고 참여해서 느긋히 기다립니다.
부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당시 사용하던 키보드인 포커 3에서 업그레이드를 한다는 느낌으로 골라 봅니다.
기판 및 케이스는 몇 년 째 사용한 만큼 익숙한 61키 배열로.
포커 3에 있었던 만큼 RGB 백라이트도 빼먹을 수 없습니다.
스위치도 기존에 계속 사용해왔던 만큼 리니어 스위치로 정합니다.
즉 당시 쓰던 키보드에서 바로 윗 단계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을 목표로 정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잊기 마련이고, 기다리는 동안은 또 다른 것들을 원하게 됩니다.
화이트폭스 키보드 키트도 구해다 만들면서 납땜에 익숙해져 보고,
아예 기판과 케이스를 비롯한 부품들을 하나씩 모아서 두어 개 더 만들어 봅니다.
호기심에 기존 배열에서 벗어난 50% 오쏘리니어 배열이나 40% 스태거드 배열도 만들어 봅니다.
그런 와중에 공동구매 기간이 끝나고, 주문했던 물건들이 모두 모인 것이 지난 주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꿈의 키보드를 만들 수 있게 되었어니 기뻐야 할 테지만, 기분은 왜인지 미묘합니다.
키보드 커뮤니티에는 '엔드게임' 이라는 밈이 있습니다.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현대 한국어의 '끝판왕' 과 상통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엔드게임이 단순히 종결자라는 의미로 끝나지 않고 밈이 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엔드게임이라는 골대는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잡을 수 없는 허상과 같다고 해서 밈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어제 오후에 조립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어렵지 않게 두어 시간만에 완성을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모자란 느낌이 듭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뜯습니다. 조립하는 과정에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조립합니다.
이번에는 다른 남는 부품을 써 보기도 하고, 체결을 다르게 해 보기도 합니다.
몇 번을 뜯고 다시 끼우고 했지만 기대에는 닿지 못합니다.
그제서야 깨달음이 듭니다. 두 달 전에 부품을 주문하며 들떴던 저의 기대는 식은 지 오래라는 것을.
허니문 기간이 다 지난 후에야 물건을 받은 만큼, 마치 김이 다 빠진 콜라를 마신 느낌마저 듭니다.
찾아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런 것은 저만 겪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공동구매나 공동제작 기간이 긴 물건일 수록 그런 경향이 심하고,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비싼 돈을 내고 물건을 받자마자 원가에 다시 장터로 보내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렇게 과연 이것이 엔드게임의 밈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제가 기대했던 요소들은 다 들어 있습니다.
저한테 익숙한 61키 배열에, 핫스왑 소켓이 장착되어 납땜 없이 스위치를 마음대로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RGB 백라이트는 밝고 선명합니다. 기본 효과도 다양하고 마음대로 프로그램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스위치에서는 서걱서걱거리는 마찰은 하나도 못 느낄 정도로 부드럽습니다.
통 알루미늄 케이스에 스테인리스강 보강판 조합은 아주 묵직합니다.
재어 보지는 않았지만 킬로그램 대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제 취향은 한참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어느새 61키보다 40%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RGB가 있는 것이야 좋지만 굳이 비싼 돈을 주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위치가 너무 서걱거리는 것도 안 좋지만, 너무 서걱거림이 없으니 이것 또한 어색함을 느낍니다.
스위치의 하우징 재질에서 느껴지는 소리도 무언가 아쉽고,
뿐만 아니라 리니어보다 요즘은 넌클릭 택타일이 손에 더 맞는다는 느낌입니다.
케이스와 보강판이 묵직한 것은 장점이기는 한데, 굳이 이렇게까지 무거울 필요가 있는가도 싶습니다.
무엇보다 보강판의 체결 방식이 아쉽다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슛은 시원하게 날렸으나 골대가 이동한 셈입니다.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입문부터 종결까지를 다 겪어본 느낌입니다.
돈도 쓰고 싶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쓴 것 같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키보드 부품 관련 사이트는 얼씬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안 온 물건들도 있으니까요.
쓸데없이 장황하게 길게 글을 썼습니다.
길게 글을 썼는데 사진 한 장 없이 등록하기엔 왜인지 미안한 느낌이 들어 급하게 한장 찍어 봅니다.
주문할 당시에도 키캡은 결정하지 못해서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동안 포커 2에 끼워진 채로 잘 사용하였던 보텍스 먹각 키캡을 끼워 주었습니다.
그래도 적당히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