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에 비온다니 정해뒀던 계획은 다 취소하고, 일할건 쌓여있고, 아파서 하루는 날렸지만, 그래도 휴가에 하루는 놀아야지 싶어서 벼르고 벼르던 덩케르크를 봤습니다.
용산 아이맥스는 자리 확보하기 힘든데다, 일요일에 봤을 땐 수요일부터 아이맥스 상영 계획 자체가 안 나와 있어서 포기했는데.. 지금 보니 나오네요. 스케줄 반영이 늦은듯.
어쨌건 스포일러가 심하니 영화 보신분만 보세요.
처음에는 분명 이런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예고편에서는 유명한 배우도 안 보이는 것 같아서 머리를 비우고 보러 갔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인터스텔라에서 참 사람을 갑갑하게 만들었으니, 이번엔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어줄까 하고 기대하면서요.
그런데 왠걸.
처음 절반은 이걸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들보다는 그나마 좀 희망이 보이긴 한데.. 배경음이라기보다는 효과음에 가까운 한스 짐머의 음악이라던가, 계속해서 괴롭혀지는 군인들을 보고 있자니 딱 이 영화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더군요.
사울의 아들이 워낙 마이너한 영화라서 보신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저랑 같이 봤었던 마누라도 똑같이 사울의 아들이 떠오른다고 평가하더군요.
거기에 배가 계속해서 침몰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저는 몇년 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대형 참사가 자꾸 생각나서.. 기분이 여간 힘들더군요.
하여간. 처음 절반 동안 전쟁의 비참함은 아주 잘 봤어요. 놀란 감독이 "제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졌던 문제는 그들이 벗어날 것인가? 잔교로 가려다 다음 폭탄에 죽지는 않을까? 건너가던 중에 배로 인해 으깨지진 않을까?" 라고 했다던데 의도대로 된듯.
그리고 그 명대사, Home이 나온 뒤에는-
갑자기 장르가 바뀝니다. Home도 그렇고 몰려오는 배에 사람 태우는 장면도 그렇고. 뒤에 들려오던 소리도 효과음에서 배경음으로 바뀌구요.
뭐 구하러 온 배가 왔으니 분위기가 바뀌는 건 알겠으나, 돌아가기까지 힘든 여정이 남아 있다는 걸 감안하면 분위기를 서서히 바꿔줬으면 어땠을까... 너무 순식간에 반전하니까 적응이 잘 안되더군요.
이쯤에서 일주일, 하루, 한시간을 교차편집한 기법은 참 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 제 눈에는 서양 사람들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배우들도 헐리우드 스타가 아니라서 티가 잘 안나고, 옷도 다들 똑같으니.. 얼굴 구분이 좀 더 명확하게 됐음 좋겠다 생각은 들었는데.
마지막에 공군이 마스크를 벗는 순간 떠오른 건 딱 이 장면이었습니다. 배우 개그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톰 하디인줄 모르고 봤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봤던 곳이 아이맥스가 아니라서 짤린것 같은데, 마지막엔 독일군이 저 멀리서 왔다면서요?(역시 아이맥스에서 봐야 합니다) 그것까지 감안하면 정말 매드맥스..
전체적으로는 잘 만든, 그리고 볼만한 영화이긴 한데... 감독이 아이맥스 욕심을 내려는 건 알겠지만, 실질적으로 아이맥스의 접근성이 좋지 않으니 그냥 집에서 보는게 화면 잘림 없이 보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어요.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옥자도 그렇고 군함도도 그렇고, 유명 감독들이 처음에는 꽤나 대중성과 재미까지 갖춘 작품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주변 여건에 휘둘리거나 자기 찍고 싶은 것만 찍느라-덕질하느라- 좀 흥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놀란 감독도 그런 경향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좀 걱정이 되긴 하네요.
그와는 별개로 구도, 편집, 군상극의 측면에선 정말 감탄했어요.